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의 나라
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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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과 대동을 향한 노력
 

이 책이 출간된 1998년 4월은 김대중 씨가 그렇게도 바라던 대통령이 되어 첫발을 내딛던 때이다. 누구든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큰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이 바로 통합이다. 여야의 통합, 영호남의 통합, 남북의 통합, 빈부의 통합, 전 국민의 통합... 여기 조선 후기의 통합정책에 대한 역사적인 예가 있다. 당시 대통령이 이 책을 보았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당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으로 기억은 한다.

저자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행해진 탕평정치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본다. 붕당론, 군주론, 인물론, 탕평론 등으로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처지에서 각각을 끈기를 가지고 읽기란 인내를 요한다. 각 당파에 얽힌 인물들의 계보와 특징을 설명하는 인물론에서는 더욱 참아야 한다. 때문에 중간은 지루하다. 많은 사건들을 다루었으나 세세하게 앞뒤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지면상 제약도 있었겠다.

마지막에 다룬 탕평론만을 두고 보자. 이때의 탕평정치를 보는 견해는 세 가지가 있다. 자본주의 도입 전 단계의 절대군주제라는 절대군주제지향론, 군자당에 의한 통일되는 단계가 탕평이라는 성리학긍정론, 피지배층이 급격히 성장한 민중사학론 등이다. 이것들 말고도 탕평정치는 결국 시파와 벽파의 당쟁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당파싸움이었다는 시벽당쟁론이 있다. 저자는 이 견해는 당치도 않은 오류라고 못 박았다. 이는 식민통치 합리화론이라는 것이다. 우습게도 이 시벽파당쟁론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이 아니던가? 고등학교 때 이 시파와 벽파를 이렇게 외우라고 배웠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데에 다름이 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눈‘시’울이 뜨겁다 하여 시파, 완‘벽’하게 죽였다 하여 벽파라고 외웠던 것이다.

어쨌든 위의 세 가지 견해는 각각 한계를 가진다. 절대군주제지향론은 서구의 모델에 따라야 하는가라는 반발이 있다. 세계적 보편성과 우리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긍정론에 대해서는, 주자학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자성리학을 근대적 개혁사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무리가 따른다. 민중사학론으로 보자면 당시의 상황을 혁명을 통해 타도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했다는 불편함이 있다고 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근대 사회 통합의 역사 체험이 지닌 고유성과 보편성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이러한 통합 노력은 바로 18세기 탕평정치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치보다는 통치를 찾는 식민사관적인 후진국정치론은 타파해야 한다.” 즉 영정조의 탕평정치는 조선 사회 자체의 개혁과 통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성리학적 정치론을 넘어서려는 근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과 통합 정신을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서 본받아야 하며, 오늘날의 개혁은 사회 자체의 개혁이 아닌 한정된 개혁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영조와, 특히 정조가 추구한 탕평정치의 구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단지 붕당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화합을 꾀한 것이 아니다. 정치 원칙을 새로이 창조하여 군주권을 강화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은 당연 붕당간의 화합이었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이러한 당시의 탕평정치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여덟 가지 정치원칙도 친절히 제시하고 있다. 이는 학문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원칙을 창조하여 정치의 탕평을 이루어 사회의 대동으로 함께 가야 하고, 여론 수렴과 인재 등용의 방식을 잘 살피며, 정치 이념에 대해 시비론보다 우열론을 따라 세계화론과 자기정체성론을 잘 구별하여야 한다. 이로써 제대로 된 통치자론과 민중사상을 세우고 진정 한국 사회에 맞는 역사발전론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사회 개혁과 남북통일로 가는 올바른 길인 셈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한 탕평정치와 대동사회를 향한 노력이었다. 단지 노력으로 끝났다는 데 한계가 있다. 결과와 함께 과정도 중요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역사이므로 그것은 베낄 설계도는 있을지언정 다 지어진 집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 것과 같다.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군권이 신권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한계가 아니었을까? 때문에 제도화로까지 갈 수가 없었고 정조가 죽은 후 본격적인 세도정치로 왜곡되지 않았는가. 이는 어쩌면 당시 사회가 이미 왕조정치로 이끌 수는 없는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는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을 상정하는 일이 무의미한 줄은 알지만, 만약 외세의 힘이 없었다면 군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그럴 기미는 찾을 수가 없다. 때문에 군주권의 강화를 통한 탕평정치는 한계를 안고 시작한 제한된 시간 속의 개혁이 아닐까? 바로 전근대적 개혁이라는 한계 말이다.

이 책에서의 소단락 나누기는 오히려 불편하다. 왠일인지 쉰다[休]는 생각보다는 답답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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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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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를 살피는 까닭은...
 

