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시인선 37
김충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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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에 연두색이 물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연두'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아졌다.
단어와 단어, 단어와 문장. 단어 하나를 떼다가 조용히 입에 머금어 본다. 시를 마음에 머금어 본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색이 참 곱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연두색 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을 만났다. 라일락 꽃이 무얼까 찾아보았고, 고래 사진을 찍으러 떠났으며, 옆에 있는 내 사람을 슬며시 바라보게 한다. 파릇파릇한 시집의 표지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반면, 내용은 그렇지 않다. 김충규 시인이 타계한 지 1년 후에 출간된 시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과로사한 시인의 단어들은 꼭 이럴 것을 예감이나 한 듯 소멸과 허공을 잔뜩 표현하고 있었다.
 
 
 
 

 

시인의 말을 대신하여
 
 
허공에게 바치는 시를 쓰고 싶은 밤이다. 비어 있는 듯하나 가득한 허공을 위하여. 허공의 공허와 허공의 아우성과 허공의 피흘림과 허공의 광기와 허공의 침묵을 위하여...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들어가 쉴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허락받기 위하여... 소멸에 대해 생각해보는 밤이다. 소멸 이후에 대해, 그 이후의 이후에 대해... 구름이란 것, 허공이 내지른 한숨... 그 한숨에 내 한숨을 보태는 밤이다.
 
[2012년 1월 16일 밤 10시 25분] 
  

 

 
 
 
 시집의 얼굴을 조심히 쓰다듬어본다. 시집을 읽으면 나도 시인처럼 단어를 가지고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단어를 잡아 시집이라는 공간에 살며시 풀어주는 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이를 마치 <허공의 미공>에서, '허공의 문장이 되지 못한 글자들이 수북수북 날아간다'라고 표현한 것만 같다. '구름에 눈 맞추고 새의 비행을 눈망울로 채집한다'라는 문장은 단어를 동글동글한 눈송이로 만들어 내 어깨 위로 사부작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음에 드는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마음에 드는 문구에서는 잠시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어 입안에서 읊조려 본다.  
 
 
 
 
 
 
라일락  고래  허공  바람  핥는다
 
 
 
 유난히 시집에 많은 단어들이다. 죽기 위해 육지에 나온 고래의 시 <그렇지만 고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유리창에 미끄러지는 바람의 시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시인의 허무함을 잔뜩 담아낸 듯한 허공의 유령 같은 시 <허공의 만찬>, 사과를 먹고 잠든 듯한 동화 같은 시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등, 움켜지게 만드는 시들이 있다.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찍은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오늘 내가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
그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
(_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중)



 
 



 하와이 동쪽 (토끼섬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 눈엔 고래섬
 
  
 
 
내가 먼바다에서 잡아온 고래가
라일락 향기에 죽었다
 
내 심장을 꺼내 먹이면
고래가 숨을 얻어 허공을 헤엄쳐오를까
그러면 나타날 거니? 내 사람
 
(_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중)
 
 
 
 
 
 
절대의 고독은 빙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절대 고독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 확장되고 숨결은 평화로워진다.
시가 되려는 입자들이 비눗방울처럼 터진다.
고요히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는다.
 
[2012년 2월 24일 메모_영원한 귓속말 김충규 시인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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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배심원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1
존 그리샴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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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Biloxy 시, 30년간 하루에 3갑씩 담배를 피워오던 흡연자가 폐암으로 사망했다. 죽은 흡연자의 아내는 남편이 담배로 인해 폐암에 걸려 끝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담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 이름은 <Wood v. Pynex>, 재판은 배심제에 의해 진행이 된다. 죽은 흡연자의 대리 원고 측 변호인단과 담배 회사 대리 피고 측 변호인단 들이 배심원단을 꾸리기에 앞서 예비 배심 후보들의 정보를 얻는 방법, 12명의 배심원들을 선정하는 절차, 그리고 불법적인 접촉으로 인해 격리조치된 배심의 상황 등 미국 배심원제도담배소송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이 책은 아주 세세히 보여준다.
 담배 회사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개인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과도한 흡연이 해롭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그 위험성을 감수하고도 피우겠다고 선택한 것은 본인의 선택의 값이라는 것이다. 이에 맞서는 주장은 담배를 피우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담배를 끊을 수 없도록 담배 회사가 의도적으로 니코틴을 일정 수치로 높여 니코틴에 중독시켰기 때문에 담배 회사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주인공 니콜라스는 의도적으로 Biloxy에 시민으로 등록하여 배심원으로 선정되었다. 의문의 여자 마리는 담배 회사 측 변호사에게 접근하여 니콜라스가 평결을 모아올 테니 평결을 돈으로 사라고 한다. 격리된 배심원들은 로스쿨 중퇴생인 니콜라스에게 점점 빠져들어 그의 말을 듣게 되는데. 담배소송은 이대로 담배 회사의 승리로 끝나게 될까?
 
