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의 영희 씨 창비청소년문학 70
정소연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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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옆집의 영희씨>는 정소연 작가가 적은 SF단편들을 묶은 단편집이다. 15편의 단편 중에서 세 편 (마산앞바다>, <처음이 아니기를>, <가을바람>)이 여성 퀴어 단편이다. 


<마산 앞바다>는 마산 바다에 열린 림보와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영혼의 얼굴들과 관련한 일들을 제시하면서, 벽장에 있던 주인공이 오픈리 퀴어 여자친구와 사귀게 되는 내용이다. 청소년 때의 퀴어 연애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서 더 좋았다. 


<처음이 아니기를>은 연애 서사보다도 결혼을 안하는 비혼 여성 퀴어의 정체성과 밀접한 내용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가을바람>은 행성 간 항해가 가능한 시대에, 자신과 시공간이 다른 곳에 사는 옛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후배와의 여성 퀴어 서사가 등장하는 단편이다. 


SF는 잘 모르면서도 막연히 좋아하고 있는 장르라서 SF장르 안에서 듣게 되는 퀴어 이야기는 훨씬 즐겁게 다가왔던 것 같다. 다만 한 편 한 편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기에 밀도 있는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느낌이 부족했던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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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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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나'와 내가 속해있는 여고에서 남자 아이돌을 따라 옷을 입는 '팬픽이반'(팬픽이반인 주인공의 친구), 그리고 그런 팬픽이반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게 된 연극부의 언니. 그 당시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나'는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퀴어이면서도 청소년일 때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나 퀴어 무리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혐오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은 퀴어들의 반응을 서치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소설에 공감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한 퀴어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소설을 싫어했다. 물론 모든 퀴어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살다 보면 주입받게 되는 호모포비아적인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이 주인공이 취하는 호모포빅한 태도가 아예 납득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중학생때, 속해있던 기독교 집단이 말하는 '동성애는 죄이다'라는 논리에 반박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소설 속 '나'가 그 언니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어른이 되고 나면 책임지고 싶어 하는 충성심에 가까운 사랑은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해 본 적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팬픽 이반'이라고 명명되는 집단에 대해서는 아직 더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1세대 아이돌과 함께 시작해서, 신화창조 때까지 이어져 온 집단이다. 좋아하는 남성 아이돌을 코스프레 했고, 이들을 좋아하는 (헤테로거나 헤테로에 가까운) 여성 추종자 집단이 있었고, 그 여성들과 (아이돌 멤버로서?) 연애를 했고, 장소를 대여해서 집단으로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다. 이후 퀴어 집단에서는 '팬픽이반'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혐오 표현에 가깝게 사용되었다. 한때 퀴어였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헤테로 연애를 하는 '가짜 퀴어' 처럼 일컬어 졌던 것이다. 현재는 팬픽 이반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항구의 사랑>이후에도 팬픽 이반을 다룬 여러 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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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책 쏜살 문고
토베 얀손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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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책>에서 인물들은 한 섬(그리고 다른 섬)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다른 낯선 지역으로 떠나며 여행하는 모험담과는 거리가 있다. <여름의 책>은 주로 할머니와 손녀 소피아가 주축이 되어 벌어지는 일로, 등장하는 인물에 제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가족 관계에 익숙한 독자가) 얼핏 보기에는 할머니-손녀라는 수직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여름의 책>은 이런 제약을 껴안으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삶의 경험이 더 풍부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게 배움을 전수할 필요는 없다. 서로 간에 어떤 차이가 얼마나 있든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은 그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로 지낸다.


 

 

 

 

 

 

 

<여름의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바다 수영을 좋아하고, 조각을 하고, 젊을 때는 걸스카우트 지도자여서 핀란드에서 여자들끼리 하는 캠핑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사람이다. 잠수와 관련한 둘의 대화를 잠깐 보고 가자.


 

 

 

 

 

(손녀 소피아) “잠수하면 어떤지 알아?”


 

할머니가 대답했다.


