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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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는 모두가 당연히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일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상사의 명령에 직원이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 대답은 허무맹랑한 것을 넘어 분노를 유발한다. 일을 하거나 일을 그만두고 나가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당연한 세상에서 바틀비는 일을 하지 않고 나가지도 않는다는 세 번째 선택지를 꺼내놓는다.

 

글의 중반부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바틀비의 소극적 저항에 부딪친 화자의 대응이 우스꽝스럽다. 38p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라거나 50p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동정심은 때로 고통이다.”라고 하듯이 우유부단한 화자는 실질적 피해를 입기 전까지 바틀비를 내버려두다가 내쫓기는커녕 도망치듯 다른 건물로 이사해 버린다. 그러나 종반으로 가면 바틀비의 행위의 의미가 달라진다. 건물주와 세입자의 요청으로 설득하러 온 화자에게 바틀비는 나는 특별하지 않아요.”라며 여전히 그들의 요청대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화자보다 덜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신고로 구치소에 수감된 바틀비는 그곳에서 밥을 먹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숨을 거둔다.

 

바틀비의 행위를 처음에는 두 가지로 읽었다. 하나는 일반에서의 일탈을 통한 존재의 증명, 또 하나는 임계점을 넘어버린 존재의 자포자기이다. 전자는 바틀비에게 저항의지가 있다는 뜻이기에 생을 포기하는 결말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저항에 의미를 두는 자가 생을 포기할 리 없기 때문이다.

 

바틀비는 세상에서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위는 비존재로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일이었으리라.

 

동정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가 가장 마뜩치 않았던 점은 겉치레식으로 연민을 남발하고 끝까지 저는 깨끗한 곳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관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틀비가 불신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그마저의 연민조차 없는 이들보다 낫다는 점에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사회에 불만 없이 순응했을 뿐이다.

 

그러니 다만 바라게 된다. 부디 임계점을 넘기 전에 를 찾아내어 단단히 붙들고 있기를, 그리하여 비존재로서 행위하기보다 존재로서 행위하기를, 그것이 가능한 사회이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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