 

 


 
 2014년 4월 14일 건강보험공단이 KT&G, 필립모리스,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 코리아(BAT)(제조사 포함)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흡연 피해로 인한 청구액 537억의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 지방법원에 제기했다. 개인이 아닌 공공기관의 국내 첫 담배 소송이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개인이 낸 담배소송은 4건이며, 국내 첫 담배소송이 1999년 소송이 제기된 지 15년 만에 최종적으로 2014년 4월 10일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 확정되었다. 이에 앞서 서울 고등법원은 지난 2011년, 개인들이 낸 담배 소송에서 일부 폐암과 후두암이 흡연과 인과 관계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때의 원고는 흡연 경력 30년 이상에 하루 1갑씩 20년 이상 피운 사람들이었고 건강보험공단은 암 예방연구 자료를 통해 비슷한 유형의 환자 3천4백여 명을 골라냈다. 이들의 진료비는 10년간 537억 원이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흡연 경각심이 높아지면 그로부터 얻어지는 국민 건강 증진 효과는 실로 막대할 것이라고 한다.
 
 
 
The evidence was conclusive-cigarettes caused lung cancer. Every professional medical organization in the world that had addressed the issue had determined that smoking cigarettes caused lung cancer. The only organizations with contrary opinions were the muufacturers themselves and their hired mouth-pieces ㅡ lobbying groups and the like. p.263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문제를 거론한 세계의 모든 전문 의료 단체들이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반대 의견을 가진 조직들은 제조업자들과 그들이 고용한 대변인들, 즉 로비를 하는 집단들뿐이었다)
 
 
 
국내에서 공공기관에 의해 담배소송이 제기되고, 개인이 낸 첫 담배소송이 패소 확정된 기사를 보고 이번에는 원서로 읽어보기로 했다. 졸업논문으로 '간접흡연자 피해'에 대해 쓸 만큼 담배소송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불씨가 살아난 느낌이다. 이참에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석사논문도 담배소송으로 미리 써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의 담배소송이 어떻게 진행될지 계속 추적할 생각이다. 더불어 길거리 흡연에 대한 규제도 한층 강화되었으면 좋겠다. 
 
 
 
 
 
*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mrnhis (진행 중인 담배소송과 건강보험 소식 등 많은 정보가 있다)  
* 영화 <Runaway Jury>(런어웨이2003)는 원작의 '담배소송'을 '총기 소송'으로 각색했기에 내용이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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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다가올까.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작년 처음으로 헌 책방에 갔을 때, 이 책을 집어왔다. 처음으로 방문한 헌책방에 처음으로 읽어보는 신경숙 작가의 책. 첫 장을 펴보니 사인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그 주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의 사인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작가님께 보여드렸다. 이 책을 헌책방에서 샀는데 누군가가 작가님께 사인받은 책을 팔았고 그 책이 나에게로 왔다고. 작가님은 이를 듣고는 신기해하셨다. 그리고 웃으시면서 이도 인연이니 기억하겠다고 해주셨다. 작년 4월에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책을 읽으며 조마조마했었던 기억이 났다. 신경숙 작가가 이리도 유명한데 얼마나 잘 쓰는지 확인해볼까? 하는 심리였던 것 같다. 줄거리만 탐독했던지라 책을 다 읽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책을 읽기 전과 책을 읽은 후가 다르지 않았던 거다.

