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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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에 이어 한국과 유럽연합(EU)간의 FTA를 지켜보면서 "유럽연합은 내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연합이 내놓은 협상안 중엔 동물복지라는 게 있었는데, 예를들면 양계장을 지을때 닭의 마리당 공간을 넓히고, 도축 48시간 전에는 동물을 학대하지 말 것이 포함돼 있었다. 무역분쟁이 발생할 경우 무역보복 대신 정부와 시민대표로 구성된 포럼에서 해결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자유무역하자는 협상에서 동물복지나 시민대표라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들이 왜 나오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뼛속까지 미국을 닮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사회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엇비슷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럽은 어떤 나라이고, 나는 얼마나 유럽을 알고 있는가 궁금증이 들었지만 얼마 안가 묻혀버렸다. 유럽을 몰라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애독한 책 중 하나가 <유러피언 드림>이란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이 다시 도져 집에 있던 책을 잡았다. 500페이지나 되는 분량이지만 사흘만에 읽힐 정도로 흡인력이 강했고 그만큼 충격도 컸다. 근래에 읽은 최고의 책이 아닐까 싶다. 대목마다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거나 무릎을 치게 만도록 만들었다. 

 이 책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개인의 자율성과 부의 축적이 핵심인 계몽주의 시대의 ‘아메리칸 드림’이 미래사회를 구현하는 데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지속가능한 개발과, 삶의 질, 상호의존성, 인권에 초점을 맞추는 ‘유러피언 드림’에 주목해야 한다고 리프킨은 강조한다. 민족국가가 시대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사조가 세계 불균형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현실을 미국식 가치관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총체적인 삶과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고, 때마침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리프킨이 찝어낸 것이다.  

  리프킨의 책은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이후 세번째다. 그는 기자로 따지면 기획기사를 잘 쓰는 기자라고나 할까. 미국인으로 유럽을 20여년간 다니며 미국과 뭔가 다른 유럽인들의 생활방식- 예를 들면 뒷짐지고 어슬렁 거리거나 카페에서 몇시간씩 머무는 사람들-에 주목한 그는 이 차이가 실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란 점을 각 분야에서 논증해간다.  
     

  유러피언 드림은 곧 구현될 유토피아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한때 총을 들고 싸우던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의 지도자들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형성된 반성의 공감대에서 지난 50여년간 벽돌한장씩 쌓듯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일구어 왔다. 어느덧 이 꿈은 허물지 못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유럽은 20세기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계몽주의가 갖는 한계를 인식해왔다. 비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타인들과의 관계를 항상 의식하고 배려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 결국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자아를 찾는 사회를 만들었고, 그만큼 이웃과 사회에 대한 ‘공감’과 공존의식이 커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좌파들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테제들이 EU의 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되고 법제화되는 혁명적인 실험이 지구 한켠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단편적인 뉴스, 미국편향의 국내언론을 통해서는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던 유럽연합의 '맛'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금융위기이후 우리의 국가전략을 설정하는 논의에도 유용한 참고가 될 것 같다. 소비로 버텨온 미국에서 향후 적어도 수년간은 경제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지만, 비슷한 경제규모의 유럽연합은 상대적으로 금융위기의 피해를 덜 봤기 때문이다. 온 신경을 미국에만 맞춰온 우리의 총체적 삶의 방식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금융위기는 일깨우고 있다. 
 유럽에 대한 이해들이 전무하다시피하고, "아메리칸 스탠다드'에 젖어있는 우리 정부의 정책당국자들이 이 책을 통해 발상의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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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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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의 자손들이 장차 유치원 시기부터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해 ‘무한 경쟁’에 몰입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지금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우리 상황에서는, 비시장적 사회와 같은 궁극적 이상은 고사하고 일반 대중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한 복지 자본주의만이라도 성취하려면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배계층에게는 왼쪽으로부터의,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계속 넣어야 한다"(22~23쪽)



 박노자의 시선은 늘 날카롭다. 그리고 그는 항상 정공법을 택한다. 우리가 ‘이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지점을 매섭고 아프게 찝어낸다. 그의 기본이 되는 ‘주의’는 사회민주주의다. 볼셰비즘 혁명을 한때 꿈꾸던 386들이 코웃음칠지는 몰라도 갈수록 보수수구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 정도라도 해내려면 무수한 피가 필요하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까불지 말고, 이 정도라도 해보라는 것이다. 한번 해보기만 하고 안될 거 같으면 포기하고 ‘개혁적 자유주의’정도에 머무른다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들(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말하는 ‘개혁’이란 뭔지 늘 궁금했었는데, ‘햇볕 정책’ 이외에는 대체로 각종 악법(국가보안법 등)을 폐지하는 것, 관료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시키는 것(각종 토착 비리 척결), 그동안 이런저런 월권행사를 당연시해온 각종 대자본(특히 삼성?조중동)에 대해 국가가 적당힌 견제를 가하는 것,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하는 것(‘거품 터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단계적 땅값 내림세 유도, 투기 방지책) 정도라 하겠다. 뭐, 발상이야 좋고, 나도 하등의 반대가 없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적 ‘개혁론’의 기본적 문제점이란, ‘자유주의’라는 틀에 갇혀 있는 이상, 앞에서 나열한 아주 ‘온건한’ 목표들도 사실상 달성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슬픈 현실에 있다. ‘온건한 자유주의적 노선’마저도 사실상 ‘자유주의’보다 더 진화된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세력들만이 제대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게 ‘한국적 정치’의 재미있는 역설이다.(53쪽)


 그런 점에서 그는 노무현 시대를 아프게 비판한다. 그는 훌륭한 정치인이지만 그의 시대를 '지나간 영광의 시대'쯤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노무현 시대의 한계를 철저히 반성하는 것이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시선을 돌리라고 강요한다. 
 