우리 나라 명문가들의 고택을 찾아다니며 고택이 자리한 풍수와 그 가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종갓집을 두고 풍수와 가문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어떻게 명문가가 되었는지 살펴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인위적인 범주와 운명적인 범주를 같이 다룬다는 것이 사뭇 불편해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지루하지 않게 적절히 섞여 흥미롭게 읽힌다. 저자의 처음 의도는 아마 풍수에 더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싶다. 물론 편집자의 후일담을 듣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비율을 어림잡아 봐도 풍수에 대한 분량이 더 많다. 또한 마지막 강릉 선교장 편에서는 가문의 내력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다. 선교장의 아름다움만 극찬하고 있다.

풍수에 대해서는 아무리 읽어도 그러려니 하고 말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러니 명문가 이야기를 할 때 꼭 골치가 아픈, 명문가의 기준이 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짚어보자. 다시 짚는다고 한 것은 이전에 예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조선시대 명가의 고문서’라는 전시회를 다녀와서 생각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명가의 기준을 몇 가지 꼽아봤었다. 역사성, 경제력, 도덕적 의무였다. 이는 이 책에서 보는 명문가의 기준과도 겹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도 볼 수 있는 도덕적 의무는 가풍, 혹은 가훈과도 밀접하다. 이는 식구들의 정신에 영향을 주어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한다. 가문의 전통과 내력을 오랜 동안 지켜온 결과물이 바로 명문가의 종택으로 볼 수 있겠다. 지배층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종택을 지켜오기 위해서는 주변에 덕망이 쌓여 있어야 했을 것이다. 어지러운 때 피지배층이 가장 먼저 타도하는 곳은 인심 사나운 지주의 집이었을 것이다. 덕망은 곧 도덕적 의무감이다. 그러므로 종택의 유무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더 덧붙인다. 인물과 풍수이다. 위의 세 가지는 꾸준히 지켜 쌓인 바탕이 되어야 하고, 꾸준히 지켜가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명문가로 알려지기 위해서는 人, 地, 時가 맞아야 한다. 먼저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 물이 고여 충만한 상태를 밖으로 터뜨려야 한다. 그 인물의 명망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가문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인물도 지리, 즉 풍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때를 잘 타고 나야 한다. 이창호가 조선에 태어났다면 바둑천재로 출세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갈수록 대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명문가는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명문가도 지키기 힘들겠다. 핵가족화에다 ‘무자녀 혁명’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가문이라는 의미를 꺼내는 게 시대에 뒤떨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무의 뿌리가 깊어야 가지가 흐드러질 수 있고, 샘의 근원이 깊어야 마르지 않는다. 제 집이 굳건하고 걱정이 없다면 어찌 밖에 나와서 잔 세파에 흔들리겠는가. 명문가의 기준을 따지는 것은 알려진 명문가들의 시비를 가리는 일도 있겠지만, 스스로 명문가라고 할 만한 가족을 꾸리는 기준으로 삼을 만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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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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述而不作
 

절세의 미모로 선비와 승려까지도 무릎 꿇게 했던 황진이. 연리지連理枝로만 그려졌던 황진이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회한을 품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자유를 찾은 화담학파의 대모, 서경덕의 제자로 그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전의 황진이 모습은 역사적 오류이자 편견이 된다. 저자의 분석과 추론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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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저자가 쓴 소설은 주석판만 있었다 한다. 그러나 주석이 달린 소설은 가독성이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여 출판사에서 주석을 없애버린 대중판을 기획했던 것이다. 저자가 구상한 소설의 형식을 완전하게 담은 것은 주석판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달아놓은 주석은 소설의 부차적 요소가 아니라 소설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주석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어떠한 사건에 대한 정황을 부연 설명하는 역할이 있다. 또 하나는 황진이가 인용한 수많은 고려가요, 향가, 시조에 대한 출전이다. 실은 저자가 쓴 한시이지만 황진이가 인용한 것처럼 본문을 썼다. 그리고 주석을 달고 누구의 시조를 ‘염두에 둔 듯하다’라고 하여 황진이의 생각을 추론한 것처럼 해놓았다. 처음에는 상당히 헷갈렸지만 나중에는 주석 또한 이 소설의 중요한 장치라는 걸 알고는 무릎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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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중심의 서술을 거부하고 있다. 단순한 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황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글로 쓴 형식이다. 때문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황진이 바로 자신이다. 당시 16세기의 글쓰기를 드러내 보이는 듯한 의도이다. 자연히 읽기가 불편한 면이 있다.   또한 이야기 전개에 의한 흥미가 다소 적다. “소설의 원형질인 이야기는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과 세계의 원리를 담론화하는 데까지 이어져 있다.” 해설에 있는 이 문구를 보니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면 이야기 자체가 흥미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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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역사이자 시이고 소설인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 또한 “본문보다 많은 각주가 붙은 책의 출간을 고집한 것은 역사소설도 이제는 야사 위주의 짜깁기로부터 탈피하여 철저한 고증과 문체 미학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 저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 역사를 다룬 소설에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명제이다. 저자는 참고한 문헌들을 자랑스레 몇 장에 걸쳐 열거하고 있다. 그 방대한 자료 조사의 범위에 그 앞에 엎디지 않을 수 없다. 본보기로 삼을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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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떤 뺑덕어멈 - 김소진 두번째 소설집
김소진 지음 / 솔출판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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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떤? 고아떤!
 

