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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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는 벅찬 묵직한 분량에 온전히 며칠을 이 책만 잡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 새벽 다섯시까지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이야기의 힘이란 대단해서, 다음 날 힘들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게 하는 책이 생기면 그것을 더 높이 쳐주게 된다.


전쟁을 겪어내고 그리고 어쩌면 통일을 보고 어느 늘그막한 나이에 죽은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도 환생이 아니다. 1919년생인 해리 오거스트는 그의 첫 생이자 마지막 생이라 굳게 믿었을 한 번의 삶을 온전히 직선적으로 살았고 수명이 다해 죽었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또다시 1919년,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해리 오거스트로 태어났다. 첫 번째 생의 온전한 기억을 간직한 채로!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미쳐 두 번째 생은 이른 나이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세 번째 생부터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고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이 왜 이런 특별한 존재인지 의문이기에 세 번째 삶에서는 종교적으로 신에게 답을 구하며 세계를 방황하고, 네 번째 삶에서는 의학적으로, 여섯 번째 삶에서는 물리학 쪽으로 접근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운명의 동료들이 모여있는 크로노스 클럽을 발견하고는 안정을 찾았다.


선형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 시간여행과 공간이동인데, 이 책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원하는 시간대로 옮겨갈 수 있는 건 아니고, 삶을 한 번 통과해야 다음 생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삶을 가지고 미래를 바꾸려는 자가 등장하며 갈등과 죽음이 따라온다.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의 삶의 시작을 지켜보았고 길고 긴 생을 함께 살아냈다. 그리고 가슴 뛰는 것을 느끼며 숨죽이고 그의 복수를 추적하고 따라갔다.



열다섯 개의 교차편집된 스토리가 방대해서 복잡해서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화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스토리의 편집성 때문에 또 읽는 맛이 있었다. 근 몇 년간 읽은 최고의 시간여행 SF 소설이자 훔치고 싶은 능력이다. 아니, 세계사 걱정 없이 상상하고 책으로 즐길 수 있는 직선의 삶이 더 나을까. 이 더운 여름밤, 상상할 수 있는 최고치의 시간여행이었다. 이 맛에 SF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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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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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편 밖에 없다니. 100편이라도 남김없이 읽고 싶은, 책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집을 찾았다. 가쿠다 미츠요의 2005년작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헌책방에 판 책이 내가 다니는 해외여행지마다 나타난다는 강렬했던 첫 번째 단편 「여행하는 책」을 시작으로 조금씩 아껴 읽었다. 책을 함께 읽던 동거 중인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그와 같이 쓰던 책장에서 자신의 책을 꺼내며 쓴 「그와 나의 책장」, 책에 파묻혀 책만 읽는 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단골 책방에서 책을 훔치고는 죄책감에 책방을 가지 못한 「미쓰자와 서점」 등 소설적 요소가 뛰어난 단편보다는 일상을 소설화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책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이 책이 좋았던 이유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처럼 취미가 같은 다른 독서가들의 책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가까이의 책 일상을 넘어 책 소재에 약간의 소설을 가미해주어도 나처럼 이렇게나 흥분하는 독자들이 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마지막 단편 「첫 밸런타인데이」에 나오는 구문인데, 여기서 주인공은 '이 책을 만난 나와 만나지 못한 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라고 느끼는 책을 밸런타인데이에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려 한다. 이 책을 만난 나와 만나지 못한 나 사이라.

1년 후 이 책을 다시 언급하며 이 책을 만난 나에게 큰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길 지금부터 찬찬히 움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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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이긴다 - 배금자 변호사가 대한민국에 전하는 정의의 메시지
배금자 지음 / 책넝쿨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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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금자 변호사가 맡았던 담배소송은 대법원 최종 패소 확정되었다.(대법원 2014. 4. 10. 선고 2011다22092 판결) 줄곧 관심 있었던 담배소송을 우리나라 최초로 이끈 이력뿐만 아니라, 여성인권 향상운동 등 배변호사의 발자취 중 공감하는 바가 있어 쭉 저서를 챙겨본 터라 10년 만에 나온 이번 책은 더욱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책은 기대에 못 미쳤다. 책은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배변호사가 신문에 논설했던 칼럼들을 묶었다. 하지만 소제목 아래 칼럼이 연재된 일시를 바로 표기해놓지 않아 몇 일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놓고는 90년대 사건이거나 2000년 대 초반의 판결을 논설하는 식이었다. 2015년에 발간된 책에 15년은 족히 묵은 사건들과 배변호사가 오래전 저서에서 바랐던 선진의 방향으로 변한 이해관계거리를 지난 뉴스 마냥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니깐 배변호사의 이전 저서들에서 이미 커버돼있는 있는 옛 사건들을 다시 복기해 놓은 책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가장 궁금했던 담배소송이 적힌 챕터를 먼저 읽었는데, 배변호사 하면 사실 작년에 패소해 그간 한국에서 신변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힘들게 진행해왔다는 담배소송에 대한 후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챕터에 이미 알고 있던 과거 기사와 해외 사례를 들어가며 약간을 할애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원문: https://m.blog.naver.com/amy0116/220861465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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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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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뉴욕에 오기로 했을 때 남편이 가장 걱정한 뉴욕의 단점을 꼽는다면, 바로 담배입니다. 흡연인구가 너무 많아요.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도시인데다, 실내와 공원 등의 공공장소를 제외하고는 길거리 금연정책이 전무하다 보니 한 블록이라도 온전히 담배 냄새 없는 길을 걸을 수가 없어요.


