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김소진 지음 / 강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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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홀태바지 그년이 미친 년일세
 

확실히 표준말보다 사투리가 역동적이다. 화자의 감정을 뻥 튀겨 드러내준다. 높낮이의 차가 큰 억양 때문일까? 꾸미는 말에 힘을 한껏 실어서일까? 물결 넘실대듯 가락이 느껴지는 말들이다.

 

“긍게, 아 서믄 이래저래 섰으니 기대려달라고 인사치레 삼아 빈말이라도 뭔 소래기를 질러줘야 헐 것 아닌가베. 마이크는 뒀다가 찜쪄먹을래나 응, 징혀……”

 

“여게가 역두 아니잖남? 이렇게 하냥 서 있다가, 거시기 해서 바루 단선으로 된 외길루다 멋모르고 다른 기차가 와서 치받는다면 그 일을 도무지 으쩔라고 이 모양들이여.”

 

“그놈의 설마가 하늘 땅 바다로 할 것 없이 생때 같은 사람 줄줄이 잡는 꼴 땀시 입대껏 입천장이 다 헐도록 끌끌거려 쌓았으면서도 또 그놈의 설마여, 설마가?”

 

“아서! 기차 천장에서 계속 물방귀 터지듯 지직거리는 품을 보니 뭔 방송인가 나오긴 나올 모양이니.”

 

“쓰발놈들, 기차가 벌써 십 분 가까이 철로 위에 서서 몽기작거리고 앉았는데 허라는 방송은 써비스 안 허고 앉아서들 탱자탱자 허는 짓거리들을 보면 그저 속에서 천불이 나서……”

 

“어따…… 홀태바지 그년이 참으로 미친년일세. 봐하니 오랜만에 자식새끼 댈고 고향에 돌아가 양공주짓을 했는지 뭣을 했는지 꼬불친 알량한 돈으로 뭣 좀 해볼랴는데 잔뜩 기죽이는 입방아만 짓찧어놨으니...... 쯧쯧. 비 장허게 온다, 쌍, 으, 씨원타!”

 

주인공/화자는 어중간하다. 부르조아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다. 그렇다고 평민은 더더욱 아니다. 냉소에 찬 시선으로 주인공이 바라보는 이들은 부르조아이다. 끌탕을 치며 안쓰러이 바라보는 이들은 평민이다. 관찰되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친다면 주인공은 사회의 약자이거나 불편한 삶은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투리를 쓴다. 그러나 화자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그는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하는 어중간한 존재다.

관찰자/화자는 김소진 자신이 아닐까? (그의 가족사와 직업, 소설의 배경을 두고 보았을 때) 그렇다면 김소진도 어중간한 존재다. 평민이 될 수도 부르조아가 될 수도 없었다.

부르조아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핏줄을 통해 체득한 원죄의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열린 사회’의 혁명 세력인 부르조아가 가진 자체 모순을 보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평민이 될 수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관찰자로, 혹은 대변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쁘띠’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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