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삶에 회의를 가졌다. 그 회의의 빌미는 군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당한 폭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불합리와 버물어진 폭력에 치를 떨었다. 도대체 군대가 왜 필요한 것인지 묻고 또 물었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물음을 몸속에 넣어 삭히고 제대하여 학교에 복학하자 오히려 구속 없는 자유가 불편해졌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국가부도를 맞았다. 졸업이 다가오는 학교의 풍경은 더 이상 여유 넘치는 학생들의 표정을 찾기 힘들었다.


과거 원서를 받아서 하늘로 뿌려 손위에 떨어지는 것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고대의 마늘만 먹은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정도나 현실감이 떨어졌다. 이미 졸업한 선배들이 학교를 서성거렸다.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굳어진 표정위로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것 정도는 그래도 나았다.


구조조정, 대량해고, 넘치는 실업자, 거리에 초점 없이 서성대는 양복 입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나는 양복대신 청바지를 입고 학교 도서관에 출퇴근했다. 어디든 입사하기 위해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고 4년의 도제과정을 거친 건축전공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대학입학때와 마찬가지로 취업 때도 영어시험성적이 도왔다. 벤처기업의 영국회사와의 교류창구역할을 하다가 1년 즈음 회사와 정들고 일도 마음에 들 때가 되었을 때 각 부서별 몇 명씩 강제로 해고되었다.


영국과 손을 떼고 일본과 손을 잡아가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해고 일 순위를 차지했고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회사를 나와서 그와 전혀 다른 업무의 이름만 비슷한 다른 회사로 입사했다. 8개월. 그리고 나왔다. 도대체 내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스러웠다. 내 일은 할 수 없고 주체적으로 일하기는 불가능했다. 시키는 데로 하고 그것도 불규칙하고, 불합리로 가득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른 뒤 나는 시골로 떠났다. 그 삼년간 텔레마케팅, 보험, 아이티 관련 영업의 회사에서 길게는 6개월 짧게는 3개월을 근무하면서 ‘돈’을 벌려고 했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악착같아야 한다. 그 악착같음이 없이 느긋하기만 한 성격의 나는 남들이 이야기하는 ‘성공’하는 타입의 인간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돈을 벌어서 시골생활을 하고 싶었던 나는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서와 인문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확신을 얻었다. 내 삶은 주변에 의해 흔들리는 것이 아니며 내가 마음먹은 대로 두려움 없이 나아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5년이 되었다. 살아남았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도시에서 맛보지 못한 행복을 맛보고 있다. 도시에서 불안하고 경계하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에 매우 만족하면서.


   
  여기기생충을 연구한 덕분에 교수 행세도 하며 꽤 오래 재미있게 일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고. 졸업 즈음에 내게 다가와준 기생충들이 고마워 죽겠다고. 회충, 편충, 십이지장충들아, 이게 다 너희들 덕분이다.―서민 기생충학 교수


나는 요즘도 시간만 나면 TV채널을 돌리고 만화책을 일고 영화를 본다. 누가 뭐라 하면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지금 내 전공분야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중이오.”―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에 인용문을 입력하세요
 
   

<그 삶이 내게 왔다>는 각계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어 살고 있는 이들이 후배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이다. 자신과 같은 일을 하겠다는 이들에게는 자신감을, 그렇지 않고 미지의 분야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글들을 모았다.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부족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분명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