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고통
스티븐 체리 지음, 송연수 옮김 / 황소자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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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는 뱃속에 깊이 박힌 창과 같아서 내장을 다치지 않게끔 창을 빼려면 신중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무리해서 빼내려 한다면 더 큰 상처를 입고야 말 것이다. 용서 또한 마찬가지다.

 

  피해자는 범인이 잡혔다 하더라도 심각한 죄의식과 굴욕감에 시달린다. 자아정체성이 흔들리고,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관계'의 핵심인 신뢰가 깨지면서 자존감마저 손상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분노해서도 안된다. 분노는 카타르시스적 감정을 주어 당장은 정화와 치유 효과가 있지만, 지나칠 경우 그 순간에만 집중시켜 전체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분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주는 표식이기도 하다. 분노의 정당성을 자신의 부조리한 행동의 합리화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용서란 현명한 행동일까. 과정에 따라 다르다. 상대의 뉘우침 없이는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용서를 쉬운 해결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 하여 도덕적 흠결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용서가 종결을 말하지도 않는다. 용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노력이다. 상대와 나의 이해와 공감이 동반된 긴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이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서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굴레에 계속 얽매여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결코 미래로 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직자이지만, 오히려 성직자이기에 더욱 객관적인 글을 적어주어 감사하다.

 

 

 

심각한 상처를 입으면 무감각 상태에 빠진다. 용서를 일구어낼 인지능력조차 결여된 황무지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만 용서도 가능하다. 억지로 강요된 용서는 용서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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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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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낯선 사건보다 낯익은 일상을 접할 때 쉽게 이해하고 공감한다. 최근일자의 신문기사가 이해하기 쉬운 건 당연하다. 그런데 어째서 낯선 사건이어야 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기록이 이리도 낯익게 느껴지는 걸까.

 

17p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23p “우연히 객차의 이쪽 문으로 내린 사람은 수용소로 들어갔고 다른 쪽 문으로 내린 사람은 가스실로 향했다.”

186p “그들 중 우리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에게 우리는 카체트’, 중성 단수 명사일 뿐이다.”

268p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는 내내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상황, 들은 것 같은 대사, 느껴본 것 같은 울분이 머리를 스쳤다.

 

키우는 개도 내보내지 않을 날씨에 밖으로 나오는 그들과 생식독성물질을 사용하는 반도체 사업장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겹쳐 보였다.

도둑질이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되는 그곳과 탈세가 정상적인 경영 행위로 간주되는 이곳이 겹쳐 보였다.

자기절제와 양심이 결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결함들 덕분에 살아가는 그와 그런 결함들 덕분에 자본을 긁어모으는 이가 겹쳐 보였다.

실험실의 그녀들과 월가의 시위를 웃으며 바라보는 이들이 겹쳐 보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은 마치 비뚤어진 자본주의의 원형 같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쟁이 끝나면서 박물관으로 탈바꿈했지만, 비뚤어진 자본주의는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이에 대해 충고한다. 괴물은 존재하지만 소수에 불과하여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걸, 사람을 사물이 아닌 인간으로 보고자 하는 의지를 놓지 말아야 한다는 걸 말이다.

 

사실 <이것이 인간인가>는 두 가지 질문을 내포한다. 하나는, 군림하는 자를 향한 질문이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또 하나는, 복종하는 자를 향한 질문이다. 만행 속에서 생각할 기운조차 없는 이들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그 질문은 방향을 바꾸어 나를 겨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인가.

 

우리에게는 아직 신체적 자유가 있으며, 생각할 여유가 있다. 그러나 신체적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고, 생각할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인간인가>. 이제는 대답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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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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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는 책보다 BBC의 다큐멘터리로 먼저 접했는데, 세련된 그래픽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에 푹 빠져 버렸다. 책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큐멘터리를 먼저 본 것이 과학 이론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책에서 얻는 것은 단지 천체 이론만이 아니다.

 

코스모스를 접하기 쉬운 이유는 이 책이 과학도서라기보다 칼 세이건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최고의 과학 입문서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저자의 우주에 대한 애정이 책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정말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쓴 책을 읽으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전달되는데 이 책이 그러했다. 머리말에서, 과학 영상물을 촬영하는 동안 군사활동의 방해를 받았던 경험 이후 책과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군사 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들을 빼놓지 않고 다루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진짜 해버렸잖아, 이 사람.’이라기보다 그 말에서 과학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칼 세이건은 첨단 과학 기술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이 건전한 시민으로 성숙하는 데에는 효율적인 과학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필요하다.

