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의 계곡 - 아웃케이스 없음
폴 해기스 감독, 샤를리즈 테론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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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것은 ‘편의’를 위함이었다. 혼자서 하면 도저히 못해낼 일들도 여럿이 모이면 쉽게 해낼 수 있다는 점은 팀을 이루어 경기하는 스포츠를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일이다. 조직이 힘을 발휘하게 되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은 그 조직에 속한 개개인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내가 못하는 일들은 다른 이가 해줄 수 있으며 남이 못하는 일들은 내가 맡아서 처리함으로써 주고받는 관계의 돈독함이 조직의 결속력을 다지게 만든다.




조직,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좋지 않은 점은 조직의 자부심이 지나쳐 폐쇄성을 띠게 될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조직과의 교류도 원만하지 못하고 조직 내의 교류조차 경직성을 띠게 되어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조직을 이끌어야겠기에 가장 쉽게 도입되는 조직경영법의 대표적인 예가 통제다. 통제는 점점 폐쇄적이고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며 이를 통해서 개인의 자아는 집단의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매몰되어 버린다.




그 속에 속한 ‘우리’는 행복할리 없다. 폐쇄와 폭력이 부르는 결과는 점점 희생을 요구하게 되고 희생하는 개체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것이다. 이런 집단과 집단이 서로 의견이 충돌하고 서로의 우위를 겨루게 된 전통이 전쟁이다. 전쟁은 미숙한 집단의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명료한 내부결속법중의 하나이다. 피를 부르고 생명이 사그라지는 지옥의 순간을 맛보는 순간 싸움에 있는 이들은 내가 죽지 않기 위해 팀워크를 발휘해야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결국, 전쟁은 ‘이김’이 아니라 통치자와 그의 주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명령만 내릴 줄 아는 일부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줄 뿐이다.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수많은 생명은 죽게 마련이며 이를 위해 동족을 찌르거나, 베거나, 쏘거나 터뜨려서 죽이는 것을 목도하고 즐길 줄 아는 비인간성을 애국심이라는 그럴듯한 허울아래 감춘다.




전쟁에 참여하여 살인을 경험하게 되는 병사들은 살아 돌아오면 온갖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정작 자신의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와 자아는 공동이 누리는 문화와 성취감 행복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논란이 되던 한 문학교사의 군대비하발언을 난 이렇게 이해한다. 군대라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기관에 모두 ‘억지로’ 2년간 소속되어 누군가를 죽이는 훈련을 받는 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래서 낳는(생산하는) 여성들과 사회적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은 실상 분명하지 못한 적(통일의 대상이라면)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그 목적은 결국 언젠가 있게 될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아닌가. 일부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벌인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군에서 얻는 혜택도 있을 수 있다. 수직화된 기업, 학교, 기관에서의 직장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예비훈련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고, 명령에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이 편안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근본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엘라의 계곡은 이라크에 참전한 아들이 실종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사관으로 전역한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군대에 입대시켰다. 큰아들을 전투에서 잃고 둘째아들마저 참전이후 복귀해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난감해한다. 군 시절 수사기관에 근무하던 실력을 바탕으로 아들의 행방을 추적하지만 어느 날 부대 주변에서 발견된 토막 나 불에 탄 주검이 아들의 것으로 발견되면서 충격에 빠진다. 찾는 것이 아니라 누가 죽였는가를 수사하는 아버지와 경찰 형사과의 말단 수사관은 결국 전쟁에 함께한 동료들이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마약과 관련한 갱이나 싸이코패스가 벌인 살인사건을 추정하는 관람객은 ‘전우’의 배신이라는 반전에 배신감을 금치 못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영화는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흐린 핸드폰 동영상과 아들이 찍어 보낸 이메일의 사진만으로 전쟁을 묘사한다. 영화 막바지에 이를수록 동영상의 내용은 복구되어 흐릿하지만 명료한 내용으로 다가오고 불확실한 사진 속 풍경의 정체도 드러난다. 이유 없는 전쟁에 투입된 젊은이들은 내가 나라를 지킨다는 명제아래 노인, 여자, 아이 등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살육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런 비인간적이고 극대화된 폭력의 경험은 결국 ‘정신병’을 앓게 만들며 내가 죽이지 않으면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한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분열하는 부대원들의 자아는 무시한 채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군 당국의 모습은 집단이익을 표방해 개인을 희생하는 데에 아무렇지도 않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놀랄 만큼 차분하고 내면의 변화까지 잘 표현한 토미리존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고, 그의 아내로 분한 수잔서랜든이 자식을 잃은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통화 장면과 토막 난 자식의 주검을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을 통해 바라보고 망연자실해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자식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동감하게 만드는 신(scene)을 가진 <엘라의 계곡>은 영화가 얼마나 큰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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