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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사랑 - 김소진 마지막 짧은소설집
김소진 지음 / 솔출판사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날개 2003
요즘 나는 매일 키를 잰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장롱 옆에 난 좁은 공간이 키를 재는 은밀한 곳이다. 느즈막이 일어나 점심을 대충 차려 먹고는 책과 연필과 줄자를 가지고 좁은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벽면에 뒤꿈치와 엉덩이와 등을 바싹 붙이고는 힘껏 몸을 편다. 그대로 숨을 멎은 채 책을 모로 세워 벽면에 붙여 서서히 머리로 내린다. 그러고는 책모서리를 더듬어 연필로 표시를 한다. 살며시 바깥으로 나와서는 책 모서리를 표시에 대고 적당한 길이로 선을 긋는다. 그런 다음 줄자의 끝을 발로 밟고 그 길이를 잰다. 벽에 난 표시들은 마치 감방에 갇힌 죄수가 날짜를 계산한 것처럼 정성스럽게 보인다. 17층 감방에 갇힌 죄수의 소명이다.
집에 들어앉은 후 얼마 동안은 좁은 집안을 뒤지고 다녔다. 하루는 부엌을 뒤졌다. 혹시 아내가 숨겨둔 돈이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싱크대 이곳저곳을 열어보고 냉장고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다음날은 거실을 탐색했다. 장식장 서랍을 빼서 물건을 다 끄집어내기도 하고 신발장을 잡아당겨 바닥에 떨어진 게 없나 살펴보기도 했다. 또 다음날은 방을 살폈다. 의자를 높고 장롱 위를 훑기도 했고 장롱을 열고 옷에 난 주머니들을 뒤져보기도 했다. 침대 아래에 손을 디밀어 형사처럼 바닥을 쓸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자 이도저도 소용없었다. 집안은 상자만큼이나 좁아터져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모든 것을 점령해버렸다. 그러나 사실 내가 점령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공간은 서재로 쓰는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은 아내와 내가 쓰는 책상이 두 개 있었고, 창이 없는 양쪽 벽은 책장이 차지하고 있다. 진득하니 책상머리에 앉아 책이라도 읽어볼까 싶었지만 도무지 안정이 되지 않았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도 몰랐고 흥미를 끌 만큼 손 가는 책도 없었다. 책장에는 늘 보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마치 그 방에 있는 책들을 죄다 읽은 듯 시시하게만 보였다.
아내의 책상 위에는 첨보는 귀걸이가 있었다. 흑수정인 듯한 검은 보석이 달려 있는 촌스러운 귀걸이였다. 교정을 보다 만 원고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회사일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받아서 하는 일이었다. 언젠가 아내는 그 원고를 내게 내밀며 짬짬이 훑어보라고 했지만 머리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내는 야근이다 약속이다 하며 늦게 들어와서는 매일같이 그 원고를 잡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보라는 뜻인지 보다 만 부분이 펼쳐져 반듯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난 빨간색 플러스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아내가 이미 교정을 본 원고들을 들추며 이런저런 품평을 했다. 이따위 글을 써놓고 작가입네 하겠지, 이 작자는. 이건 ‘로서’가 아니라 ‘로써’를 썼어야지. 이 부분은 그럴듯하게 고쳤군. 이 제목 서체는 좀 촌스럽군. 자간을 더 주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시시콜콜 따지며 또 며칠을 보냈다.
이 짓도 시들해졌을 즈음 책장 위에 얹혀져 있는 두꺼운 사진첩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사진첩으로 손을 뻗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손끝조차 닿지 않았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서 사진첩을 집어 내렸다. 불현듯 이게 아니다 싶어 다시 책장 위로 손을 뻗어보았다. 기억대로라면 손끝은 윗모서리까지 닿아야 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까치발을 해야 닿을 수 있었다. 불이라도 난 듯 책과 줄자와 연필을 찾았다.
지금 내 키는 정확히 168센티미터이다. 석 달 전 처음 키를 재었을 때는 171센티미터이다. 작년 정기검진 받을 때 본 키는 176센티미터였으니까 무려 그 사이에 5센티미터나 줄어든 셈이다. 그리고 지난 석 달 사이에 3센티미터가 줄어든 셈이다. 은밀한 나의 벽면 기록계에 의하자면 한 달에 1센티미터씩 줄어들었다. 지난달부터는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매일 키를 잰다. 초등학생이 관찰일기를 쓰듯이, 죄수가 하루하루 시간을 계산하듯이.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뼈에 칼슘이 빠져나갈 나이도 아닌데 왜 키가 작아지는지 그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다. 미치겠다. 한동안은 자고 일어나면 배게 맡에 머리가 수북이 빠져 있어서 그게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키가 작아지는 증상 때문에 머리털은 빠지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작은 출판사에 다니는 아내는 매일 밤늦게 들어왔다. 혹은 밤늦게 나가곤 했다. 야근이다 중요한 약속이다 하며 늦게 들어왔다. 일찍 들어온 날도 작가라는 작자한테서 전화를 받으면 부리나케 나갔다. 하루는 새벽 두시가 다 되어서야 아내는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왔다. 다음날 부스스한 꼴로 나오는 아내를 보자마자 다그쳤다.
