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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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끼라
 

성석제의 글솜씨나 입담에 대해서야 앞서도 슬쩍 짚었으니 새삼스레 다시 꺼내지는 않겠다.

다만, 90년대에 주목을 받은 개성 있는 작가들의 소설과는 틀린 성석제의 소설 형식이 오히려 소설이라는 의무에 충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소설이 딱 무슨 형식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알맹이를 말로다가 이러니저러니 할 게 아니라 눈 감으면 영상이 돌아가듯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시점에도 변화가 있겠다. 1인칭 시점에서 관찰자 시점으로 변하면서 독백을 차용하기보다는 나타난 행동을 퍼다가 보여주겠다.

두서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소설집인 이 책에 실린 여러 단편들이 씌어진 시기는 2000년에서 2002년 사이다. 이 가운데 몇몇 단편들을 통해 과연 작가는 이 기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  작가는 황만근이라는 덜떨어져 보이는 사내를 내세워 점차 신용을 앞세우는 사기극 같은 이 시대에 대해 반항이라도 하는 걸까.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공장은 미리 어음을 끌어다가 무지막지하게 생산하고, 상품이 남아돌지 않게 또한 개인에게도 앞서 돈을 빌려주어 소비를 부추긴다. 이미 이것이 거대한 흐름이 되었는데 이를 거스르는 꿈이라도 꾸는 건가. 어쩌면 황만근이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빚 안 지고 좀 손해 보면서 그의 생각이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쓰레기는 안 만들어내고 살지는 않겠는가. 자본주의 시대에 반자본주의적인 삶의 극단적인 반동.

“나 말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 자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자기가 무슨 마르크스라도 되나? 뜬금없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호웅의 해설에서도 이 부분은 그냥 은근슬쩍 넘어간다. 다만 ‘그 뜻을 헤아리는 일은 이제 독자에게 넘어왔다’라며 책임을 방기(?)하고 만다. 독자가 바본가? 누가 헤아려보지 않겠나, 어려우니까 하다 마는 거지. 해설에서는 그저 평론가의 해석을 보고 싶을 뿐이다. 자유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가는 소외의 상태로부터 탈출했을 때 얻어지는 해방이라는 거창한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되겠다. 동환(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을 한 인물)은 그저 사람들이 바라지만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나보다. 자신은 망가져가면서도. 보기에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나?

