루나는 산도즈의 감정적인 고통이 질병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를 위로할 방법이 없어서 걱정했다.

그때쯤 아스카마는 좀 더 나이가 들었고 성숙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영어로 말했다. "밀로. 다시는 기쁠 수 없는 거야? 당신이 죽을까 봐 너무 걱정돼."

나중에 가이주르에서 한동안 살고 나서야 산도즈는 마을 루나의 한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아기들을 포기했다.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기르도록 허락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안에서 생명의 액체가 차올랐고, 그래서 스스로 짝을 선택해서 본능에 따랐다. 이방인들이 만든 정원과 거기서 나온 풍부한 음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루나는 먹는 양에 따라 번식을 합니다. 나는 이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루나도 가족을 이루지만, 자나아타들이 허락하기 전에는 번식을 하지 않죠. 보통은 체지방도 낮게 유지됩니다.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음식을 얻기 위해 늘 멀리까지 여행하니까요. 그러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겠습니까? 정원들이 그 균형을 깨뜨린 겁니다."

만약 어떤 마을 공동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축적하면 추가적인 음식을 통해 칼로리를 제공받습니다. 그러면 여성들이 발정기를 맞이하죠.

그들의 짝은 그들이 고르는 게 아닙니다. 자나아타 유전학자들에 의해 골라지는 겁니다. 루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결혼할 수 있지만 번식은 자나아타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Escht chayil. ‘용감한 여성’이란 뜻입니다. 소피아는 우리 중 가장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항했군."
지울리아니가 말했다. 이제는 예수회 일행이 어떤 식으로 폭력 사태에 말려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소피아 혼자서 말했지만, 바카샤니들이 따라 하면서 일종의 노래처럼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다. 그들은 적다.’ 소피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산도즈는 밤이면 꿈속에서 그녀가 걷는 모습을 보곤 했다.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마치 여왕처럼 걷는 모습을. "소피아가 땅바닥에 놓인 아기 하나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들의 인구 구조는 야생 상태에서 육식동물의 비율과 거의 일치합니다. 먹이가 되는 종의 4퍼센트 정도죠. 수파아리가 이에 관해 설명해 준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루나가 ‘우리는 많다, 그들은 적다.’라고 노래하는 소리는 마치 악몽처럼 들렸을 겁니다."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펠리페, 지금 지구의 인구가 얼마나 되지? 140, 150억 정도?"
"거의 160억이죠." 펠리페가 조용히 대답했다.
"라카트에는 거지가 없어. 실업 문제도 없지. 인구 과밀도 없어. 굶주림도 없고, 환경 오염도 없어. 유전적인 질병도 없어. 나이 든 사람들은 노화로 고통 받지 않아.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연명 치료를 받지도 않지. 그들은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끔찍한 대가를 치르지만, 펠리페, 우리 역시 대가를 치르고 있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아이들의 굶주림이지. 바로 지금,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 순간에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가 굶어 죽고 있지? 우리가 단지 그 아이들의 시체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

"순찰대는 원래 갓난아기들만 죽이려고 했을 겁니다. 수파아리가 나중에 말하기를 만약 마을 사람들이 또 한 번 허가 없이 번식했다면, 그때야 아기를 낳은 루나가 처형을 당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루나가 저항했기 때문에, 순찰대가 과잉 반응을 한 겁니다. 그들은 폭동을 진압하려 했던 거죠."

아마 바카샤니 중 3분의 1 정도가 죽었을 겁니다.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고." 산도즈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소피아도. 지미도. 조지도 죽었습니다."

"한때 영국 군대에서는 병사를 처벌할 때 채찍질을 800번이나 했습니다. 그런 내용을 읽어 본 적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맞고도 살아남았죠.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말하기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뭔가 두드리는 느낌뿐이었다고 말입니다. 내 영혼의 상태도 그와 같았습니다.

"나는 수파아리가 원래는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의도였다고 믿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수파아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또 우리는 그를 매우 부유하게 만들어 줬죠. 자나아타치고는 아주 이해심이 많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느 정도 우리 처지를 헤아렸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을 말입니다."

"어쨌든 그는 분명 우리의 몸값을 치렀고,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책임을 졌습니다. 자신의 가솔로 받아들였죠."
"그때 그 덩굴을, 스타아카를 봤나요?" 존이 물었다.
"그렇소."
처음으로 직접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산도즈가 상념에 잠겨 앉아 있는 동안, 존 칸도티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하스타아칼라에 대해 들려줬다. 하스타아칼라는 의존성을 상징하고 강요하기 위해, 양손을 더 강인한 나무에 붙어 자라는 담쟁이덩굴의 늘어진 가지처럼 만드는 관습이었다. 존은 이제 마크가 왜 죽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산도즈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마크가 괴혈병에 걸렸던 건 아닐까요? 당신은 먹었지만 마크는 먹지 않았던 음식이 있나요?" 마크 로비쇼를 죽인 것은 괴혈병이 아니었다. 굶주림과 영양실조였다. 어쩌면 절망감인지도 모른다.

