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오랜만에 서울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부모님은 광주에 계시고 장모님은 서울에 계셔서 광주와 서울을 오가게 된다. 서울에 가면 가족이 몸이 좋지 않아져서 오래 머무는 일은 없다. 시간을 쪼개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거우나 요즘은 다들 일과 갓 낳은 아기를 보느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멀리서 걸어오는 친구는 멋진 양복에 넥타이가 어울렸고 머리를 정성껏 매만져서 다듬어진 조각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모 투자증권사에 다니고 있다. 은행을 거쳐서 평균1.5년에 한 번씩 회사를 옮기며 경력을 관리(?)하고 그때 마다 조금씩 이력이 더해져서 직장생활 10년차, 차장이라는 직함과 그에 걸맞은 연봉을 받고 있다. 직장경력이 비슷한 그의 아내도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다. 여자아이 하나를 두고 있고 그의 부모님과 근방에 살고 있어서 오전에 유아원에 데려다주면 할머니가 데리고 왔다가 퇴근 무렵에 집으로 데리고 온다고 했다.
강남의 4호선 전철역 근방의 32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2대의 자가용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파트 융자금을 갚고 있으며 분기별 휴가로 가족이 해외여행을 즐기는 여유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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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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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답대신 웃음으로 때우자 인상을 쓰며 오늘 자신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반가움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무얼 먹을지 서로에게 한참을 미루다가 근처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증권관련 상담업무를 1년 정도하고 있는데 업무 스트레스가 많고 남의 돈을 관리해준다는 것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지겹다’라는 말과 함께 어떻게 이런 업종에서 10년을 넘게 회사생활 할 수 있는지 그런 선배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익숙함’이 가져오는 기계적인 행동과 말이 아마도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니겠냐며 덧붙였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재미있냐고. 뭐가 재미있냐는 말인가. 사는 게? 재미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활력이 넘치고 샘솟는 지적 육체적 에너지가 쓰이는 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하루.
그냥 그렇지. 너는 어때 라고 되물으려다가 문득 떠올린 그의 ‘지겹다’를 떠올리고 입을 여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나는 가끔 그가 부럽다. 또래에게 인정받는 위치에서 그의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내 놓을 만한 직장생활과 가끔의 여행의 여유를 실현하며 사는 그를 그의 블로그를 통해서 드러난 이미지와 글들을 보면서 내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살길 바라는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뭐냐 그럼.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정치인들을 화제로 올리다가 자식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역시나 모든 도시인들이 시골에서 사는 젊은 가족에게 묻고 싶어 할 만한 질문이 이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한 달에 얼마나 벌어?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들어? 등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모르는 사람이 물었다면 퉁이라도 줄만한 말이지만 친구에게는 별로 숨기거나 자존심상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질문은 좀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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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교육은 어떻게 하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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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다닐 생각은 없냐는 질문에 직장을 다니려면 서울에서 계속 살 일 이었다는 대답을 했고, 이어지는 나의 시골 살이 철학을 듣고 난 이후에야 이어진 질문. 사실 이런 질문엔 자신이 있었다. 많이 듣기도 했고 많이 생각해본 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전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시골 살이는 힘든가. 그렇지 않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적 없다. 큰 병 없이 그냥 튼튼하게 잘 자라주는 아이에게 항상 고마울 뿐이었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남들이 걱정하는 만큼 어둡지 않다. 마치 맞닿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인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자식을 제대로 뒷바라지 하지 못하는 부모만큼 무능력한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기본적인 소양과 지적능력향상을 위한 정보제공을 위한 교육에는 틀림없이 ‘비용’이 들 텐데 이렇게 벌어서야 어디 그런 돈을 들일 수 있겠냐는 말이다. 노래방도우미를 해서 자식학원비를 버는 엄마와 자식 학원비를 줄여서 술 마시고 노래방 도우미를 부르는 아빠의 이미지가 겹쳐서 머릿속을 어지럽게 뛰어다닌다.
현재 자신의 행복에 가치를 둔 삶이 시골을 선택하게 하였고 이를 동의한 처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 건 부부의 합의된 교육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세 살이 된 아이는 매일 방안을 구르고 뛰어다니가다(이런 버릇의 아들이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할머니댁에 가면 갑자기 뛰지 말라는 부모 때문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성이 안차면 밖으로 나가 개와 뛰어다니고 풀을 뽑아서 맛을 보거나 벌레를 잡아서 관찰하는 놀이가 일상화 되어 있다. 아이는 도시아이들이 모르고 자랄 흙을 딛고 사는 인간과 나무와 짐승들을 체험하는 생명교육의 현장에 있고 우리 산과 푸른 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을 먹고 자라게 해주는 식물의 중요성과 품종개량과 집약재배를 통해 효율을 높여 살림의 기본이 되는 농업의 의미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몸을 움직여 집고, 파고, 들고, 업고 할 수 있게 될 나이면 땀 흘리며 일을 하여 예부터 내려온 원조 ‘생산’의 의미(무형의 가치를 속여 파는 가짜 생산이 아니다)를 깨닫게 된다.
학원을 통해서 의자위에서 칠판을 바라보며 얻는 지식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창조적 사고를 통하는 놀이를 통해서 꿈을 꾸게 될 것이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교육은 그것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 인고의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결과물들을 쌓는 성취가 되었든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든 자신이 선택한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제도권교육이 죽었다고 하면서 자식을 그 속에서 방치하는 것은 '아동학대'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선택권을 가진 어린 시기엔 아이에게 원하지 않는 틀에 속하게 놔두는 것도 죄가 된다는 생각이다. 연일 오르는 대학등록금을 생각하면 대학을 나오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물론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할 때는 입시학원이 되어버린 중고등학교 과정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과거의 나는 꿈이 없었다. 오로지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소년기의 목표였다면 대학의 전공을 통해서 취업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대학시절의 인생목표였다. 졸업 즈음의 아이엠에프경제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어느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으며 마감에 쫒기고 상시야근에 피곤에 절어 주변사람들을 매일 원망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꿈을 꾸고 싶었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는 어려서부터 그런 기회를 주게 된 것을 축복이라 생각한다. 좋은 대학 나와서 ‘사’자가 들어간 직업군에 들어가는 것이나 세계적인 대기업에 입사해서 경쟁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는 될 수 없다.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수많은 가치 있는 일들이 있으며 그 가치를 스스로 깨닫기 위한 일이 ‘공부’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돈 많이 버는 것을 위한 일이라는 비상식의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다. 학교와 집, 학원을 오가며 다른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세계를 넓게 보지 못하는 내 삶을 자식에게 까지 물려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겁하게도 도시에서 바로 옆집과 친구들과 회사동료들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난 피난처를 택했다. 그곳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행하는 일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한 달 100만원을 못 벌어도 내 몸을 놀리면 굶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의미에서 나온 말이지만 “쫀쫀하게 살지 마라. 굶어 죽지 않는다.”를 인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