 박노자는 우리사회의 소수자에게 항상 관심을 돌린다. 이땅에 기득권이 없고, 외국인 귀화자라는 자유로움 때문인지 성역처럼 돼 있는 '종교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뱉고 싶지만 차마 뱉을 수 없는 말들을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이책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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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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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이번 휴가때 두편 연달아 읽었다. <회랑정살인사건>은 그중 한권. 30대 여자인 주인공이 60대 노파로까지 분장해서 자신과 애인을 해친 범인을 찾아내는 스토리 전개가 꽤 탄탄하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소설의 본령에서는 약간 비껴나 있다. 막판 반전이 주는 쇼킹함은 평가할만 하지만 반전을 위한 복선이 거의 막판까지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움이다.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간의 두뇌게임이라는 말도 있지만, 반전을 위한 도구를 작가가 독점해 버리는 구조가 약간의 실망감을 갖게 한다. 일본 소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일본인들은 복수를 꼭 제손으로 하겠다는 집념이 강한 것 같다. 사법기관에 맡겨놓기엔 원한이 풀리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적당한 흥정과 타협으로 범죄에 대한 단죄가 유야무야 돼버리는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이 작가들에게 짙게 깔려 있는 것인지. 화상을 입은 주인공이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 바닷가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것 처럼 위장한 뒤 돌아오는 장면, 생전에 의지가 됐던 혼마상을 찾아갔더니 벌써 숨진 뒤였고, 그의 시신을 벽장속에 암장하고 시멘트까지 바르는 장면은 일본소설 아니면 보기 힘든 엽기가 아닐까. 오싹오싹하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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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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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즐길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게 일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모든 엄숙주의와 모든 '묻지마 일 벌레'들은 결국 위선으로 그 세월을 보답한다. 
  
난 오늘을 희생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그 어떤 설교도 믿지 않는다. 천국을 팔고 예수를 팔아 배타적인 좁은 길속에서 사람을 가두는 기독교, 민중을 팔아 개인적 욕구를 폄하하고 집단주의에 사람을 복속시키는 자가당착의 낡은 정치집단을 믿지 않는다.'(이밖에도 무수한 구절이 가슴에 남는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을 지냈던 목수정씨의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의 한 대목이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을 서점에 갈때마다 함 봐야지 하고 맘먹었는데, 며칠전에야 샀다. 보고 싶었던 책이라 잘 넘어갔다.  

 한국에서 문화관련 일을 하다 개인적 사건을 겪은 뒤 프랑스로 날아가 파리8대학에서 문화정책을 공부하던 중 프랑스 예술가인 희완 트호뫼흐를 만난다. 그와 결혼하지 않은 채 딸아이 칼리를 낳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민주노동당에서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정책위원을 지내는 기간 동안 생활과 삶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동시에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 목씨가 경험하고 겪었던 프랑스의 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였을 뿐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때인 것 같다. 그 찬란함을 엿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의 경이로움, 사회속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들은 상당한 울림을 준다. 페미니즘에 대해 그리 부정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깊이 알지도 못하는 (나같은)이 방면 초심자들에게는 목씨의 생각줄기들이 화두가 될 만하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에 관한 소개다. 동성애자간의 동거, 혹은 결혼을 거부한 채 애만 낳아 기르고 사는 동거 등 결혼이라는 기존질서로는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커플관계를 사회적으로 지지해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 1999년 도입된 시민연대계약이다. 도입은 이 무렵 됐지만 국회에서 법제화되는데는 난관이 많았던 것 같다.
사회적 논란이 한창이던 무렵 파리시장이자 사회당 국회의원인 베르트랑 들라노에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 그의 용감한 폭로가 이법이 통과되는데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저자와 프랑스남성인 희완도 이 시민연대계약을 했다. 이 계약을 체결하면 결혼한 것 처럼 세금감면이나 국적 취득 등 제도적 혜택을 프랑스인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다고 소개돼 있다. 
 프랑스가 이처럼 진보적(진부한 표현이지만) 가치들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한 것은 68혁명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드골식 엄숙주의가 지배했다는 설명도 들어있다. 

 프랑스에 관한 책이라곤 홍세화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든가, '프랑스의 노숙자운동'정도의 백짓장이어서 내용전반이 흥미로왔다. 파리에선 왜 사람들이 패션에 민감한 것인지도 책에 답이 나온다. '한국=가부장적 질서'라는 등식이 왜 절대적으로 맞는 것인지도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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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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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 작품은 <백야행>.  TV드라마에 국내에선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뼛속까지 우울해지는 스산함에 몸서리를 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용의자X의 헌신>는 강도면에선 덜 부담스럽다. <백야행>처럼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전개속에 인간이란 존재를 발가벗겨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 웅크린 모습의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그의 웅크림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맨얼굴을 엿보게 되는 독자들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의 책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항상 청결하고, 남에게 폐끼치기 싫어하고, 단정한 일본사회와 일본인들이 실제로 얼마나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도 느껴진다. 좋아하는 이웃집 이혼녀 야스코가 일하는 도시락가게를 드나들면서 좋아한다는 감정이 드러날까 조바심치는, 그래서 항상 자로 재듯, 정밀한 계산하에 의해 감정선을 넘지 않고, 가둬버리는 이시가미의 모습도 그렇다.  

 그런 행태가 꼭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정돈된 질서와 체계속에서 전체를 위해 조금씩 침식당해가는, 그러다 한순간에 놀랄 정도의 에너지로 폭발해 버리는 일본사회와 일본인의 모습은 어딘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엽기적인 살인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이런 것과 상관없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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