"수파아리 바게이주르의 저택에서 나의 위치는 불구인 식객에 불과했습니다. 수파아리가 변덕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질렸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저 내가 언어 교사로서 역할을 다 했고, 이제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으니 다른 곳으로 보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산도즈는 지울리아니를 똑바로 응시했다. "수파아리는 한 번도 내게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합니까?"

신은 ‘무엇’이 아니라 ‘왜’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자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자기가 한 일을 정당화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지나가는 방마다 곡선을 넣을 수 있는데 직선으로 만들어진 구석은 하나도 없었고, 장식을 달 수 있는데 여백으로 놔둔 공간도 없었으며, 칠을 할 수 있는데 흰색으로 놔둔 부분도 없었다. 심지어 공기마저 치장되어 있었다! 그가 이름을 댈 수도 분간할 수도 없는 무수한 향기가 풍겨 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산도즈는, 이곳이 자신이 본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천박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순간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옆집에 살던 이웃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을 때였다. ‘난 정신을 잃어 가고 있어. 한 번에 한 단어씩.’

수파아리가 위대한 시인인 레시타에 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바로 에밀리오 산도즈와 동료들을 라카트로 불러들인 고상한 노래들의 작곡가였다.

"전하?" 상인이 말했다. "괜찮습니까? 마음에 드시는지요?"
"그래." 레시타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수파아리를 향해 짜증스럽게 말했다. "마음에 드네. 내 비서가 법적인 절차를 마쳐 뒀으니 아무 때나 적당한 날짜에 내 누이와 결혼하게. 형제여, 그대가 아이를 가지기를." 그의 시선이 다시 이방인을 향했다. "이제 가 보게."

이제는 갈라트나의 레시타에게 봉사한 대가로 새로운 혈통의 창시자가 된 수파아리 바게이주르는 산도즈를 여기로 데려온 경비병과 함께 방에서 나갔다.

천재성에는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어리석음에는 그런 장애가 없는 모양이군.

신은 나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한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여러분, 만약 내가 그 아름다움과 황홀함이 진짜라고 받아들인다면 나머지 일들 역시 신의 뜻일 수밖에 없다는 쓰디쓴 결론에 도달하오.

"저이가 나쁜 사람은 아니오, 존. 단지 인간의 본성일 뿐이지. 이 모든 일이 자기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나의 어떤 실수, 혹은 자기에게는 없는 어떤 결점 때문이기를 바랐던 거요. 그래야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다음번에 누군가 들어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소. 내가 죽건 상대가 죽건 상관없다고.

"나는 죽기를 바랐소, 하지만 신은 그 아이를 대신 데려갔소. 어째서요, 존?"

그렇게 부서지고 상처 받았어도, 에밀리오 산도즈는 여전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어. 그 사람은 여전히 신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네."

그리고 우리는 듣는 일을 통해 그분을 도왔던 거로군요."
"그래. 우리는 그 사람을 돕는 거지. 그 사람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들어야만 하네. 그 사람이 의미를 찾아낼 때까지 말일세.

육체적으로는 같은 행동인데, 왜 매춘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덜 끔찍해 보였는지 말이오.

"내 생각에 매춘에는 적어도 결정권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소. 어느 정도는 동의가 필요한 일이니까."

"차라리 매춘이, 집단 강간보다는 낫죠." 펠리페 레예스가 힘없이 말했다. "설사 강간범들이 시인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면서 기술적인 세부사항을 되도록 묘사하지 않으려 했다. 등장인물이 그 세계에서는 이미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굳이 놀라워하며 언급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조지는 착륙선의 연료 부족을 가지고 야브로나 소피아가 자책할까 봐 걱정이었다. 소피아는 연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지는 순전히 바보 같은 이유로 연료를 낭비했다. 그는 야브로에게 솜씨를 과시하기 위해 쓸데없는 곡예비행을 시도했고, 시뮬레이터를 통해 배운 기동 방식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저질러 얼마 안 되는 여유분까지 써 버렸다

엔지니어들은 일을 망쳤을 때 고해 성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해결책을 찾아낸다.