 

“물론 알지. 다 잊어버리고 뛰어들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다리에 물풀이 느껴지는데, 밤색이지. 물은 맑은데, 머리 위는 환하고 공기 방울도 생기지. 미끄러져 들어가는 거야. 숨을 참고 미끄러져 들어가서는 몸을 돌려서 다시 올라오지. 밖으로 올라와서 숨을 내쉬어. 그러고는 물에 떠 있어. 그냥 떠 있는 거야.”


 

 

 

 

 

<여름의 책>은 이처럼 육체를 통해 느끼는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섬의 자연은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곳인 동시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자연이 계속해서 다른 일들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은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신에서도 일어나며, 정신이 그대로 물리적인 물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피아가 할머니에게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저기 저 풀밭 같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둘은 길가의 풀밭을 지나가다가 서서 바라보았다. 더운 날이었다. (...) 멀리서 농기계 소리가 평화롭게 계속 들려왔다. 기계 소리를 지우고-그건 별일도 아니었다.-귀를 기울이면, 수억 마리 벌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여름의 황홀한 파도로 온 세상을 채울 수 있었다.]


 

 

 

 

 

평화와 황홀은 청각으로 감각된다.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 지금 볼 수 없는 곳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 펼쳐진 풀밭이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도 일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주인공들은 무수한 실패와 우연이 만들어낸 불가능 속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사랑하는 일. 왜 고양이에게는 사랑을 주는 만큼 돌려받지 못할까?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관심 없는 고양이는 나를 좋아할까?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의 책>은 토베 얀손이 쓴 작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소피아에게는 앞으로도 무수한 여름이 앞에 남아 있을 테지만, 할머니는 어느 여름이 마지막 여름이 될지 모른다. 다음은 할머니의 친구 베르네르의 말.


 

 

 

[ “여름이 끝나 갈 때, 나이가 들어 마지막 풍경을 경험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행복한 일이지. 주위는 조용해지고 우리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걷는데, 그러다가 온 세상이 평화로운 저녁 무렵에 바닷가에서 만나는 거야.”]


 

 

 

누군가가 기억하는 마지막 풍경이 행복한 일, 평화로운 저녁 무렵의 일이라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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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일공일삼 5
윌리엄 스타이그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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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미니크>. <도미니크>는 이렇게 시작한다: "넘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늘 무슨 일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개가 있었다." 도미니크는 무엇을 찾아 떠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를 알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모험을 시작한다.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남겨놓고. 도미니크에게는 마법을 부리는 능력도, 남들보다 더 강한 힘도 없다. 하지만 악한 일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도미니크를 따라 올 동물 친구들이 없다. 이런 도미니크의 모험은 순전한 우연들, 그리고 다른 동물 친구들을 만나는 일에 의해 이어진다.


 

 

 

 

 

책의 초반부에서 안 가보면 안 될 것 같은 집을 발견한 도미니크는 그 집에 살고 있는 돼지 배저를 만난다. 도미니크의 피콜로 연주, 그리고 조건 없이 베풀어 준 친절에 마음이 움직인 배저는 자신의 유산을 도미니크에게 물려준다. 동화 속에서 죽음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 동화 속에서 죽음이 다루어져도 되나? 그런 의문을 갖고 책을 다시 들여다봤다. 배저의 죽음으로 도미니크는 잠시 여정을 멈춘다. 멈춰선 도미니크는 삶의 필멸성에 대해,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있는 슬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갑자기 사는 게 너무 서글퍼졌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슬픔이 밀려들자 그 아름다움도 빛을 잃었다. 슬픔이 물러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얼굴을 드러내겠지. 아름다움과 슬픔은 서로 아주 다르면서도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듯했다.]


