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민속기행 2 - 사라져가는 옛 삶의 기록, 최상일 PD의 신간민속 답사기
최상일 지음 / MBC C&I(MBC프로덕션)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옛날 이야기 해줄까?

할아버지가 손주를 무릎에 앉혀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에는 이 마을 뒷산에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단다. 소나무는 워낙 굵어서 벨 수조차 없었지. 그런데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다 베어 갔단다. 그 나무 그루터기엔 열 명이 올라앉아서 밥을 먹을 정도였으니 믿어지니? (경북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윤어르신 이야기 편집)


오늘날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이런 이야기 대신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의 판타지를 접하거나, 각종 동물캐릭터가 의인화된 현대적인 문물과 관습을 공부하게 되는 이야기뿐이다. 과연 우리가 가진 옛이야기의 문화는 효율과 경제성을 가장 앞세우는 오늘날 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나 바쁘고 급속도로 ‘돈’을 버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감히 다른 곳에 특히나 오늘날 천대받는 농업중심의 문화와 관습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냥 이렇게 유형무형의 민속 문화는 개발과 개량, 혁신 등의 논리 앞에 사라지는 것을 눈감아도 되는 것인가.

다행히도, 누군가는 묵묵히 우리의 과거와 민속 문화, 그리고 그들의 소리를 담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시골촌부의 새는 발음의 소리로 가락을 타는 ‘소리’가 구수하고 정겨운 이유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역할을 최대한 충실히 하는 가락과 가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충실히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역할대부분을 대신하고, 최첨단의 과학기술이 인간문명의 대부분을 개선한다고 해도 우리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우리 농촌에서 나온다. 굳이 신토불이가 아니라도 가까운 곳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은 굳어진지 오래다. 다만 경쟁과 개발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국가정책이 국내농업인들의 살길을 막막하게 만드는 무역협상을 통해 농촌을 죽이고 있고 결국 ‘우리의 먹는 것’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는 것을 다른 농업개방국가들의 예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곶감은 입동 20일 전쯤에 깎아서 볕 좋고 바램 잘 통하는 처마 밑에서 한 달 이상을 말려야 한다. 곶감 깎는 시기도 문제지만, 햇볕도 잘 안 들어오고 바람도 안 통하는 도시주택의 구조가 문제다. 그렇다고 곶감을 밖에 내다 걸면 더러운 먼지가 앉아서 먹을 수가 없다. 이래저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농촌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사먹는 수밖에 없다.―274p


곶감은 먹을 것이 없는 겨울을 나기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특별한 과일이 없던 때에 감을 깎아 말리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맛도 더 좋아진다는 것을 아는 농민의 지혜다.


농사를 지어봐야 빚만 늘어나는 사정은 대한민국의 농촌이라면 거의 예외가 없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농민들을 거의 국민으로 여기지 않기는 어느 정부가 들어서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마당에 백두대간 자락에 사는 주민들은 또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다. 292p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의 농정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무시와 천대, 그리고 억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정책 덕분에 농촌은 이제 늙어서 죽을 날만 받아 놓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한간에 유행하는 ‘귀농’이 아니라면 더 이상 우리 농촌을 지킬 사람조차 없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산간 오지에도 도로와 위락시설, 골프장 등이 들어서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꼴을 베고 소죽을 끓여서 먹이는 고집스러운 영감님과 늙어서 걷기도 힘든 소가 주연한 영화 <워낭소리>를 보면 소를 생각하는 노인이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 까지 약을 뿌리지 않고 농사를 짓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살림’을 위한 농업은 소뿐 아니라 인간과 작물과 더불어사는 모든 생명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나뭇가지와 풀을 모아서 퇴비를 만들어서 농사에 이용했던 옛이야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런 식으로 짓는 농사가 바로 우리가 요즘 말하는 유기농이다. 풀 한포기, 배설물 한 덩어리도 버리지 않고 순환시키는 지속가능한 농법이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현대식 농법은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318p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사는 이제 ‘힘들어서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관행을 거스르는 고집이 없으면 불가능한 ‘유기농’이다. 사람의 힘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일을 조금이라도 신명나게 하기 위한 소리는 오늘날 찾기 힘든 진귀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려! 너무 내려오지 말고 나가 이려!

에후~어 설설 다려 이려 이 소!

오냐 에 이러 이러 내려서 오오 어디 올러서게

어에 슬슬 나가자 이러 슬슬 나가자

어이 오 어디 돌아서 나가자 어러러

오르내리지 말고 바루 나가세 이라!

-강원 양양 법수치 마을 밭갈이 소리 390p


직접 듣지 않아서 그 가락의 흥겨움을 실감하지는 못하겠지만 끊어진 음절과 반복되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일할 때 힘내게 하는(밭가는 소를 다독이며) 흥겨운 장단을 느낄 수 있다. 다큐에서나 봄직한 일이 되어버린 일하는 소리. 늙고 병들어가는 우리 촌에서 그 소리를 되살리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오롯이 기억하는 것만이 지금 우리에게 남은 최선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행여나 농촌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농사짓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옛날의 그 소리를 배워서 고되고 힘든 노동을 즐기는데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와 우리 서민의 삶이 담긴 문화를 아는 것은 온전한 우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다. 왕가의 역사나 정치가와 기득권층의 역사를 빠삭하게 꿰고 있으면서 우리 서민들의 과거의 삶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깊은 과거가 되어버릴 오늘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일이다.

변하는 것. 발전하는 것. 개발하는 것이 서글픈 이유는 무엇인가. 온전함, 지속가능함, 건강함과 대치되고 있는 지금의 사회는 병들어가고 있다. 내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목표는 치유다. 치유를 위한 방법으로 우리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손쉽고도 빠르게 삶의 상식이 어떤 사상과 행동인지를 알려준다.


혹시 이 책을 읽고 백두대간 산촌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책의 내용과 많이 달라진 산촌의 모습에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기를 바란다. 봄가을로 성대하게 치르던 전북 장수군의 장안산 산신제도 없어져버렸고, 훈훈한 인심의 무주구천동 향미식당도 없어졌다. 삼도봉 골짜기의 하나 남았던 억새집은 이제 집터조차 찾기 힘들다. 무형의 문화를 대하는 안목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대책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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