"노래 때문에 누가 곤란에 처하진 않을까요?" 그러자 앨런 페이스가 대답했다. "꽃을 가져오면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다시는 지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충격이 가시고 나자 망연한 상실감도 사라졌다. 지미의 말이 옳았다. 상황은 더 나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일행은 필요한 것들을 가졌다. 그들은 스텔라 마리스 호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여기서 장기간 생존할 수 있었다. 단지 목숨을 이어 갈 뿐 아니라, 배움과 사랑으로 충만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산도즈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느껴지는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루나는 채식주의자였고, 처음 인간들이 진공 포장된 쇠고기를 꺼냈을 때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그들이 사용했던 동굴은 출입금지 지역으로 선포되고, 영구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고기 냄새로 거래 상대방이 자나아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루나는 냄새만 맡아요." 그녀는 수파아리가 분명 루나와 다른 존재라고 짐작하며 제안했다. "하지만 왠지 당신이라면 우리처럼 마셔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이 사람은 수파아리라고 합니다. 카하아나 혈통의 셋째 아들로, 지성(地姓)은 바게이주르입니다."

‘첫째라면 전사겠군.’ 수파아리가 짐작했다. 이유는 틀렸지만 맞는 말이었다.

산도즈의 눈물은 지미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멎었다. 하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나는 국제 무역의 증가가 전쟁을 예방할 거라는 주장에 그리 설득되지 않았다. 1913년 영국인 노먼 에인절과 독일인 빌헬름 뵐셰도 정확히 같은 논리로 영구적인 평화를 예측했지만 그 직후 전 유럽에 지옥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정치 경제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 유명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소련과 서구의 냉전이 끝났고, 후쿠야마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믿었다. 소련의 붕괴는 국제 관계의 "자유주의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국가 간 대규모 분쟁의 감소를 예고했다

또한 삶의 모든 요소를 금전화하려 드는 자본주의의 특징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입증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상품화에 대한 도덕적 추론을 떠올렸다. 아이들의 교육을 주식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투자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게 바로 등장인물 중 장클로드 주베르와 소피아가 맺고 있는 관계의 근간이다.
오늘날, 영리 목적의 차터 스쿨과 대학은 아주 흔하고 학자금 대출이 미국의 한 세대가 가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박살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수 교역을 위해서예요. 도시에는 생산 시설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산도즈, 내가 그 도시의 이름을 알아냈다고 말했던가요? 가이저르인지 가이주르인지, 하여튼 그런 이름이에요. 어쨌거나, 각각의 마을은 특화된 교역품을 가지고 있어요." 소피아는 일종의 마을 회의처럼 보이는 토론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에 거기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는 미사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다.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 루나가 불안감과 당혹감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누군가 배와 유리, 그리고 나머지 물건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크가 말했다. "지구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볼리비아의 고원 지대에 간다면 중세로 돌아간 기분이 들 겁니다. 하지만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라파즈에서는 인공위성의 부품을 설계하고 화학 물질을 합성하죠. 이 마을은 그저 보다 발전된 문명의 변방에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는 산업을 발전시킬 필요 자체가 별로 없어요." 앤이 말을 이었다. "거의 항상 햇빛이 있는데…… 전등이 왜 필요하겠어요? 어디나 강줄기가 흐르는데, 도로 포장이나 육상 교통수단이 필요할까요? 식량의 종류도 풍부하고, 그저 기다렸다가 수확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마누자이는 이방인들이 라카트에 떠오르는 가장 작은 태양의 침침하고 붉은빛 아래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자, 산도즈가 말했다.
"누군가는 디가 먹거나 마신 무언가가 그를 아프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음식 때문에 아플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디만 병이 났어." 마누자이가 빈틈없는 논리를 댔다. "그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줘야만 해."

"모든 병의 원인은 하나야." 마누자이가 산도즈에게 말했다. "그의 마음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이지."

라카르 업자들은 어쩔 수 없이 약속한 가격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수파아리 바게이주르는 여기서 얻은 이익으로 최초의 땅을 구입했다.

그는 루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안다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 지식이 이윤을 낳았고, 수파아리가 축적한 부는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루나와 친하다는 점은 멸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가이주르의 존경받는 자나아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소외당했다.

그래서 수파아리의 세상은 경쟁자인 다른 셋째들과, 그가 좋아하기는 하지만 먹잇감에 불과한 루나로 이루어졌다.

상인인 수파아리 바게이주르와 마찬가지로 흘라빈 키서리 역시 셋째로 태어난 아들이었다.
공통점은 그 밖에도 더 있었다. 둘 다 서른 해 전 같은 계절에 태어났다. 셋째로서 그들은 법정 불임이었고, 따라서 합법적으로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레시타의 경우, 셋째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가족의 수치가 아니라 시기를 잘못 타고난 귀족적인 탄생일 뿐이었다. 전통적으로 귀족 가문에서는 아들이 전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손을 많이 낳곤 했다.