 

 

 

 

 

충분한 애도를 마치고 나서 도미니크는 슬픔의 자리에서 떠나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세상으로 뛰어든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재산이 생겼으니 그 곳에서 모험을 중단해도 될 법도 한데, 도미니크는 계속해서 길을 걸으며 자신이 거저 받은 유산을 길에서 만난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거저 나누어 준다. 나누어 주는 것, 함께 기쁨을 향유하는 게 이 책의 핵심에 놓인 가치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 책은 돈=기쁨이라는 도식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한다. 가령 도미니크가 이 모든 보물을 짊어지기 어려워서 길에서 만난 당나귀 엘리야에게 짐을 부탁하는데, 짐을 조금 옮겨 보던 당나귀는 자신이 보석을 얻어 부자 되는 것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음을 깨닫고 게으름을 부리기 위해 일을 포기한다. 도미니크도 보석을 잃어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지키는 일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


 

 

 

 

 

짐을 옮기기 위해 또 다른 동물 친구 레뮤엘을 만난 도미니크는 거북이 레뮤엘의 삶과 그 삶의 속도를 지켜보며 삶이란 것이 서로 서로에게 얼마나 다를 수 있는 건지 체감하기도 한다.


 

"때로 레뮤엘은 한 자리에 하루 꼬박 가만히 머물러 있기도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의문도 품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다." 도미니크는 때로는 오리 가족을 만나며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향유하는 법을 알게 되기도 한다. 걷기, 헤엄치기, 날기가 한 존재에게 얼마나 다른 의미를 갖는지. 그러면서 도미니크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애정을 느껴"간다.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걷는 게 좋아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갖가지 걸음걸이가 있지요. 예를 들어, 걱정거리가 있을 때는 좁은 데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좋아요. (...)나는 테니스 치는 것도 좋아해요. 물론 그건 발을 써서 하는 운동이지요. 뜰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밖에도 땅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물은 느낌이 좋아요. 심지어 차가울 때도 좋아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헤엄을 치면 참 기분이 좋아져요. 다리가 없는 곳에서 물을 건너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고요. (...)"


 

"깊이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걷는 것이 헤엄을 치는 것보다 더 좋아요. 하지만 하릴없이 공상에 잠길 때는 헤엄을 치는 것이 더없이 멋지답니다. 나는 물살에 몸을 내맡기고 물결이 부드럽게 물가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꿈을 꾸며 떠있기를 좋아해요. 어떤 꿈을 꾸든지 상관없어요. 물 위에 떠 있으면 마음이 참 평화로워져요. 신경이 날카롭거나 여러 가지 일로 걱정이 많아질 때, 낙심하거나 화가 날 때면, 어디서든 물을 찾아가서 헤엄을 쳐요. 그러면 마음에 위로가 되지요. (...)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아요. (...)"


 

"하늘을 날 때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요. 새를 잡아먹는 맹금에게 쫓기지만 않는 다면요. 하늘을 날 때는 리듬이 있어요. 우주의 리듬에 내 몸을 맞추는 것이지요. 하늘에서는 나 자신이 우주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날아 올라가면, 나를 창조한 분께 가까이 간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지요. 그리고 죽은 우리 남편을, 고이 잠든 그 영혼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게 돼요.(...)"]


 

 

 

 

 

이렇게 도미니크는 마음 좋은 동물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악당과 맞서 싸우기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가 원했던 삶을 찾아 나선다. 물론 <도미니크>는 완벽한 모험담은 아니다. 결말부분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의 테마를 빌려온, 여름만 있는 낙원에서 잠자고 있는 다른 (여성) 강아지를 깨우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아쉽다. 그렇지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일이 있다면 이 둘은 이 낙원에 머물지 않고, 동료로써 또 다른 모험을 향해 낙원을 떠난다는 사실이다.


