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책 쏜살 문고
토베 얀손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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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책>에서 인물들은 한 섬(그리고 다른 섬)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다른 낯선 지역으로 떠나며 여행하는 모험담과는 거리가 있다. <여름의 책>은 주로 할머니와 손녀 소피아가 주축이 되어 벌어지는 일로, 등장하는 인물에 제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가족 관계에 익숙한 독자가) 얼핏 보기에는 할머니-손녀라는 수직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여름의 책>은 이런 제약을 껴안으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삶의 경험이 더 풍부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게 배움을 전수할 필요는 없다. 서로 간에 어떤 차이가 얼마나 있든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은 그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로 지낸다.


 

 

 

 

 

 

 

<여름의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바다 수영을 좋아하고, 조각을 하고, 젊을 때는 걸스카우트 지도자여서 핀란드에서 여자들끼리 하는 캠핑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사람이다. 잠수와 관련한 둘의 대화를 잠깐 보고 가자.


 

 

 

 

 

(손녀 소피아) “잠수하면 어떤지 알아?”


 

할머니가 대답했다.


 

“물론 알지. 다 잊어버리고 뛰어들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다리에 물풀이 느껴지는데, 밤색이지. 물은 맑은데, 머리 위는 환하고 공기 방울도 생기지. 미끄러져 들어가는 거야. 숨을 참고 미끄러져 들어가서는 몸을 돌려서 다시 올라오지. 밖으로 올라와서 숨을 내쉬어. 그러고는 물에 떠 있어. 그냥 떠 있는 거야.”


 

 

 

 

 

<여름의 책>은 이처럼 육체를 통해 느끼는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섬의 자연은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곳인 동시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자연이 계속해서 다른 일들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은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신에서도 일어나며, 정신이 그대로 물리적인 물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피아가 할머니에게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저기 저 풀밭 같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둘은 길가의 풀밭을 지나가다가 서서 바라보았다. 더운 날이었다. (...) 멀리서 농기계 소리가 평화롭게 계속 들려왔다. 기계 소리를 지우고-그건 별일도 아니었다.-귀를 기울이면, 수억 마리 벌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여름의 황홀한 파도로 온 세상을 채울 수 있었다.]


 

 

 

 

 

평화와 황홀은 청각으로 감각된다.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 지금 볼 수 없는 곳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 펼쳐진 풀밭이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도 일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주인공들은 무수한 실패와 우연이 만들어낸 불가능 속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사랑하는 일. 왜 고양이에게는 사랑을 주는 만큼 돌려받지 못할까?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관심 없는 고양이는 나를 좋아할까?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의 책>은 토베 얀손이 쓴 작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소피아에게는 앞으로도 무수한 여름이 앞에 남아 있을 테지만, 할머니는 어느 여름이 마지막 여름이 될지 모른다. 다음은 할머니의 친구 베르네르의 말.


 

 

 

[ “여름이 끝나 갈 때, 나이가 들어 마지막 풍경을 경험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행복한 일이지. 주위는 조용해지고 우리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걷는데, 그러다가 온 세상이 평화로운 저녁 무렵에 바닷가에서 만나는 거야.”]


 

 

 

누군가가 기억하는 마지막 풍경이 행복한 일, 평화로운 저녁 무렵의 일이라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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