과거에는 레시타가 형제의 지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삼각 동맹 체제하에 평화가 지속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셋째 대부분이 그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편안함 속에서 나태해지고 무의미한 쾌락에 무뎌졌다.

"노래 때문에 누가 곤란에 처하진 않을까요?" 그러자 앨런 페이스가 대답했다. "꽃을 가져오면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다시는 지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충격이 가시고 나자 망연한 상실감도 사라졌다. 지미의 말이 옳았다. 상황은 더 나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일행은 필요한 것들을 가졌다. 그들은 스텔라 마리스 호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여기서 장기간 생존할 수 있었다. 단지 목숨을 이어 갈 뿐 아니라, 배움과 사랑으로 충만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산도즈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느껴지는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루나는 채식주의자였고, 처음 인간들이 진공 포장된 쇠고기를 꺼냈을 때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그들이 사용했던 동굴은 출입금지 지역으로 선포되고, 영구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고기 냄새로 거래 상대방이 자나아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루나는 냄새만 맡아요." 그녀는 수파아리가 분명 루나와 다른 존재라고 짐작하며 제안했다. "하지만 왠지 당신이라면 우리처럼 마셔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이 사람은 수파아리라고 합니다. 카하아나 혈통의 셋째 아들로, 지성(地姓)은 바게이주르입니다."

‘첫째라면 전사겠군.’ 수파아리가 짐작했다. 이유는 틀렸지만 맞는 말이었다.

"자나아타나 우리 인간과 비교하면, 루나는 그다지 창의적이거나 사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지. 혹은 독창적이지 않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일단 어떤 단초가 주어지면 그것을 정교하게 만드는 일에는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곤 해."

예를 들어 누군가 어떤 식으로든 정당한 요구를 거절당하거나 좌절하거나 실망하면 그자는 포레이 상태에 빠져. 포레이라는 건 마음이 슬프다는 뜻이고, 그러면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할 수도 있어.

다른 누군가를 포레이로 만든다면,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을 받게 돼.

"루나는 거의 혼자 있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사회적 상호 작용도 목격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문 일이죠.

종종 이견이 발생하죠. 논쟁이 커지면 양 당사자는 ‘피에르노’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피에르노란 시끄러운 소리란 뜻이죠. 피에르노를 만들면 폭풍을 불러온다고 여겨집니다. 사납고 무서운 폭풍을."

‘마음을 조용하게 만들거라, 안 그러면 금방 폭풍이 불어 닥칠 거야.’ 라카트에는 폭풍우가 잦습니다. 아이들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과 궂은 날씨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컨대 루나는 손가락이 열 개인데, 숫자 체계는 6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자나아타의 손가락이 세 개뿐인 걸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죠. 그리고 조지와 지미는 처음부터 카샨에서 볼 수 있는 루나의 문명이 우리를 라카트로 이끈 라디오 신호를 만들어 낸 문명과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표현이 문법적으로는 언제나 볼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표현과 같다는 점도 당신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 같군요. 루나가 자나아타 이야기를 했더라도 당신들은 그것이 무슨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겠죠."

하지만 남성 자나아타와 여성 루나는 전체적인 생김새나 크기가 아주 비슷합니다."

"여성 자나아타들은 격리 상태로 보호받거든. 그래서 루나와 닮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어. 루나의 성별은……." 산도즈가 사람들에게 상기시켰다. "구분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남성들이 훨씬 작죠

성 역할 또한 우리의 예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로비쇼가 그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그림은 아마 성 요셉과 아기 예수로 제목을 바꿔야 할 겁니다."

우리는 드자나다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히 자나아타와 관련 있는 단어였죠.

"마누자이는 아스카마의 양육을 맡았고, 자기 아내보다 덩치가 작았습니다." 산도즈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여성이라고 생각했죠. 차이파스는 언제나 여행을 다녔고 거래를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남성이라고 여긴 겁니다. 루나 역시 우리에 대해 마찬가지 오해를 했고."

"루나는 어떻게 대가를 지불했죠? 마을에 대한 설명만 들어 보면 그다지 물질적인 사람들 같지 않던데요."
"그들은 꽃잎을 수확하고 임금으로 공산품을 얻었지. 향수, 배, 도자기, 리본 같은 것들 말이네. 그리고 이자가 쌓이는 은행 같은 제도도 있었어. 마을이 얻는 수익은 모두 공동 소유였고.

