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현대의 지성 118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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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쓰는 역사 이야기.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슬퍼할 것 없어. 역사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인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로 삼는다고 생각하면 되지. 현실이 꼭 그렇게 보기좋게 나아가지만은 않지만 비틀대면서도 걸을 수 있는 것이 삶이라면 공동체의 그것이 곧 역사 아니겠니.




가장 아픈 기억을 떠올리자면 막 20세기를 열던 때지.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굴욕의 역사는 한 세기가 흐르고 두세대가 교체된 지금도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에게 적지 않은 견제심을 갖게 한단다. 올림픽, 월드컵 자국의 선수들이 활동하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자부심을 들먹이는 국민들을 보면 그냥 생긴 의식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거의 영향이다 라는 생각이야.




당시 한국은 러·일·미·독·영 등의 열강에게 휘둘려서 주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시기였어(지금도 그리 다르진 않아. 미국에게 전시작전권을 좀더 가지고 있으라고 국군 통수권자가 미국대통령에게 아양을 떨고 있잖아) 결국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일본이었지. 일본은 한국을 합방함으로써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다리’를 확보하게 된 거지. 일본군이 중국에 들락거리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지고 막 왕조에서 개혁을 꾀하는 세력달의 주도권다툼으로 외세에 제대로 대항하기는커녕 어떤 나라를 잡을까 눈치보는 위인들이 넘쳐났지.




그중에서 돋보이는 삶들이 있게 마련이야. 그런 사람들을 위인이라고 하지. 하지만 그 속은 알 수 없어. 역사는 역사를 쓰는 사람마다 틀린 시각을 가지거든 그래서 한권의 책을 읽고 그안에 푹 빠질 필요는 없어. 여럿의 관점을 잘 관찰하고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나의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사설이 길었네. 사실 루쉰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배경을 설명하고 있었어. 교과서에 한번씩 등장하지 ‘아Q정전’이라는 소설로 유명하지. 그 외 몇 유명한 소설과 시, 그림들이 전해지고 있고 그가 쓴 글을 통해서 당시의 중국을 개혁하는 사상을 전파한 이로 기억되고 있어.




당시 중국 국내사정을 잠깐 언급해볼까.




19세기 말에는 한반도도 마찬가지였지만 봉건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중국에서도 일고 있었어. 일종의 국가개혁운동으로서 ‘양무운동’이 그것이었지. 어느정도 성과가 있을만 할대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계에 다르지. 역시 봉건적 청나라가 가진 한계라고 생각한 세력들이 “변법자강운동”을 벌여. 캉유웨이, 량치차오등이 광서제와 손잡고 한 개혁은 서태후에게 막히고 결국 이것도 100일 만에 막을 내리지.




그래도 과거제폐지와 대학설립 등은 신해혁명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하지. 당시 전통 청군대는 약화되고 있고 이홍장의 신식군대가 커나가는데 ‘북양군’이라고 해. 그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가 강화하고 각 지방 군사학교 세워 장교도 양성하는 등 힘을 쓰지. 위안스카이는 기억해두는 것이 좋아.




1900년을 갓 넘기는 시기였어. 해외유학생 중심으로 화홍회라는 조직이 생겨나고 상해 차이위안페이, 장빙린등이 광복회를 결성하는 등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지. 결국 1905년에 단체들을 통합해 ‘중국동맹회’가 성립해. 유명한 쑨원 알지? 그양반께서 대표를 맏게 되는데 4대강령이 뭔지 알아?




“만주족 축출, 중화회복, 공화국창립, 토지 소유의균등”




짜잔, 급진적이지. 왜냐구. 모든 사람이 똑같이 토지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생각해봐. 지금 어디서 가능하겠어. 만주족 축출이야 당시 청나라가 만주족이 집권한것이니까 축출한다는 것이고 중화는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위한 허울이지. 화이사상에서 나온것인데 오랑캐가 정권을 잡을때에도 중화회복을 내건다니까. (애초에 한족이 약하고 오랑캐인 오호족이 세상을 호령하던 때에 나온 말이니까)




아들, 공화국이 뭐야? 모른다고. 우리 헌법에도 나온 말인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는 알고 공화국은 모르지. 공화국은 공화제를 채택한 나라야. 공화제(共和制)는 공화주의의 정치 체제를 가리키며, 형식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국가주권이 그 구성원에게 있는 정치 체제야. 기본적으로 입헌제이고, 이에 따라 법을 기반으로 구성원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차별 없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사회로 운영되는 정치 체제지.




어찌보면 민주와 서로 중첩되는 의미가 있지. 애초에 등장은 군주제에 반대해서 나온 것이야.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공산체제 등이 모두 공화국이 될 수 있다구. 우리가 북한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 하쟎아.




