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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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 작품은 <백야행>.  TV드라마에 국내에선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뼛속까지 우울해지는 스산함에 몸서리를 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용의자X의 헌신>는 강도면에선 덜 부담스럽다. <백야행>처럼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전개속에 인간이란 존재를 발가벗겨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 웅크린 모습의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그의 웅크림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맨얼굴을 엿보게 되는 독자들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의 책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항상 청결하고, 남에게 폐끼치기 싫어하고, 단정한 일본사회와 일본인들이 실제로 얼마나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도 느껴진다. 좋아하는 이웃집 이혼녀 야스코가 일하는 도시락가게를 드나들면서 좋아한다는 감정이 드러날까 조바심치는, 그래서 항상 자로 재듯, 정밀한 계산하에 의해 감정선을 넘지 않고, 가둬버리는 이시가미의 모습도 그렇다.  

 그런 행태가 꼭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정돈된 질서와 체계속에서 전체를 위해 조금씩 침식당해가는, 그러다 한순간에 놀랄 정도의 에너지로 폭발해 버리는 일본사회와 일본인의 모습은 어딘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엽기적인 살인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이런 것과 상관없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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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1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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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 고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집에 굴러다니고 있는 이 책을 집어들고는 이틀만에 독파했다. 1,2권 합해 700페이지 가량되니까 꽤나 장편인데 소설 줄거리 자체도 흥미진진하지만 쥘베른의 박물학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 이책에 언급된 바다생물의 종류가 족히 1000종은 될텐데, 이 생물들의 분류는 물론, 과거 역사적 에피소드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데 입을 딱 벌릴 수 밖에 없다.  

책을 읽다보면 제주도 앞바다에 잠수정을 타고 바다속을 들여다보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대왕오징어, 향유고래, 크라켄 등 바다괴물들과 싸우는 장면도 생생하다. 바다해양에 대한 지식은 물론, 노틸러스호를 타고 전세계 2만 해리를 돌면서 마주치는 각 지역의 식생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돼 있다. 소설이 아니라 박물지 같은 느낌이 든다.  

 19세기 유럽은 세계로 팽창하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이국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대중적 호기심이 상상이상이었던 것 같다. 자연과학, 지질학, 생물학 등을 아우르는  쥘 베른의 저작이 인기를 끌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덧붙여 이 책을 번역한 역자에 박수를 보낸다. 그 천여종이 넘었을 다양한 생물들을 일일이 번역해내기 쉽지 않은 작업일텐데, 200개에 가까운 역주로 책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과 지리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읽는 내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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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국 경제위기 진단 이동걸 금융연구원장