이 책제목을 처음 보았던 이 년 전부터 ‘고아떤’이 무슨 말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고 나서야 뒤통수를 쳤다. 아, 나의 아둔함이여...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보다 생경한 우리말이 급히 줄었다. 비교적 수월하게 읽힌다. 판독. 그러나.... 여전히 재미없다. 해설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그는 잘 구운 고깃덩어리나 보기 좋은 케이크 덩어리를 먹듯이 독자가 소설을 가볍게 먹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소설의 줄거리나 서사시 구조에 흥얼거리면서 양념을 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는 이야기를 잘 못한다고 말해지기보다는 차라리 잘 안 한다고 말해져야 할 것이다.”
과연 재미없음은 그의 의도인가. 그렇다 해도 재미없는 소설을 평론가가 아닌 다음에야 독자가 읽어야 하나.

해설을 훔쳐보며 겨우 그려보는 소설집에 담긴 구조.
‘테제 - 안티테제’의 변증법적 사유에 대한 반기.
이 둘 사이의 중간, 경계 너머. 또 다른 제3의 가치.
테제와 안티테제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선택할 수 없는, 둘 다 선택할 가치가 없는 제3.
나름대로의 새로운 가치, 개흘레꾼.
이는 앞선 저작에서 말한 탈이데올로기의 연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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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김소진 지음 / 강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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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태바지 그년이 미친 년일세
 

확실히 표준말보다 사투리가 역동적이다. 화자의 감정을 뻥 튀겨 드러내준다. 높낮이의 차가 큰 억양 때문일까? 꾸미는 말에 힘을 한껏 실어서일까? 물결 넘실대듯 가락이 느껴지는 말들이다.

 

“긍게, 아 서믄 이래저래 섰으니 기대려달라고 인사치레 삼아 빈말이라도 뭔 소래기를 질러줘야 헐 것 아닌가베. 마이크는 뒀다가 찜쪄먹을래나 응, 징혀……”

 

“여게가 역두 아니잖남? 이렇게 하냥 서 있다가, 거시기 해서 바루 단선으로 된 외길루다 멋모르고 다른 기차가 와서 치받는다면 그 일을 도무지 으쩔라고 이 모양들이여.”

 

“그놈의 설마가 하늘 땅 바다로 할 것 없이 생때 같은 사람 줄줄이 잡는 꼴 땀시 입대껏 입천장이 다 헐도록 끌끌거려 쌓았으면서도 또 그놈의 설마여, 설마가?”

 

“아서! 기차 천장에서 계속 물방귀 터지듯 지직거리는 품을 보니 뭔 방송인가 나오긴 나올 모양이니.”

 

“쓰발놈들, 기차가 벌써 십 분 가까이 철로 위에 서서 몽기작거리고 앉았는데 허라는 방송은 써비스 안 허고 앉아서들 탱자탱자 허는 짓거리들을 보면 그저 속에서 천불이 나서……”

 

“어따…… 홀태바지 그년이 참으로 미친년일세. 봐하니 오랜만에 자식새끼 댈고 고향에 돌아가 양공주짓을 했는지 뭣을 했는지 꼬불친 알량한 돈으로 뭣 좀 해볼랴는데 잔뜩 기죽이는 입방아만 짓찧어놨으니...... 쯧쯧. 비 장허게 온다, 쌍, 으, 씨원타!”

 

주인공/화자는 어중간하다. 부르조아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다. 그렇다고 평민은 더더욱 아니다. 냉소에 찬 시선으로 주인공이 바라보는 이들은 부르조아이다. 끌탕을 치며 안쓰러이 바라보는 이들은 평민이다. 관찰되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친다면 주인공은 사회의 약자이거나 불편한 삶은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투리를 쓴다. 그러나 화자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그는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하는 어중간한 존재다.

관찰자/화자는 김소진 자신이 아닐까? (그의 가족사와 직업, 소설의 배경을 두고 보았을 때) 그렇다면 김소진도 어중간한 존재다. 평민이 될 수도 부르조아가 될 수도 없었다.

부르조아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핏줄을 통해 체득한 원죄의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열린 사회’의 혁명 세력인 부르조아가 가진 자체 모순을 보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평민이 될 수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관찰자로, 혹은 대변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쁘띠’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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