 

첫 번째로 과학은 본질적으로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과학은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관에서 풀려나야 더욱 총체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통섭형 인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미술과 철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과학 역시 과학 이외의 문화 활동과 격리되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유독 그 부분을 공감하게 만드는 내용이 많다. 학생 시절 심드렁하게 외웠던 케플러의 법칙에서 감동을 느끼게 될 줄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케플러의 법칙이 어떤 선입견과 사회적 압박을 극복하고 어떤 검증을 통해 발견되었는지를 알았다면 그 법칙을 단순히 시험문제로만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은 우주 탐사의 절대 이정표가 되었다. 과학자는 진리를 밝히는 사람일지는 모르나, 정작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시인이라는 말에 공감해 본다.

 

두 번째로 과학은 인간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우주를 떠올리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성인이 된 이후 한없이 겸허해지는 경험이 얼마나 될까. 자연마저 정복했다고 믿는 인간을 미시적 존재로 놓아둘 만한 비교대상이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칼 세이건은 미시적 세계 역시 거시적 세계를 탐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여 오만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지구 생명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이라고 칼 세이건은 말한다.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온실 효과의 폭주로 금성의 표면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환경오염과 핵전쟁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다. 만약 이 작은 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역사를 살핀다면 외계인은 인류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주를 통해 우리를 본다. 그것은 책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과 비슷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 독서의 즐거움과 퍽 닮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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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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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는 모두가 당연히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일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상사의 명령에 직원이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 대답은 허무맹랑한 것을 넘어 분노를 유발한다. 일을 하거나 일을 그만두고 나가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당연한 세상에서 바틀비는 일을 하지 않고 나가지도 않는다는 세 번째 선택지를 꺼내놓는다.

 

글의 중반부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바틀비의 소극적 저항에 부딪친 화자의 대응이 우스꽝스럽다. 38p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라거나 50p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동정심은 때로 고통이다.”라고 하듯이 우유부단한 화자는 실질적 피해를 입기 전까지 바틀비를 내버려두다가 내쫓기는커녕 도망치듯 다른 건물로 이사해 버린다. 그러나 종반으로 가면 바틀비의 행위의 의미가 달라진다. 건물주와 세입자의 요청으로 설득하러 온 화자에게 바틀비는 나는 특별하지 않아요.”라며 여전히 그들의 요청대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화자보다 덜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신고로 구치소에 수감된 바틀비는 그곳에서 밥을 먹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숨을 거둔다.

 

바틀비의 행위를 처음에는 두 가지로 읽었다. 하나는 일반에서의 일탈을 통한 존재의 증명, 또 하나는 임계점을 넘어버린 존재의 자포자기이다. 전자는 바틀비에게 저항의지가 있다는 뜻이기에 생을 포기하는 결말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저항에 의미를 두는 자가 생을 포기할 리 없기 때문이다.

 

바틀비는 세상에서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위는 비존재로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일이었으리라.

 

동정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가 가장 마뜩치 않았던 점은 겉치레식으로 연민을 남발하고 끝까지 저는 깨끗한 곳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관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틀비가 불신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그마저의 연민조차 없는 이들보다 낫다는 점에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사회에 불만 없이 순응했을 뿐이다.

 

그러니 다만 바라게 된다. 부디 임계점을 넘기 전에 를 찾아내어 단단히 붙들고 있기를, 그리하여 비존재로서 행위하기보다 존재로서 행위하기를, 그것이 가능한 사회이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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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07
레오 리오니 글 그림, 최순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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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이 겨우내 먹을 양식을 모을 때 이야기를 모은다. 왜 일을 하지 않으냐고, 놀고 있는 거냐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식의 말에도 프레드릭은 꿋꿋하다. 이윽고 겨울이 와서 모아놓은 식량이 동나고 힘든 시기가 되자 그들은 프레드릭을 떠올린다. 프레드릭이 그들에게 모아놓은 이야기를 풀어놓자 그들은 힘든 상황을 잊고 행복해진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드디어 모두에게 인정받은 자리에서 프레드릭은 수줍게 말한다. “나도 알아.”

 

보통 이 글의 주제를 예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본다. 나 역시 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프레드릭과 들쥐를 객체가 아닌 자아로 바꿔놓고 보았을 때 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해야만 해!’라는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자아에게 하고 싶어.’라며 자유를 쟁취하려는 자아의 투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투쟁은 시인이라는 자아정체성의 획득으로 이어진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프레드릭은 이름 없는 들쥐가 아닌 프레드릭으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프레드릭은 제 존재 가치를 행위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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