참, 그래서 이러한 시기에 1911년 무창이라는 곳에서 우연히 충돌이 발단이 되어 혁명이 일어났어. 신군병사들이 주축이되어 순식간에 남부일대를 점령했지. 중심축이 없는 무조건적인 봉건반대가 이유였기 때문에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운 실정이었지. 청나라 입장에서는 진압군이 필요했어. 망해가는 청군대로는 힘들었지. 위안스카이. 그가 등장해. 전권을 등에 업고 혁명군을 무력진압하지. 타격을 심하게 입은 혁명군입장에서는 협상을 제안하게돼.




쑨원이 총통직을 양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협상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가 궁을 떠나게 되고 2,132년에 이르는 중국 황제의 역사는 점을 찍게 되지.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게 되는 과정. 이것을 신해혁명이라고 해.




자, 다시 루쉰을 떠올려봐.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는 루쉰은 신해혁명에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외세가 워낙 강하고 국가기반을 다지기에 충분한 숙성기를 거치치 못한 어설픈 국가로서의 중화민국은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고 외국세력에 휘둘리고 국민들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핍박받고 이유없는 죽음을 맞기도 하는 시기야. 지식인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겠어 (요즘 같은 시대에도 답답함을 느끼는데 말이지) 그것을 글로 푸는 거지. 소설, 잡문, 시 등으로 말이지.




전쟁의 포화가 한창이던 때에 그가 남긴 글은 독특해. 요즘이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을 써서 웬만큼 특이한 표현력이 아니면 주목받기 힘들지만 당시에 그의 글들은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는 이들에게 불을 당겼다고 할까.




여러분은 실제로 전투하는 사람이며, 혁명의 전사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문하게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학을 배워도 전쟁에는 슬모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군가 하나쯤 지을 정도이고, 잘하면 전투하는 짬짬이 휴식할 경우 등에 즐거움은 되겠지요. 더 격식을 차린 비유를 든다면 마치 버드나무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성장하여 짙은 그림자가 햇빛을 가로막게 되면 농부가 점심때 나무 아래 앉아서 도시락을 먹거나, 숨을 돌리는 것쯤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중국의 오늘날의 사회 정세는 실제의 혁명 전쟁이 있을 뿐입니다. 한 수의 시는 쑨촨팡을 위협할 수 없지만, 한 발의 포탄은 쑨촨팡을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로 문학이 혁명에 대하여 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역시 문학은 일종의 여유의 산물이고, 한민족의 문화를 나타낸다는 것이 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글의 느낌이 어때? 당시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어봐. 패망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허망함이 느껴질 정도지.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우는 이들이 없다면 혁명을 이루는 일조차 불가능하겠지만 이를 위해 지식인들의 후방 지원(일제시대때의 이광수처럼,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비교해보자면 재미있을 듯 하구나)의 역할을 결코 작게 보아서는 안돼. 총과 칼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펜’도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라구. 그러므로 위의 글은 다소 현실에 대한 ‘조롱’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긴, 저런 글조차 쓰기 힘든 상황이 오고야 말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져 버리는 것이지.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자유와 인권의 가치가 성숙된 나라에서나 보장이 가능한 것 아니겠니. 오늘날이라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야 억압된 상황속에서 용기있는 행동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어.




제작년의 오늘, 나는 여관에 숨었지만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작년의 오늘, 나는 포성 속에서 영국 조계로 피신했지만 그들을 이미 어딘지도 모를 지하에 묻혀 있다. 금년 오늘, 나는 비로소 나의 집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고요하다. 내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좋은 친구를 잃었다는 것, 중국이 좋은 청년을 잃었다는 것을 통감하고 비분 속으로 침잠했지만, 뜻밖에도 여러 해 쌓인 버릇이 다시금 침잠의 밑바닥에서 머리를 쳐들고 이상의 글을 엮게 한 것이다.

써나가고 싶어도 현재의 중국에는 역시 쓸 장소가 없는 것이다. 젊은 시절 향자기의 <사구부>를 읽고 쓸쓸한데다 몇 줄에 불과한 부를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끝을 맺는 것은 왜 그럴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젊은이가 늙은이를 위해 기념을 적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 30년동안 내가 목격한 것은 청년의 피뿐이었다. 그 층층이 쌓인 피가 나를 묻어,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필담을 사용하여 몇 구절의 문장을 엮음으로써 간신히 진흙 속에 작은 구멍을 뚫어 거기서 간간이 헐떡일 뿐이다. 이것은 어떠한 세계일까. 밤은 길고, 길 또한 멀다. 나는 다 잊고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간 꼭 그들을 행각해내고, 다시금 그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망각을 위한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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