 

 

 일 년이 지나고 다시 5월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매년 5월이 되면 이런 책들을 읽자고 나에게 약속했었던 터였다. 책을 펼치고 프롤로그를 읽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먹먹하고 막막한 두 단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그 사이에서 마음이 울렁거렸다. 

 

 

 뉴스에서 세월호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한 자원봉사자가 인터뷰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웃지 않는 것은 물론 서로 '수고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맛있게 드세요'와 같은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느끼고 있을 뿐이다. 무언가를 참음에 귀 뒤가 아파져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펼쳐들고 읽는 것뿐이다. 그저 기억하는 것뿐..

 

 

 

 

 

 

 

 

 

[밑줄긋기]

 이렇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이 다가올까.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210

 

 어떤 시간을 두고 오래전, 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전, 이라고 쓸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358

 

 함께 있을 때면 매순간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작가의 말)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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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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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돈으로 산 첫 세계고전문학『위대한 개츠비』. 동명 영화가 개봉함에 따라 출판사별 과열경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영문판도 함께 주는 소설가 김영하 번역의 문학동네 출판사 판본을 선택했다. 2013년 5월에 있었던 '김영하 작가와 같이 읽는 『위대한 개츠비』' 도 참석했었고. 이후 디카프리오 주연의 동명 영화도 챙겨 봤고,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 '위대한 개츠비 편' 문학동네&민음사&열림원 번역을 비교한 방송도 들었다. 책과 영화, 라디오까지 여러 매체를 통해 이 작품을 접했던 터라 오히려 리뷰 쓰기가 부담이 들었다.

 

 처음으로 책이 쓰인 배경에 신경을 쓴 책이기도 한데, 책 뒤에 있는 시대적 배경에 관한 역자의 해설을 읽고 난 후에야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이 출간된 192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이 아직 초강대국으로 등극하기 전이다. 희망적인 눈빛으로 바다 건너 이스트에그의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는 개츠비를 신생 강대국인 미국의 모습과 인격화하여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아메리칸드림으로 마음을 채우던 시대에 1920년 초반부터 경제 대공황에 이를 때까지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었고, 부자들 사이에서도 웨스트에그의 신흥머니계급과 이스트에그의 올드머니계급으로 차이가 존재했다.

 

 

 손 잡힐 듯 가까운 건너편 데이지 집에서 잊지 말라는 듯 반짝이는 '초록색 불빛'을 매일 바라보며 희망을 키운 개츠비. 그는 너무나도 성공하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데이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손에 묻은 피와 돈의 더러운 냄새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위대하지 못 했던 개츠비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

데이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끝내는 버림받는 개츠비가 문득 인어공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바치고 간신히 인간의 다리를 얻어 그리도 원하던 왕자를 만났지만 왕자는 다른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고, 결국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의 사랑을 바보같은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듯, 물거품이 돼버린 그의 사랑도 위대한 것이라고 느껴졌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이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해달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이라고. 개츠비에게는 데이지라는 목표가 있었고, 데이지에게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저항이 있었다. 지친 윌슨은 엉뚱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몸이 뜨거운 그의 아내는 달려오는 자동차를 잘못 보고 제 몸을 던진다. 작가인 피츠제럴드마저도 당대의 성공과 즉각적인 열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표적들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들은 모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꽂혔다.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_김영하 해설 중 p.242

 

 

 

 

 

[밑줄 긋기]

 우리는 모두 몸을 돌려 개츠비를 찾았다. 쑥덕거릴 만한 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조차 개츠비에 대해서는 열심히 수군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개츠비가 세상 사람들에게 낭만적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p.60

 

 

 그들은 소파의 양끝에 않아서 마치 어떤 질문 하나가 던져졌거나, 아니면 던져진 질문이 아직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고 허공에 떠있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의 당황한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데이지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돼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거울 앞으로 달려가 손수건으로 번진 화장을 급히 지웠다. 놀라운 것은 개츠비의 변화였다. 그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고 있었다. 환희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없이도. 그로부터 뻗어 나온 새로운 행복의 광휘가 온 방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p.113

 

 

 "영국에서 옷을 사서 보내주는 사람이 있거든. 봄가을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엄선해서 보내준다고."