세계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로 국내 경제가 난관에 봉착했다. 내년 세계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국내 경제성장률도 2%대로 낮아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감세와 부동산 경기부양 등 '대증요법식 처방'에만 매달리며 시장과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있어 우리 경제가 어디까지 추락할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동걸 금융연구원장은 지난 17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국내 경제는 유동성에 어려움이 있었을 뿐 진짜 위기는 시작되지 않았다"며 "내년에 가계와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금융기관의 부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면 진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원장은 정부가 부실 기업에 대한 '옥석가리기'는 외면한 채 자금 공급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 "마치 동맥경화 환자에게 수혈하는 격으로 자칫 혈관이 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와 여당이 금융규제 완화 법안의 강행처리에 나서고 있는 데 대해서는 "규제완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강등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인터뷰 도중 '어떨 땐 미네르바였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 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다" "경제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가 많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올해 우리 경제가 휘청거렸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부실 사태가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환위기 이후 건전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보고, 안이하게 대응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재무 건전성은 좋아졌지만 양극화로 경제전반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은 나빠졌습니다. 경제위기를 맞아 정부의 지원이 주로 대기업에 몰리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경제 전체가 위기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일각에선 정부의 경제정책이 일본이 장기불황을 겪을 때와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기업에 대한 '옥석가리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자금지원만 하면 경제회복이 더뎌지게 됩니다. 경쟁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장기불황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죠. 일본은 그래도 제조업이 강해 빈사상태로도 10년을 버텼지만 우리 중소기업들은 경쟁력이 없으니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부동산 경기부양에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가 재정을 적극적으로 풀어야 하겠지만 건설업에 집중적으로 자금지원을 해서는 안됩니다. 국내 건설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국보다 2%포인트 이상 높습니다. 부동산 경기부양을 통해 다시 거품을 키우는 악순환으로 빠져드는 것보다는 다른 경제부문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합니다. 지금 정부의 정책을 보면 한가하고 여유로워 보입니다. 정부는 시장의 비판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지만 시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장 불만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시장이 뭘 모른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금융시장 상황은 일시적으로 호전된 느낌입니다.
"경제위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금융시장이 다소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니 위기상황에서 벗어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물경제가 침체되면 진짜 금융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정부는 구조조정 대신 대기업과 건설업에 자금 지원을 집중하면서 대증요법식 처방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유동성 부족 사태는 다소 진정됐지만 신용경색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빈혈상태는 벗어났지만 동맥경화를 겪고 있는 셈이지요. 빈혈 때는 수혈을 하면 되지만 동맥경화에 걸렸을 때 수혈을 하면 혈압이 올라가 터질 수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돈을 풀면 효험도 없고, 부작용만 나게 됩니다. 헬기로 돈을 마구 뿌려대면 알아서 필요한 곳으로 돈이 흘러가겠지 하는 발상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와는 경제위기의 진행 양상이 달라 정부가 구조조정에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은 무너지는 게 눈에 보였고, 구조조정 대상도 명확했습니다. 지금은 무수한 중소기업들이 넘어지고 있지만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어렵다고 해서 정부가 자금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한다는 인상은 주지 말아야 합니다. 경기부양책도 신중하게 추진해야 하고, 금융기관이 옥석을 가릴 수 있게 인센티브를 줄 필요도 있습니다. 감세 여력이 있다면 그 돈으로 신용보증기금을 10조원가량 늘리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100% 보증해주지 말고, 90%가량만 보증하도록 해 은행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단행될 때는 산업은행이 시중은행을 이끌었는데 최근에는 정부가 산업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노하우를 가진 산업은행이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은행의 자산건전성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포워드 룩킹(Forward Looking)' 같은 제도의 도입이 필요합니다. 기업 대출자산에 대한 평가를 기업의 미래가치를 반영해 판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은행들이 장래성 있는 기업에 대한 대출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이 금융규제 법안의 강행처리에 나서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큰 교훈은 위험관리를 과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험을 관리할 수 있으니 사전적으로 규제를 다 풀고 사후에 규제하면 된다고 생각하다 선진국 금융이 무너진 것입니다. 정부가 자본시장통합법 제정과 보험업법 개정으로 증권사와 보험사에 지급결제를 허용해주고, 금산분리 완화로 대기업의 은행 소유를 허용하면서 사후규제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정말로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정부가 금융규제 완화를 강행한다면 5~10년 뒤 또 한 차례 금융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이 이런 법안들을 '개혁입법'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금융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금융규제 완화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가 신용등급이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정부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선수들이 없습니다. 목표를 정하면 아이디어가 나오게 마련인데 정부는 의견수렴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금융조직 개편도 실패작입니다. 국내 금융정책은 기획재정부로 옮기고,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합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정부는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관성 있게 대책을 내놔야 시장이 따라 가는데 지금 상태로는 안됩니다. 내년에 경기침체가 본격화되고 가계와 중소기업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사태는 달라집니다. 금융기관 부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신용위험이 커지면서 대외신인도가 하락하면 진짜 외환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는 금융위기에 따른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한국시장을 빠져 나갔다면 내년에는 한국경제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에 탈출할 가능성이 커 전혀 차원이 다른 경제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정부가 내년 성장률 목표치를 3%로 잡았습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정부가 무리하게 성장률 목표치를 잡으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정부가 위기를 위기라고 확실하게 인식하고, 위기관리에 들어가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보다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를 더 믿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떨 땐 미네르바처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미네르바가 등장하게 된 것은 정부가 시장에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최근 들어 정보를 차단할 뿐 아니라 건전한 의견마저 용납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하려 하면 위기극복을 위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습니다."

△ 이동걸은 누구

195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예일대에서 금융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금융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책경험도 풍부한 전문가이다. 금융연구원·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연구기관을 거쳐 김대중 정부 초기인 98년 청와대에 들어가 금융정책 입안에 참여했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대기업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한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을 주도하는 등 재벌 개혁에 주력했다.

이 원장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분리)와 생명보험사 상장 등 주요 금융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2004년 금감위 부위원장에서 물러나자 삼성생명 상장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지난해 금융연구원장으로 취임한 뒤 국내 금융계가 잘되려면 '이헌재 사단'이 청산돼야 한다는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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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 2009-05-1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아까운 인물인데...마우스 정권에서 버티질 못하고..
 

 지난 40여년간 우리 사회가 좌표로 삼았던 나라는 미국이다. 사회구조가 비슷한 일본의 성장경험을 서둘러 좇으면서도 시선은 늘 태평양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편향은 외환위기 이후 더 심해졌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경제관료들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 일본 법령이나 제도를 참고하곤 했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이런 일이 사라졌다. 참여정부 때는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곁눈질할 게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본받자며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찬란해 보이던 미국의 경제제도는 긴 꼬리를 끌며 어둠 저 편으로 사라질 처지가 됐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예전과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축소됐고,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시장근본주의의 구각(舊殼)을 깨기 위해 팔을 걷고 있다.