 

 

 

 

 

<도미니크>를 읽고 나서는 걸으며 새로운 장소를 만나는 게 모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사람(동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이 누군지 깊게 이해해가는 과정이 모험이 될 수도 있겠구나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도미니크>는 정신으로 향해 떠나는 사색적인 모험담인 동시에, 한 자아가 홀로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의 성숙을 다룬 모험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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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의 묘약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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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와 여름, 여름의 장소>


 

 

레이 브래드버리를 읽는다. 브래드버리의 가장 잘 알려진 소설 가운데 하나일 <화씨 451>은 몇 해 전 여름에 읽었는데, 이 소설이 특별히 흥미롭지는 않았기에 좋아하는 작가가 될 줄 몰랐다. 그러다 재작년 겨울 장편 소설 <민들레 와인>을 읽고 나서는 곧바로 브래드버리의 팬이 됐다. 이번 여름에는 브래드버리의 단편 모음집 <멜랑콜리의 묘약>을 읽었다. 한 권짜리 단편집인데 편수가 많아서 한국에서는 <멜랑콜리의 묘약>과 <온 여름을 이 하루에>로 나뉘어 번역되어 있다.


 

브래드버리 하면 생각나는 단어는 여름. 아마도 브래드버리는 여름을 누구보다 깊게 사랑했으며, 여름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여름을 생각하며 보냈던 사람 같다. <멜랑콜리의 묘약>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단편들은 꼭 여름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처럼 느껴진다.


 

(이 단편집 한 편에서만도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여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여름 피서를 가게 된 조지가 자신이 사랑하는 화가를 모래사장에서 만나게 되는 <어느 잔잔한 날에>, 여름 해질녘을 배경으로 체격이 같은 사람들이 멋진 양복 한 벌을 돌려 입으며 벌어지는 소동이 그려지는 <멋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색 양복>, 다락방에서 자신이 살아 온 여름들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 사막 한 가운데의 호텔에서 뙤약볕 아래 살아가는 투숙객들이 나오는 <영원히 비가 내린 날>, 7년 동안 내리는 빗속에서 태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잔혹한 이야기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여름날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전차가 그려지는 <마지막 전차 여행> 등.)


 

이 단편들 중에서도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의 다락방, <영원히 비가 내린 날>의 사막 호텔과 <마지막 전차 여행>의 전차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한국의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다락방이 없고, 나도 다락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락방에 대해 어떤 종류의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로 들린다. <하이디>에서는 묵을 곳이 없는 하이디에게 할아버지가 다락방에 짚을 깔아 침대를 만들어주고, 다락에서 하이디가 보는 별이 가득한 밤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던 기억이 난다. 최근 봤던 공포 영화에서 다락방은 무서우면서도 결정적인 사건이 마지막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의 다락방으로 한 번 떠나보자.


 

"당신은 다락방이 뭔지 알아? 다락방이란 타임머신 같은 거야. 거기 있으면 나 같이 늙고 어리석은 사람도 4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일 년 내내 여름철이고 아이스크림 장수의 수레 주위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던 그때로 말이야."


 

다락방에 쌓여있는 물건들은 어떻게 보면 세월을 건너오면서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다. 다락방에 다시 들어가는 순간 내 앞에 도착한 과거의 시간. 사람들 대부분이 옛 추억이 담긴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자 하는 것도 이 물건들이나 사진들을 남겨두는 행동은 지나간 시간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 중 하나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단편 속에서는 다락을 "그곳의 분위기 자체가 '시간'인 곳"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 중에서도 여름을 특별히 사랑한 윌리엄은 다락방에서 엉뚱한 착상 속으로 이끌린다.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세월 사이를 달려간다면, 한 해와 한 해 사이를 오가면서 일주일은 1909년을 살고 또 하루는 1900년을 살고 한 달이나 보름 정도는 1905년이나 1898년의 어디쯤에서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은 평생 여름을 살아갈 수 있어."


 

여름만 살기.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아마도 이전에 들었다면 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른 계절 속에서 여름을 생각하며 보내는 일, 봄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는 일들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기 때문에 이런 제안이 들어와도 거절할 것 같다.