“당신 도대체 뭐야. 한밤중에 남자가 불러내서 나가더니 술이 떡이 되서 새벽에야 들어와?”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아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두시도 안 됐던데, 뭘. 그리고 중요한 작가였단 말이야. 원고 받는 일이 앉아서 되는 줄 알아?”
“뭐? 중요한 작가? 중요한 작가가 부르면 잠옷바람에라도 네 하고 뛰쳐나가야 되냐? 그런 일이라면 당장 때려쳐!”
대수롭잖다는 아내의 말투에 갑자기 뜨거운 것이 끓어올라 소리를 질러 버렸다.
아내는 퍼뜩 정신이 든 듯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뭐라고? 때려치라구? 때려치면, 때려치면 뭘 먹고 살 건데? 둘이서 벌어도 빠듯한데 나보고 때려치라고? 그래 둘이서 손가락 빨고 있으면 보기 좋겠다. 당신이야말로 도대체 뭐야.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회사 때려치고 지금 몇 달째 놀고 있는 거냐구!”
“내가 놀고 싶어서 놀아, 지금?”
“그 알량한 자존심 부려서 짐 싸서 나오더니 어디든 잘도 들어가겠다. 아니면 일이라도 해얄 거 아냐. 내가 시간나면 보라고 갖다논 원고는 손도 안 댔지? 남는 게 시간이면서 그거도 못 보냐. 그거도 당신 자존심에 걸리는 일이야? 아니면 게을러져서 일도 하기가 싫은 거야?”
“에이 씨...”
밤새 잠을 못 이뤄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담배갑을 채서 베란다로 내빼버렸다.
“담배라도 끊어서 담뱃값이라도 아끼든가!”
나는 모가지를 뒤로 틀어 아내를 노려보고는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아내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출근하자 잠이라도 잘까 싶어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지렁이 수백 마리가 꿈틀대는 듯했다.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 아내의 자리에 앉았다. 내 입을 틀어막아 버린 그 원고뭉치가 여전히 책상 위에 있었다. 미국의 심리학자가 에세이 형식으로 쓴 보고서였다. 출판사 쪽에서는 단순히 심리 에세이라는 말에 검토도 않고 출간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정신과 전문의가 에세이 형식으로 쓴 책이 주목을 받으면서 너도나도 심리 에세이 쪽 책을 출간하려는 마당이었다. 번역도 보름 만에 급하게 했다더니 역시나 엉망이었다. 외주를 맡긴 출판사 쪽에서는 불필요한 - 흥미를 떨어뜨리는 - 부분을 과감히 삭제해서라도 부담을 주지 않을 만한 230쪽 정도 분량이 되도록 주문을 한 모양이었다. 저자와 독자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책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아 버린 그 원고를 보기 시작했다. 아내가 앞서 본 그 수위에 맞추어 아무런 생각 없이 봐나갔다. 나흘 동안은 키 재는 일도 잊고 교정에만 매달렸다. 사흘 동안 아내는 유난히도 일찍 들어왔고, 오랜만에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여 저녁을 차렸으며, 일하는 내게 과일을 깎아 내오기도 했다.
교정을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원고를 털었다. 원고 뭉치를 챙겨서 아내가 있을 회사로 향했다. 아내가 다니는 회사로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서도 십여 분을 걸어야 한다. 회사와 꽤 떨어진 곳에 커피숖이 하나 있었다. 저기 들어가서 얼마 남지 않은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면 되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자고 하리라.
열려 있는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오른편 안쪽 구석진 곳에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 둘은 옆으로 바싹 붙어 앉아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손으로 여자의 반대편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때 여자의 귀에서 검은색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짧게 머리를 친 큰 머리의 사내도 눈에 익었다. 나흘 동안 꼬박 교정을 본 원고를 맡긴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커피숖에서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손에는 그 망할 원고 뭉치가 쥐어 있었다. 뭉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검은색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노려보며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줄자와 연필과 책을 들고 은밀한 공간으로 갔다. 평소보다 더 신중하고 느린 동작으로 키를 쟀다. 아주 정확하게 167센티미터였다.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눈금이 쳐진 벽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벌써 1센티미터가 줄어들었구나. 이번 달은 더 이상 키가 줄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남은 날 동안은 괜찮겠구나.
담뱃갑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과연 하늘이 높긴 높구나. 내 키가 줄어들수록 하늘은 점점 높아지겠구나. 귀가하는 차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발 밑은 점점 가까워지고 하늘은 점점 높아져갔다. 불현듯 베란다 난간을 괴고 있는 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 아니던가. 잊었던 내 번뇌와 열망이 되살아난다. 나는 까마득한 발 밑을 내려다보며 어디 한번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