 우리도 새로운 좌표를 찾아나서야 할 처지가 됐다. 하지만 정부 관료들은 낡은 좌표를 버리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금융위기와 경기침체 이후 한국 경제가 어떤 틀과 내용을 갖춰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최근 정책을 보면 고민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게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동산 경기부양, 감세와 규제 완화, 영리병원 허용 등은 친재벌·부유층 정책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이미 실패로 드러난 정책이다.

 왜 관료들은 실패한 '미국식 프레임'을 답습하려는 것인가. 임금을 깎고 비정규직을 늘려 '덜 받으며, 더 노동하는' 식으로 혹여 경제가 살아나더라도 삶의 질과 무관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루저(Loser)'들은 죽거나 말거나, 성장률이 오르고 기업이 잘되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인가. 두 동강난 사회를 보듬는 '국민통합형 경제정책'은 우리 여건상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걸까.
수십년간의 '관성' 때문에 내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정권이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으려다 보니 사고가 마비된 것인가.

 전대미문의 위기라는 지금 관료들의 권한과 책임은 더 막중해졌다. 시장이 실패했으니 정부에 힘이 쏠리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최근에 만난 한 경제원로는 "관료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가 돼야 한다"고 했다. 보수·진보의 도식이나 선입견에 구애받지 말고 필요하다면 좌파정책도 갖다 쓸 줄 아는 소신을 갖춰야 위기를 헤쳐갈 관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감세로 재정건전성이 위협받고 있는데도 집이 세 채가 넘는 부동산 부자들의 세금을 깎겠다거나, 파업이 없어야 자동차 세제지원을 하겠다는 볼썽사나운 정책이 속출하고 있다.  

 관료들이 좀더 폭넓은 시각에서 치열하게 우리 경제의 대안을 고민했으면 한다. '가지 않은 길'에서 지혜를 얻을 줄도,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걸 줄도 알아야 한다. 위기의 시대에 타성으로만 움직이는 관료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한때 대한민국을 이끌어간다고 자부하던 그들 아닌가.
200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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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 소녀 로제타는 공장에서 해고된 뒤 와플 한 조각과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나날을 보낸다. 그런 로제타를 좋아하는 와플가게 종업원 리케는 어느날 로제타의 저녁거리로 물고기를 잡는 일을 돕다 저수지에 빠진다. 그녀는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를 놔둔 채 숲으로 도망친다. 그가 죽으면 그의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되돌아가 리케를 살려 내지만, 그가 와플을 몰래 빼돌려 판다는 사실을 와플가게 사장에게 일러 결국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한 청년 실업자의 가혹한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영화 < 로제타 > 의 한 장면이다. 관객들을 시종일관 불편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1999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청년 실업의 심각성을 고발했다.

 < 로제타 > 의 '울림'은 컸고 마침내 벨기에는 이듬해인 2000년 청년고용 대책인 '로제타 플랜'을 시행한다.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은 고용인력의 3%에 해당하는 일자리에 청년실업자를 의무적으로 채용하도록 했다. 이를 어긴 기업에 대해 1명당 74유로의 벌금을 매일 부과했고, 의무를 이행한 기업에는 고용인원에 대한 첫해 사회보장 부담금을 면제해 줬다.

 지난 1월 < 대통령과의 원탁대화 > 방송토론에서 패널로 나선 조국 서울대 교수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로제타 플랜을 제안했다. 조 교수는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인턴정책이 청년실업 유예정책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꺼냈지만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한국에서는 '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제2의 금모으기'라는 찬사까지 나왔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보다는 임금 삭감이 핵심목표가 되고 있다. 일자리 공유를 위해 노·사·민·정의 대타협을 발표한 지 얼마 안돼 대졸 초임을 최대 28%나 깎는 삭감안을 내놨지만 일자리 대책은 쏙 빼놓은 전경련의 태도가 이를 말해준다. 잡셰어링도 '기업 프렌들리'라는 가이드라인을 넘지 못한다. 잡셰어링을 통해 기업들은 노동비용을 깎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셈이다. 근로시간을 줄여 고용을 늘리고, 남는 시간을 교육훈련으로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 이명박 정부하에서는 '불온한 발상'일 뿐이다.

 일자리를 잃은 로제타의 일상은 이미 양심과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물에 빠졌을 때 왜 도망쳤느냐는 리케의 물음에 "일자리 때문"이라고 말하는 로제타에게 연애감정은 사치일 뿐이다.

 이미 우리 사회엔 로제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올 봄이면 고교와 대학에서, 직장에서 또다른 로제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을 지키라고 누가 충고할 자격이 있을까. 상위 1%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정부와 사람값을 깎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기업들이 버티고 있는 이 나라에서.
20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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