 

 

<영원히 비가 내린 날>은 사막에 있는 호텔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사막과 더위가 불러일으키는 무더운 이미지, 더위만으로도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미지에 충실하다. 사막의 호텔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중 생각나는 창작물은 정말 좋아하는 만화 <호텔 아프리카>, 그리고 호텔 아프리카 이전에 나왔던 영화인 <바그다드 카페(이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한다)>. 이 단편에서 주인공들은 에어컨이 없는 열약한 호텔에서 일 년 중 하루, 비가 아주 거세고 시원하게 오는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왜 일 년 중 하루만, 그리고 딱 그 날에만 비가 오느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안에는 터무니없고 설명되지 않지만 절대적인 사건이 있지 않은가. 그 같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범위를 한 사람에서 여러 사람으로 태연하게 확대해 놓은 것이 브래드버리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비는 약속을 어긴다. 그렇지만 비대신, 비보다 더 인간적이고 우아한 또 다른 기쁨이 이들을 찾아온다.


 

 

 

<마지막 전차 여행>은 제목이 스포일러인 경우. 정말로 전차가 운행되는 마지막 날의 전차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애틋한 이야기다. 전차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도시에서 전차가 다녔던 걸 옛날 영화들을 통해서 알았다. 전차를 배경으로 한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은 영화 같게도 영화를 찍은 바로 그 날이 전차가 운행을 하던 마지막 날이었다고. 부산을 걸어 다니다 보면 군데군데 전차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길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를테면 중앙동의 40계단 밑에 있는 거리들에 남아있는 전찻길.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눈으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기만 하고, 이 길 위에 전차가 다녔다는 걸 상상으로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그렇게 얘기만 듣고 영화만 봤던 전차를 원 없이 타본 건 홍콩에서의 일이었다. 홍콩은 아직 2층 전차들이 지나다니고 있고, 대개 그 구간을 지나는 가장 저렴하면서 빠른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전차를 애용한다. 아주 낡은 전차도 있는 반면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티가 나는 전차들도 있다. 기관사들은 모두가 남성들인 게 아니어서, 여성 기관사님이 몬 전차를 탄 날에는 왠지 신났다. 전차를 타보지 못하고 그려보기만 했던 시간이 긴 탓일까 막상 전차를 타고 나서는 내가 전차를 타고 있다는 것에 적응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전차가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동안 시간 역시 흐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체험되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다른 교통수단을 타도, 타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만큼 교통수단이 더 멀리 나아가는 건 매한가지인데도. 전차를 타고 있는 동안 전차를 탄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주로 전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사진 찍으며 보냈고, 어떻게든 전차에 내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실감시키려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정말 전차를 좋아하는구나 깨닫기도 하고.


 

 

전차를 잘 모른 채로 사랑하는 나도 '전차의 마지막 운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슬픔이 차오르는데, 전차와 함께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전차와 맞게 되는 작별이란 얼마나 슬플까. 이런 슬픔과 대조되듯 소설 속에는 눈부신 여름날의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전차는 마법에 걸린 증기 오르간처럼 서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전차가 놋쇠 냄새를 풍기는 동안 아이들은 잘 익은 체리를 먹었다. 아이들 옷에 스민 밝은 전차의 향기가 여름 바람을 타고 멀리 퍼졌다."


 

"전차는 아이스크림 가게 안처럼 고요하고 시원하고 어두웠다. 아이들은 연한 초록색 벨벳 천이 바스락대도록 조용히 의자를 돌렸다. 그리고 고요한 호수와 버려진 야외음악당과 해변을 따라 걸을 때면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실로폰 같은 산책로를 등지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문장들 앞에서 무슨 수로 여름날 떠오르는 풍경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물질적인 전차는 마지막으로 운행되지만, "다시 꿈이 시작되면서 전차는 땅속 깊이 숨겨진 철로를 따라 어딘가 묻혀 있는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나리라."


 

 

소개한 세 편의 이야기 외에도 <멜랑콜리의 묘약>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포칼립스 이후, 혹은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레이 브래드버리 본인은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듯 평생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 기차만 타며 여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게 많은 사람이 왜 항상 폐허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은 아포칼립스 이후,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은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나서도 삶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재밌기도 하지만, 삶이 상실된 자리에서도 삶이 계속될 수 있으리라는 바람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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