"루나와 수파아리 같은 상인들 사이의 계약 이행을 누가 강제하오?" 지울리아니가 물었다.
"자나아타 정부가 합니다. 둘째로 태어난 아들들에게 세습되는, 거래의 법적인 측면을 감독하는 행정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족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 법원도 있습니다. 판결은 첫째로 태어난 자나아타로 이루어진 군대 경찰이 강제합니다."

생산 활동은 모두 루나가 맡는단 말이군요.

수파아리 바게이주르처럼 셋째로 태어난 상인들은 두 종족 사이를 오가며 거래를 중개하지. 상인들은 루나 마을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서 자나아타 인구를 먹여 살렸소

자나아타들이 명예와 정의를 매우 중시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들은 자신들이 루나의 후견인이자 보호자라고 생각해. 더 열등하고 의존적인 자들을 위해 의무를 다하는 일에서 자부심을 느끼지.

바라카트 인구에서 자나아타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3~4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어. 그들이 폭정을 일삼는다면 루나가 들고일어날 거야."

"하지만 루나는 폭력적이지 않잖아요."

자나아타의 군대 경찰은 무자비해. 그럴 수밖에 없지. 수적으로 절대 불리하니까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머릿수뿐이지

수파아리가 당신 일행이 오기 전에는 자나아타와 루나 사이에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는 걸 기억할 거요."

"수파아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루나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F. 케네디는 미국이 달에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만큼 어려운 일에 도전해서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느끼고 내면의 무언가를 찾을 기회

반면에 요하네스 펠커는 산도즈를 단지 외부적인 통제가 사라지자마자 끔찍한 행위를 저지르고 만 위험한 범죄자로 여겼다. ‘우리는 남들에게서 자기와 닮은 부분을 볼 때 상대방을 두려워하게 되지.’ 에드워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펠커가 비번일 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만약 하느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면, 인제 와서 우리를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설사 산도즈가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앤 외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몇몇 사람에게는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과거의 어떤 시점이 존재했다.

이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이 주어진 운명

그들은 많은 종류를 맛 때문에 제외했다. 대부분의 나뭇잎은 너무 썼고, 과일은 너무 신맛이 강했다. 어떤 과일은 맛이 아주 좋았지만 지미조차도 설사를 했다. 앨런이 한 번 발진을 일으켰고, 마크도 한 차례 구토를 했다. 하지만 조금씩 인체에 무해해 보이는 먹거리의 목록이 늘어났다

다만 그런 음식에서 어떤 유용한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 점을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주로 지구에서 가져온 음식물로 이루어진 식단에서 현지의 먹거리로 구성된 식단으로 천천히 변경해야 했다.

죽음과 마주하면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다.

죽음의 자의성과 그에 대한 무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리에 있던 물린 자국은 어떻소? 그리 크진 않았고 우리 모두 물린 적이 있긴 하지만, 어쩌면……. 앤, 뭔가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소."
"이유를 원해요?" 앤이 야브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는 그녀의 말투에 놀라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상념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이유를 원하냐고요. Deus vult, pater.(신의 뜻이에요, 신부님.) 신이 그가 죽기를 원했어요, 신부님. 됐나요?"

이상주의적일 나이가 아닌가, 열일곱 살이면

"사람들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되는 동기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면 놀랄 걸세. 내 경우에는 가난의 맹세가 속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지."

나폴리 항을 향해 배를 돌려서 또 다른 고깃배에 다가가자 이번에도 시끄러운 이탈리아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했다. 펠리페는 마침내 이들에 대한 뭔가를 알아차렸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어부들 중에 진짜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아니. 아마 없을걸세." 지울리아니가 상냥하게 말했다. "자기들이 어디로 배를 몰아야 하는지는 잘 알지만 고기를 잡지는 않겠지."
이제는 어리둥절해하며 펠리페가 그를 쳐다봤다.
"이 사람들과 모두 아는 사이시죠?"
"맞네. 대부분은 육촌들이지."
펠리페가 눈치를 챈 듯하자, 지울리아니가 씩 웃었다.
"믿을 수 없군요. 마피아라니! 저 사람들은 마피아예요, 그렇죠?"

재미있지 않나. 나의 조부와 에밀리오 산도즈의 조부가 같은 업종에서 일했다니. 산도즈는 우리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 그분도 자기 부류끼리 있을 때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신뢰하지 않거나 불편한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딱딱하게 굴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거든.

