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의 묘약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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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와 여름, 여름의 장소>


 

 

레이 브래드버리를 읽는다. 브래드버리의 가장 잘 알려진 소설 가운데 하나일 <화씨 451>은 몇 해 전 여름에 읽었는데, 이 소설이 특별히 흥미롭지는 않았기에 좋아하는 작가가 될 줄 몰랐다. 그러다 재작년 겨울 장편 소설 <민들레 와인>을 읽고 나서는 곧바로 브래드버리의 팬이 됐다. 이번 여름에는 브래드버리의 단편 모음집 <멜랑콜리의 묘약>을 읽었다. 한 권짜리 단편집인데 편수가 많아서 한국에서는 <멜랑콜리의 묘약>과 <온 여름을 이 하루에>로 나뉘어 번역되어 있다.


 

브래드버리 하면 생각나는 단어는 여름. 아마도 브래드버리는 여름을 누구보다 깊게 사랑했으며, 여름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여름을 생각하며 보냈던 사람 같다. <멜랑콜리의 묘약>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단편들은 꼭 여름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처럼 느껴진다.


 

(이 단편집 한 편에서만도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여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여름 피서를 가게 된 조지가 자신이 사랑하는 화가를 모래사장에서 만나게 되는 <어느 잔잔한 날에>, 여름 해질녘을 배경으로 체격이 같은 사람들이 멋진 양복 한 벌을 돌려 입으며 벌어지는 소동이 그려지는 <멋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색 양복>, 다락방에서 자신이 살아 온 여름들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 사막 한 가운데의 호텔에서 뙤약볕 아래 살아가는 투숙객들이 나오는 <영원히 비가 내린 날>, 7년 동안 내리는 빗속에서 태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잔혹한 이야기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여름날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전차가 그려지는 <마지막 전차 여행> 등.)


 

이 단편들 중에서도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의 다락방, <영원히 비가 내린 날>의 사막 호텔과 <마지막 전차 여행>의 전차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한국의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다락방이 없고, 나도 다락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락방에 대해 어떤 종류의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로 들린다. <하이디>에서는 묵을 곳이 없는 하이디에게 할아버지가 다락방에 짚을 깔아 침대를 만들어주고, 다락에서 하이디가 보는 별이 가득한 밤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던 기억이 난다. 최근 봤던 공포 영화에서 다락방은 무서우면서도 결정적인 사건이 마지막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사르사 뿌리 음료수 냄새>의 다락방으로 한 번 떠나보자.


 

"당신은 다락방이 뭔지 알아? 다락방이란 타임머신 같은 거야. 거기 있으면 나 같이 늙고 어리석은 사람도 4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일 년 내내 여름철이고 아이스크림 장수의 수레 주위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던 그때로 말이야."


 

다락방에 쌓여있는 물건들은 어떻게 보면 세월을 건너오면서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다. 다락방에 다시 들어가는 순간 내 앞에 도착한 과거의 시간. 사람들 대부분이 옛 추억이 담긴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자 하는 것도 이 물건들이나 사진들을 남겨두는 행동은 지나간 시간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 중 하나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단편 속에서는 다락을 "그곳의 분위기 자체가 '시간'인 곳"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 중에서도 여름을 특별히 사랑한 윌리엄은 다락방에서 엉뚱한 착상 속으로 이끌린다.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세월 사이를 달려간다면, 한 해와 한 해 사이를 오가면서 일주일은 1909년을 살고 또 하루는 1900년을 살고 한 달이나 보름 정도는 1905년이나 1898년의 어디쯤에서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은 평생 여름을 살아갈 수 있어."


 

여름만 살기.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아마도 이전에 들었다면 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른 계절 속에서 여름을 생각하며 보내는 일, 봄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는 일들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기 때문에 이런 제안이 들어와도 거절할 것 같다.