 그는 셔츠 더미를 끄집어내 우리 앞에서 하나하나 펼쳐 보여주었다. 얇은 리넨과 실크, 질 좋은 플란넬 셔츠들이 테이블 위로 던져져 다채로운 색깔로 뒤엉켰다. 우리가 감탄할 때마다 그는 더 많은 셔츠를 가져왔고, 이 부드럽고 사치스러운 언덕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문장이 새겨진 줄무늬 셔츠, 산홋빛의 체크무늬 셔츠, 사과빛 푸른 셔츠, 인디언 블루의 이니셜이 새겨진 라벤더빛 혹은 연한 오렌지빛의 셔츠들. 그 순간 갑자기 데이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셔츠 더미에 파묻고 격렬하게 울지 시작했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꺼운 셔츠 더미에 파묻혀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

 

"안개만 없었다면 해협 너머에 있는 당신 집도 보였을 텐데." 개츠비가 말했다. "당신 집 잔교 끝에는 언제나 초록색 등이 켜 있더군."

 데이지가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하지만 개츠비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초록빛의 심대한 의미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데이지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광대한 거리에 비하면, 그 초록빛은 거의 데이지를 만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느껴졌을 것이다. 달 주위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말이다. 이제 그것은 그냥 잔교 끝의 초록색 등으로 돌아와 있었다. 찬탄의 대상 중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p.117-118

 

 

 작별인사를 하러 간 순간, 나는 개츠비의 얼굴에 다시 돌아온 당혹스러움을 발견하였다. 현재의 행복에 대한 희미한 의심이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보면 거의 오년의 세월이었다. 그날 오후만 해도, 눈앞의 데이지가 그가 꿈꾸어왔던 데이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는 독보적인 열정을 가지고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하루하루 그것을 부풀리고 자신의 길에 날리는 온갖 밝은 깃털로 장식해왔던 것이다. 아무리 큰 불도, 그 어떤 생생함도,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영원에 쌓아올린 것에 견줄 수 없다.

 내가 그를 바라보는 동안 그는 표정을 수습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귓전에 대고 뭔가를 속삭일 때면 감정이 북받치는 듯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뜨거운 열정으로 거세게 요동치는 그녀의 음성에 그는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리 오래 꿈꾸어도 결코 질리지 않을 그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생불멸의 노래였다. p.121

 

 

 그가 원한 것은 데이지가 톰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어." 그녀가 이 선언으로 지난 삼 년을 모두 무마시키고 나면, 그들은 좀더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자유로워진 그녀와 함께 루이빌로 돌아가 그녀의 집에서 결혼하는 것이었다. 마치 오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p.139

 

 

"누구 시내 나갈 사람?" 데이지는 집요했다. 개츠비의 눈길이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 "아." 데이지가 소리쳤다. "당신 너무 멋있어."

 그들의 눈길이 마주쳤고,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서로 얽혔다. 데이지는 애써 눈길을 테이블 아래로 떨구었다.

"당신은 언제나 멋있어." 그녀는 반복해서 말했다.

 톰이 있는 자리에서 개츠비를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셈이었다. 톰은 깜짝 놀랐다. 입을 벌린 채 개츠비를 바라보다가 마치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을 방금 알아본 듯이 데이지를 돌아보았다. p.149

 

 

 선로가 구부러지면서 이제 기차는 태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더 낮게 기울어지면서, 그녀가 저 사라져가는 도시 위로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빛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한 움큼의 공기라도 더 움켜잡으려는 듯, 그녀로 인해 빛을 발했던 곳의 파편 하나라도 건지려는 듯, 그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이 번진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너무나 빨리 지나가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서 가장 멋진 것, 제일 좋은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p.190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p.224

 

 

 

재독: 201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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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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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뉴스에서 요양원에 입원 중이던 70대 치매노인이 같은 방에서 생활하던 환자를 목 졸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 환자는 자신의 행동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우리나라에 치매 가정에서 일어난 자살이나 살인 사건은 알려진 것만 10건에 이른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에게 더 큰 고통을 강요하는 질환 '치매'가 이제는 살인을 부르는 질병이라는 오명도 쓰고 있다.