마피아는 시칠리아 사람들이지. 나폴리에서는 카모라라고 부르네. 결국에는 같은 뜻이지만

에밀리오 산도즈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사생활과 보호를 제공하는 것 또한 그런 돈이지. 그래서 우리가 나폴리에 있는 걸세, 레예스. 우리 집안이 이 도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소. 그들은 그런 절차를 ‘하스타아칼라’라고 불렀소." 그는 상인이 구매자에게 기다란 천을 보여 주는 것처럼 두 손을 탁자의 거친 표면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들을 응시했다. "고문은 아니었소. 때때로 자나아타들은 친한 친구에게 이런 시술을 한다더군. 수파아리는 우리가 이 상처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보고 놀랐소. 자나아타의 손에는 우리처럼 그렇게 신경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지 않아서 그럴 거요. 그들은 정교한 수작업을 좀처럼 하지 못하니까. 그런 일은 모두 루나가 하지

"심미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것도 같소. 아마 긴 손가락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혹은 우리를 통제하려는 방법일지도 모르고. 우리는 일할 필요가 없었지만 바꿔 말하면 할 수도 없었지. 우리를 돌봐 주는 하인들이 있었소. 그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은 마크 로비쇼와 나뿐이었소. 내 생각에 이런 손은 오히려 명예롭게 여겨지는 대상이었소."

"그런 명예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소. 아마 수파아리겠지. 자기가 쓸모없는 식객을 부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오."
"중국의 귀족 여성들이 전족을 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게 은혜를 베푼 친구를 대하듯 당신 자신의 몸을 대하시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소피아는 남자들이 여자를 쫓아다닐 때보다 일에 몰두할 때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자기들 스스로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여자에 목을 매는 남자는 별로였다.

"좋아, 한번 계산해 보자고." 조지가 화면을 지우고 태블릿에 공식을 적기 시작했다. "초의 제곱당 9.7미터라면, 중력은 1G야. 여정의 절반 동안 가속을 한 다음 암석을 180도 회전시키고 나머지 절반은 감속한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알파 센타우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지구상에서 볼 때는 17년 정도지만,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하는 소행성의 승무원에게는 6개월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난 사람이 착하거나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종교밖에 없다는 생각이 아주 짜증 나. 난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앤이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서 말했다. "희망이나 보상, 처벌이 없어도. 내가 선량하게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 천국으로 꼬드기거나 지옥으로 겁줄 필요는 없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여자가 한순간에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소피아는 창밖으로 통곡의 벽을 볼 수 있었다. 너무 멀어서 기도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관광객과 순례자의 물결이 저마다 벽을 가리키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소원을 적거나 감사의 말이 적힌 작은 종잇조각을 오래된 돌 틈바구니에 끼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깨달았다. 소피아는 과거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았던 것이다.

저는 한동안 갈고리를 달고 지냈다고요! 싱 신부님이 의수를 만들어 준 뒤에도 한동안은 아주 침울해 있었죠." 펠리페가 고백했다. "누가 편지 폭탄을 보냈는지, 그리고 왜 그랬는지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오히려 제게 일어난 일에 감사하게 됐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염무웅.반성완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의 역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싶어서 선택했다.
너무 좋은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예술의 양식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각은 다른 정치적 성향을 지닌다.

1. 기하학적 장식 예술 : 전제주의, 보수주의(농업 사회와 관련)
2. 자연주의적(모방적 표현양식) 예술 : 자유주의, 진보주의

저자는 자연주의적인 예술이 먼저 발생했다고 말한다. 선사시대-구석기시대의 미술을 보면 대상(주로 동물)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렇게 생생한 자연주의적 표현은 이 시기 예술의 목적이 주로 주술(마술)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대상과 정확하게 일치해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 혈거인들은 벽에 사냥감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것을 이미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던 것이다. 이런 마술적인 목적에 의해 예술이 탄생했기에 자연스레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자연주의적 양식을 띠게 된 것이다.

선사시대-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예술 양식은 자연주의에서 기하학적 장식 예술로 변하게 된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농업혁명“이다. 농업을 함으로써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그로 인해 사유재산과 지배-피지배 계층 및 종교가 생겨났다. 계층과 종교가 생긴 전제적인 사회에서 예술은 보통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에 비해, 신석기 시대의 기하학주의는 표현이 강렬하며 자연적인 형상을 고의로 왜곡한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크고 정확하게 그리고, 생략할 부분은 단순화시키는 예술방식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지배계층의 논리를 설파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예술은 이후의 사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집트 벽화에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이 모두 측면을 향해 있고, 몸통은 정면을 향해 있는 몰개성한 그림들.