 

 

<영원히 비가 내린 날>은 사막에 있는 호텔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사막과 더위가 불러일으키는 무더운 이미지, 더위만으로도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미지에 충실하다. 사막의 호텔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중 생각나는 창작물은 정말 좋아하는 만화 <호텔 아프리카>, 그리고 호텔 아프리카 이전에 나왔던 영화인 <바그다드 카페(이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한다)>. 이 단편에서 주인공들은 에어컨이 없는 열약한 호텔에서 일 년 중 하루, 비가 아주 거세고 시원하게 오는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왜 일 년 중 하루만, 그리고 딱 그 날에만 비가 오느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안에는 터무니없고 설명되지 않지만 절대적인 사건이 있지 않은가. 그 같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범위를 한 사람에서 여러 사람으로 태연하게 확대해 놓은 것이 브래드버리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비는 약속을 어긴다. 그렇지만 비대신, 비보다 더 인간적이고 우아한 또 다른 기쁨이 이들을 찾아온다.


 

 

 

<마지막 전차 여행>은 제목이 스포일러인 경우. 정말로 전차가 운행되는 마지막 날의 전차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애틋한 이야기다. 전차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도시에서 전차가 다녔던 걸 옛날 영화들을 통해서 알았다. 전차를 배경으로 한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은 영화 같게도 영화를 찍은 바로 그 날이 전차가 운행을 하던 마지막 날이었다고. 부산을 걸어 다니다 보면 군데군데 전차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길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를테면 중앙동의 40계단 밑에 있는 거리들에 남아있는 전찻길.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눈으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기만 하고, 이 길 위에 전차가 다녔다는 걸 상상으로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그렇게 얘기만 듣고 영화만 봤던 전차를 원 없이 타본 건 홍콩에서의 일이었다. 홍콩은 아직 2층 전차들이 지나다니고 있고, 대개 그 구간을 지나는 가장 저렴하면서 빠른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전차를 애용한다. 아주 낡은 전차도 있는 반면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티가 나는 전차들도 있다. 기관사들은 모두가 남성들인 게 아니어서, 여성 기관사님이 몬 전차를 탄 날에는 왠지 신났다. 전차를 타보지 못하고 그려보기만 했던 시간이 긴 탓일까 막상 전차를 타고 나서는 내가 전차를 타고 있다는 것에 적응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전차가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동안 시간 역시 흐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체험되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다른 교통수단을 타도, 타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만큼 교통수단이 더 멀리 나아가는 건 매한가지인데도. 전차를 타고 있는 동안 전차를 탄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주로 전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사진 찍으며 보냈고, 어떻게든 전차에 내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실감시키려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정말 전차를 좋아하는구나 깨닫기도 하고.


 

 

전차를 잘 모른 채로 사랑하는 나도 '전차의 마지막 운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슬픔이 차오르는데, 전차와 함께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전차와 맞게 되는 작별이란 얼마나 슬플까. 이런 슬픔과 대조되듯 소설 속에는 눈부신 여름날의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전차는 마법에 걸린 증기 오르간처럼 서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전차가 놋쇠 냄새를 풍기는 동안 아이들은 잘 익은 체리를 먹었다. 아이들 옷에 스민 밝은 전차의 향기가 여름 바람을 타고 멀리 퍼졌다."


 

"전차는 아이스크림 가게 안처럼 고요하고 시원하고 어두웠다. 아이들은 연한 초록색 벨벳 천이 바스락대도록 조용히 의자를 돌렸다. 그리고 고요한 호수와 버려진 야외음악당과 해변을 따라 걸을 때면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실로폰 같은 산책로를 등지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문장들 앞에서 무슨 수로 여름날 떠오르는 풍경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물질적인 전차는 마지막으로 운행되지만, "다시 꿈이 시작되면서 전차는 땅속 깊이 숨겨진 철로를 따라 어딘가 묻혀 있는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나리라."


 

 

소개한 세 편의 이야기 외에도 <멜랑콜리의 묘약>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포칼립스 이후, 혹은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레이 브래드버리 본인은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듯 평생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 기차만 타며 여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게 많은 사람이 왜 항상 폐허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은 아포칼립스 이후,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은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나서도 삶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재밌기도 하지만, 삶이 상실된 자리에서도 삶이 계속될 수 있으리라는 바람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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