 

 

 31년간 존경을 받으며 성실하게 근무해온 경찰간부가 아내를 목 졸라 살인하고 자수를 했다. 이유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가 제발 죽여달라고 부탁한 촉탁살인에 의한 것. 하지만 살인을 하고 자수를 하기까지 이틀의 공백이 있다. 이 책은 살인을 한 동기와 범행 자체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하기까지의 이틀간의 공백에 카지(살인한 경찰관)가 무엇을 했을까에 초점을 맞춘다. '경찰소설'로 유명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2003년 작 [사라진 이틀]이다.

 

 

 알츠하이머란 설정으로 기억나는 것은 치매의 상황에서도 주인공의 예쁘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모습이 기억나는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이다. 이 영화에서의 결말은 결국 알츠하이머 여자 주인공의 요양원행이었지만, 이 책에서의 사건은 죽음으로 점을 찍는다. 책은 6개의 챕터로 나뉘어 경찰, 검사, 기자, 변호사, 판사, 교도관의 시선으로 사건을 마주하는 입장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짜임새 있는 구조로 사건을 서술하기 때문에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고 각자의 처지에서 우리가 알지 못 했던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알츠하이머(치매)는 병을 가진 본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비단 함께 생활하는 가족의 문제가 된다. 판결문을 작성하게 된 판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다 그 아내와 나눈 대화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판사의 아빠도 알츠하이머이고, 판사의 아내가 시아버님을 보살피고 있는 상황_ 아내의 대사 모음)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죽게 해달라고, 아버님한테서. 당신이 슬퍼할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어요."

"벌써 2년 전이에요. 가끔씩 아버님이 보통 때로 돌아오는 때가 있었던 시절이에요. 아버님은 겁을 먹고 계셨어요. 당신이 망가져가는 것을 느끼셨던 거죠. 그래서 나한테 말했어요. 눈 딱 감고 죽여줬으면 좋겠다. 죽게 해달라고."

"난 할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있을 리 없죠. 사람을 죽이다니..."

"하지만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당시.... 아버님이 나가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고 있었어요. 머리를 깎으러 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스스로 죽어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니까 카지라는 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에요. 부인의 마음도, 아려올 정도로 잘 알아요.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어 버리다니, 어머니로서 가장 괴로운 일이잖아요? 나도 타카시나 마사미가 죽고, 그 이름과 기일을 잊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죽고 싶어질 게 분명해요. 분명 당신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할 거예요."

"카지 씨는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부인을 죽인 거지요. 자신의 손을 더럽히면서."

 

카지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따뜻함은 이 세상에 없어도 돼. 스미코(판사의 아내)의 따뜻함을 후지바야시(판사)는 선택할 거다. 죽이지 않는 따뜻함을-.

p307-309 

 

 

 

초고령화 사회가 진입함에 따라, 공포스러운 질병의 환자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특히 가족이 더 힘든 병 '치매'는 우리나라에는 50만 명 이상, 전 세계에 44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질병이라고 한다. 이를 더 이상 가족 내부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에서 나온 일본의 '개호보험 제도'와 비교해 우리나라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란 이름으로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노인 요양법

 

우리나라에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으로 2007년 제정되어 2008년 7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치매, 중풍) 등의 사유로 일상생활을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 등에게 가사활동 지원 등 그 가족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보험제도이다. 우리가 내고 있는 국민건강보험료에 6.55%가 이미 장기 요양 보험료로 측정되어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보험료를 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노인성 질병에 걸렸을 때, 요양비 80%를 지원받을 수 있다. 신청은 가까운 건강관리공단에서 가능하다.

장기요양보험에 관한 공단 홈페이지: http://www.longtermcare.or.kr/

 

 

 

 

 살다 보면 삶보다 죽음을 부르는 때가 있다고 한다. 법으로 정해진 안락사 이외에 '자비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치매의 수렁에 빠진 현 사회에 그나마 가족을 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잘 시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일본은 전쟁으로 점철된 기나긴 전국시대를 지나왔다.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아주 흔하다. 그래서 전국시대부터 일본의 사회 풍조는 죽음 자체보다도 어떤 모양의 죽음인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일본 특유의 죽음의 미학, 자살의 미학 등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에서도 왜 카지(경찰관)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는가가 계속 중요한 의문사항으로 부각되고 있다. 일본의 문화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사항임을 이해했으면 한다.

(옮긴이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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