이집트인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적인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것(자연주의)은 눈속임과 같은 저급한 행위이고, 엄격한 형식에 맞춰 대상을 추상화시키는 것(기하학주의)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인물화에서 모든 인물의 가슴은 정면을 향해 있다. 어떤 자세를 취하더라도 몸만은 정면을 향해 있는 이 원리를 “정면성의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이후로 중세까지 기나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 그림 내에서도 계층에 따라 화풍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에서 상류층은 정면성의 원리를 따른 기하학적 양식으로, 하인들은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엄격한 구분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운문으로, 하인들은 평범한 산문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고상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제주의 사회에서 기하학적 예술 양식이 유행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스 시대>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스 시기의 예술 양식을 “아케이즘”이라고 하는데, 아케이즘 이전의 예술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실용 예술이었다.

이전에는 마술/종교의 수단, 지배 계층의 선전 도구에 불과하던 예술이, 순수한 의미의 예술이 된 것은 기원전 7~6세기의 일이다. 참고로 이때의 그리스(이오니아)에서는 예술뿐만 아니라 순수한 학문(철학, 자연과학), 순수한 스포츠(고대 올림픽) 등 훌륭한 문화가 꽃피는데, 이는 그리스가 해양 상업 국가였기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 무역이 발달했기에 이곳저곳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2. 화폐를 자주 사용했기에 추상적인 사고에 능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기에 이르러 예술은 다시 다소 자연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그리스 시기에는 정면성의 원리가 약해진 이유는 당시 유행했던 철학 사조인 “소피스트”와 관련이 있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계몽의 선구자로서, 교육으로 인간을 계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천적 혈통보다는 후천적 교육을,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했으며 이는 시점이 고정된 정면성의 원리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묘사하면 어느 시점에서든 감상할 수 있고, 개개의 시점은 어느 것이든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그때그때의 시각이 바뀜에 따라 대상 자체도 변한다는 소피스트들의 이론과 맞아떨어지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시대의 예술은 기하학적 양식(정면성의 원리)의 속박을 벗어던지게 된 것이다.

다만 이 시기 예술이 완전히 자연주의적인 것은 아니고, 기하학적 양식과 조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스 시기의 미술의 특징은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미와 선의 융합)”이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우리는 아름답다(미)라고 한다. 도덕적으로 보기 좋은 것을 우리는 착하다(선)고 한다. 그리스 시기의 예술은 자연주의와 양식화(기하학주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는데, “슬픔에 잠긴 아테나”나 “제신의 향연“을 보면 그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겐 석굴암으로 유명한 간다라 미술, 즉 헬레니즘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4세기)이 동쪽으로 영토를 넓힌 결과 인도 북부 근처까지 그리스의 영향력이 닿게 되었다. 원래 인도에서는 불탑으로 부처를 기렸으나, 이 시기 불교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이 조각상을 만들며 점차 불상이 퍼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간다라이며,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는 최초의 국제적인 혼종문화였다.

<로마 시대>
”조각이 그리스 고전 미술을 대표하는 것처럼, 로마 시대 후기와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두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 후기 로마/기독교 미술의 특징이다. 이는 서사시적, 설명적인 예술의욕이며 가히 영화적이라고까지 말할 만하다. 대표적인 것이 “트리야누스의 기둥”인데, 이 기둥에 돋을새김 된 장면들은 마치 필름을 슬라이드로 넘기는 것처럼 연속적인 특징을 갖는다.

<중세>
중세는 흔히 한 시대로 알기 쉬우나, 사실은 세 시대로 구분된다.

1. 봉건제
2. 궁정 기사 시대
3. 도시 시민 계급 시대

각 시대는 쉽게 구분될 정도로 차이점이 뚜렷하지만, 세 시대의 공통점은 바로 “형이상학(종교적) 세계관”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즉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다. 따라서 중세 예술을 알려면 먼저 기독교 예술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1. 상징주의
2. 서사시적/설명적 양식 -> 메시지 전달 중시

개인적으로 중세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이 생긴 그림이 끝도 없이 나와서 재미가 없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위와 같은 특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회화는 보통 상징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문맹이 많던 시기라 성서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자연히 정면성의 법칙(기하학적 양식화)가 부활하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디테일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인물이 있으면, 설령 기둥에 가려진 부분이 있더라도 인물을 기둥 앞으로 그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종교적인 믿음을 떠나) 순전히 예술적인 눈으로는 조야하게 보인다.

초기 기독교 회화는 장인이 아닌 수도사들이 직접 그렸는데, 그래서 실제로 표현력 부분에서도 조야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기독교 예술관에서 예술은 오로지 교리의 주입 수단이었기에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감각보다는 정신이 우위가 되는 시기가 바로 중세였다.

다음으로는 중세의 세 시기를 시대별로 알아보자.