국내에는 강남 대로와 명동 대로 등 주요 길거리는 대부분 금연거리로 설정돼있지요. 국내에도 물론 길거리와 보행 흡연을 하는 분들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요. 재작년 유럽 여행을 다녀오며 올린 리뷰도 유럽여행에서의 흡연인구에 관한 실태에 대해 올렸었지요. 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모까지 버젓이 아이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상황이 한둘이 아니라면 심각한 겁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인 없는 살인의 밤』 단편집에 「하얀 흉기」라는 단편이 있어요. 스포일 테지만 비흡연인에게 담배가 얼마나 큰 고통인지 이 단편은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편이 아니라도 흥미로운 단편집이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표제작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단 두 장 만에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뛰어난 미스터리 단편입니다.

하얀 흉기 아무곳에서나 휘두르면 정말 범인 없는 살인의 날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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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백승무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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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즐거운 숙제였지만, 쓰기는 고난이다. 매력적인 글을 읽었지만 매력적인 리뷰가 나오지 않는 것에 작가를 탓할 수 없을 터. 톨스토이의 대작 중 하나를 골라야 했을 때, 분량과 책을 휘리릭 넘겼을 때 나오는 법정신 덕에 부활을 고른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길고 비슷하며 종종 축약되는 러시아 이름이기에 각오하고 읽어야 하는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고, 번역도 자연스러워 안나 카레니나 보다 더 잘 읽혔다는 것 또한 언급하고 싶다. 톨스토이의 후기 작품이자 목적을 두고 쓴 글이기에 대작이라는 성호에 걸맞게 완성도도 높았다.


깨끗하게 읽을 줄 알고 시작한 터라 읽던 중 생각이 많아져 지금이라도 접기 시작할까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려 스토리를 탐독하며 일독을 마쳤다. 서사가 뛰어나다고 생각했지, 해설에서 톨스토이의 부활이 소설의 형식면에서 내용에 압도당한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고 했을 때 소설의 작법을 너무도 모르구나 생각했다.


사랑 이야기가 주가 아니라고 시작하고 싶었지만, 결국엔 사랑이다. 내 사랑에도 지난 잘못을 속죄하기 위한 책임감의 한 일종으로 결혼을 선택한 점도 있지만, 사랑하는 이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둘러싸는 제도나 기대하는 타인의 시선에서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사랑이었던 카츄사의 타락을 본 네흘류도프가 사실은 자신의 각성과 속죄를 위해서지만 그녀를 위한다는 이유로 그가 태연이 속해왔던 그리고 안심하고 누려왔던 계급상, 제도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저항해가는 과정을 통해 종교, 토지 사유화, 법 제도 등 톨스토이가 비판하고 싶었던 세계들을 묘사한다.

네흘류도프가 마슬로프를 구하기 위해 상소를 하고 면회를 가며 교도소 내 갇힌 자들의 처우 및 상황을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사법제도의 근본에 의문을 삼았다. 토지 및 사유재산을 처리하며 농노제도를 언급한 부분은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레빈과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관점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톨스토이가 책을 쓴 목적이자 내내 근간이 되는 종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네흘류도프의 친구이자 원로원의 부검사장 셀레닌이 학습된 종교적 미신에서의 속박을 벗어나려 혼란스러워하는 장면과 책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이름 없는 노인이, 무교인 내가 그나마 종교의 관점을 가까이로 이해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톨스토이 개인의 부활은 가족과의 불화로 아름답게 끝내지는 못한 것 같지만, 모순을 깨닫고 각성하고 속죄하려 노력한 것은 그의 생애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 책을 종교적인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면 사법제도, 사유재산의 독점 등 톨스토이가 지적한 모든 종교 및 사회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현안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결과는 아닌지. 톨스토이가 마지막에 깨달은 대로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타인을 심판하고 벌주는 합법적 범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타락한 사람도 여전히 사랑하고 연민으로 보듬어주기 때문'이라는 말이 사실은 가장 어려운 조건이라 느끼는 건 내가 부정적인 탓일까.

 

 

 

 

원문:https://blog.naver.com/amy0116/221165273173

"네흘류도프는 이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 너무나도 단순명료하게 설명되자 되레 그 단순명료함을 인정하는 게 망설여졌다. 복잡한 사회 현상들의 원인을 그토록 끔찍하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정의와 선, 법과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모든 담론들이 그저 말뿐이고 추악한 사리사욕과 잔혹성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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