1. 봉건제(9~11세기)
중세 초기인 봉건제는 지방 봉건 영주가 왕만큼, 혹은 왕보다 더 세력이 강해진 시기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간단하다. 오랜 (종교)전쟁으로 인해 왕은 전쟁 자금이 필요하게 되는데, 중앙의 자금이 부족하니 지방의 귀족들에게 땅을 하나둘 떼어주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것이다.

봉건제의 가장 큰 특징은 “화폐도 교역도 없는 자급자족 체제”라는 것이다. 시장이 없고, 따라서 자급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 생산할 필요가 없기에, 경제가 발전할 힘이 부족했다. 도시(수도)는 사라지고 지방이 사람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동의 자유도 없었다. 개인은 없고 공동체 위주의 종교적인 생활을 했다. 기독교적 가치를 소유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이를 변형하는 건 전부 교만으로 치부했다.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하는데, 봉건제는 정말로 하나의 빛만 있는 시기였다.

요컨대 지금의 자본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시기가 바로 봉건제 시기다.

이 시기의 예술 양식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있다. 엄격한 형식화(양식화)와 추상화로써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 수도원은 마치 성처럼 위풍당당했지만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갈수록 더욱 금욕적이고 소박하게 변한다.

2. 궁정 기사 시대(12세기)
중세 중기에는 기사라는 계급이 등장한다. 나중에는 세습신분이 되지만 원래 기사는 직업군인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봉건 영주들의 시종이었다. 봉건 영주들 또한 그들의 조상대에서는 군인이었으나 세습 귀족이 되면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기에, 그들을 대신해서 싸울 사람들을 만든 것이다. 그게 바로 기사였다.

기사들은 공훈을 쌓은 뒤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세습 계급이 된다. 그들의 고용주인 봉건 영주들과 정확히 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기사들은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출신성분이었기에, 귀족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열등감이 심했다. 그래서 그들은 혈통적이고 외면적인 귀족이 아닌, 내면적인 귀족임을 자처하고 정신을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기사도이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아는 젠틀함은 사실 기사들의 열등감에서 시작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뉴비들의 특징인가 보다.

기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문학의 소재로 “연애”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기사 문학에 나타나는 연애관은 <돈키호테>에 잘 드러나 있다. 귀부인에게 자신의 공훈을 돌리고, 영주에게 바치는 충성처럼 귀부인에게 사랑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문학의 소재로서 ”연애”는 이전에는 전혀 없던 것이다. 중세 초기는 성자 이야기뿐이었고,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여자는 그저 전리품으로서 얻어지는 것 정도의 지위였다. 따라서 근대 낭만적 연애관의 근간은 기사 문학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예술 양식은 “고딕” 양식이다. 고딕은 수직적인 선을 건축에 도입함으로써, 웅장한 성당을 만들어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이 시기에는 범신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한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는 자연주의의 정신이 엿보인다. 따라서 고딕은 자연주의와 자유주의로의 회귀가 시작된다. 그러나 중세는 중세였기에 완전한 자연주의는 아니었다.


3. 도시 시민 계급 시대
봉건제 이후 중세의 중심은 지방이었으나 이제 도시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유명한 말처럼, 도시에는 자유가 있었다. 도시에는 화폐와 상거래가 통용되었으며,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번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이들이 바로 도시 시민 계급(부르주아)다.

중세 후기는 바로 이 시민 계급이 예술의 주 수요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귀족과 농민의 중간 계급인 시민이 등장함으로써 문화(예술)의 새로운 수요층이 되었다. 이해타산에 밝고 합리주의적인 시민 계급은 이상주의적인 기사의 자리를 대체했다.

자연히 기사는 몰락했다. 기사 계급의 몰락은 점진적인 것이었으나 꾸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상주의적인 이야기는 시민 계급의 심금을 울려 후에 수많은 기사 소설로 승화된다.

중세 후기에는 예술가가 일하는 장소가 건축 현장과 분리된다. 이전에는 모든 예술은 건축 현장에서 만들어졌다. 조각도 벽화(회화)도 모두 건축물을 장식하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벽화는 패널화로, 조각은 작고 아담한 형태로 바뀌면서 예술은 비로소 건축과 분리된다. 예술가의 외따른 일터가 생긴 것이다. 아틀리에의 탄생이다.

도시화폐적인 생활조건은 자연주의로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속세적인 소재가 쓰이고, 디테일과 원근법을 시도하는 회화가 등장한다.

벽화는 패널화에서 판화로 변화해 민중들에게까지 예술이 닿게 된다.

오랜 터널의 끝자락에서 시대는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