‘갈비 스무 근, 개 한 마리, 흑염소 전골 다섯 냄비, 상추며 마늘 풋고추 등속의 야채, 양념거리’ 과연 많이도 소비하고 또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내겠다. 곗날 모인 인간들은 이 먹거리를 죄다 먹어치울 것이다. 쾌활냇가에 사람들은 왜 모이는 걸까? 각각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이 패거리에 끼고 싶겠는가? 소외되는 게 두려워 사람들은 떼지어 모이고 꼭꼭 참석하고, 쾌활하게 웃고 떠드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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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봤다 - 작가정신 소설향 8 작가정신 소설향 23
성석제 지음 / 작가정신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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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나를 아는 사람은 제목만 보고도 ‘저 인간은 맨날 저래’ 하며 혀를 끌끌 찰 게다. 그래, 또 그 타령이다. ‘다 그런 거지’ 타령이 또 나오기 시작한다. 사는 게 뻔하지 뭐, 유별난 게 있겠어? 그걸 뻔히 알면서도 퇴근 시간만 되면 하품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아으, 뭐 재미있는 일 좀 없을까? 죽이는 일 없어? 사는 게 즐거운 때에는 이런 하품소리도 잘 안 나온다. 꼭 지겹고 모든 게 똑같을 때, 나아지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엑스터시는 못 되도 멘솔 담배 같은 기분전환이 필요하기는 하겠다. 그래도 돌고 도는 게 인생인 것을. 네 이야긴지 내 이야긴지 아리까리한 얘기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어 놓은 소설에서도 그런다. 염소를 잡는다, 아기족을 판다, 발모제를 판다, 모양만 틀리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 말이야. 그래도 대박 맞아서 인생 역전 한 번 해 보는 걸 소설에서나마 보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만, 그래서 확률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방이면 된다고 본보기로 삼으려는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겠어? 배고프면 뭐 넣어줘야지, 마려우면 까고 싸야지, 아프면 울어야지, 무서우면 도망쳐야지 돈 있고 배운 거 많다고 이런 거 안 하고 살 수 있어? 안 죽으려고 용을 써봐, 죽을 때 되면 다 죽지. 소싯적에 산에서 좀 쉬겠다고 딴에는 두꺼운 책 하나 끼고 들어간 콧구멍만한 절간의 스님이 그러더라. 어떤 놈이 짱돌을 집어 들고 니 대가리를 겨누고 치켜들면, 그냥 니 대가리를 들이밀어. 거기서 뒤질 팔자면 대가리 깨질 거고, 살 팔자면 살어. 이게 인연이여. 이놈과 저년이 만나는 것만 인연이 아니라, 저 세상 가고 안 가고 하는 것도 다 인연이여. 용 쓰면서 욕심 챙기려고 하지 말어. 재미나게 살어. 말하는 건 땡중인데 뭔가가 묵직하니 남더란 말이야. 지금까지 설 푼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 원리에 저해되는 반동적인 사상이라고 몰아붙이는 인간이 다섯에 꼭 하나씩은 있더라. 그 놈은 죽을 때까지 뭐든 돈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단순한 족속일 거다. 때로는 단순한 게 좋기는 하다만. 인연이나 윤회가 돌고 도는 것이긴 하지만, 산에 박혀서 이 인연의 사슬을 끊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세우지 못할 바에야 그냥 턱 인정하고 재미나게 살자니깐. 이거 인정하면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근데 왜 당신은 그 모양으로 사냐구? 인정만 한다고 다 되는 줄 알아? 자유롭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여하간 그렇단 얘기야. 그런데 소설 속 나그네는 호랑이를 보고 왜 울었대?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딴에는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지 알았겠지. 가슴에 맺힌 사랑을 찾아 죽기를 각오하고 헤매다녔겠지. 배고픈 것도 참고, 밤에 산길도 겁 없이 들어섰겠지. 죽기를 작정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그런데 산에서 호랑이를 본 거지. 걸음아 날 좀 살려라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리든, 돌에 걸려 데굴데굴데굴데굴데굴덱데굴 구르든 일단 내빼고 보는 거지. 그러다 산을 내려와 어느 노인네를 만났어. 아 글쎄 그 노인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좌르륵 쏟아지더란 말이야. 눈물 속에 자존심이고 기운이고 정신이고 다 섞여 나왔을 것이야. 이게 뭔가 싶지, 죽기를 작정했는데 도망치다니 한심해지지 않겠어? 그런데 자살하려고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을 갑자기 뒤에서 놀래키면서 등을 탁하고 치면 움찔할까? 그 사람 기분이 되게 상할까? 놀래킨 사람한테 막 화를 낼까? 궁금하다. 성석제의 글은 참 능청스럽다. 좌중을 재미있게 이끌어가려면 적당한 거짓말도 좀 보태고 해야 하는데 나는 참 순진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뜻도 모르면서 읽기만 해도 재미를 느낄 문체다. 진지한 내용을 진지하게 쓰는 건 쉽다. 그런데 진지한 내용을 재미있게 쓰는 건 어렵다. 내용도 제대로 모르면서 재미있게 쓰려고만 하면 방정맞기만 하다. 아, 실컷 방정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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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힌 책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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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에 꽂힌 책의 어제와 오늘, 내일
 

  책에 흥미를 붙이면서 욕심도 생기더라. 탐나는 책이 생기는가 하면 꼭 보지도 않을 책을 사기도 한다. 욕심은 책뿐만 아니라 책꽂이에도 마찬가지다. 좀 두께가 있고 길이도 방 한면을 채울 만한 나무판 여러 개와 벽돌을 이용해 만든 책꽂이가 갖고 싶었다. 아니 여전히 갖고 싶다. 여러 사정상 아직 원하는 책꽂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만한 책꽂이가 들어갈 만한 방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 두 번째 이유는 그 책꽂이에 꽂을 만큼 책이 많지 않다는 안타까운 현실. 읽은 책과 안 읽은 책 모두 합해 지금 내 방에 있는 책은 겨우 사백몇십 권밖에 안 되니 그보다 두세배는 더 있어야 그런대로 모양이 날 텐데 말이다. 읽지도 않을 거면서 무턱대고 책만 끌어 모으는 것도 좀 우습겠고.

   어릴 적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았던 책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면 이십여 년 동안에 책의 꼴이 참 많이 변했다 싶다. 책의 장정에서부터 인쇄, 종이, 판형 등등 질적으로 나아졌고 다양해졌다. 이 짧은 시기에도 이러한데, 책이 만들어진 처음의 시간부터 지금까지는 얼마나 많은 변모가 있었을까. 이 책에서는 서양에서 책을 보관하던 방식으로 접근하여 책의 꼴과 그 사회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탐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껍질에도 역사가 있고 여러 의미의 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책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를 느낄지도 모르지. 
 
 
 
   "우리가 지금 만나는 책의 꼴은 중세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그 전에는 그저 두루마리에 썼을 뿐이다. 두루마리들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묶은 것이 바로 책의 전신인 코덱스이다. 이 코덱스를 만들고 읽는 층은 주로 수도원의 성직자였고, 따라서 책의 종수나 부수는 극히 적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주로 필사를 했기 때문에 책은 매우 귀중했다. 이러한 책의 조건은 보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과 같이 책을 세워서 책등만 보이게 꽂은 것이 아니라, 책상 위나 선반에 눕혀 보관했다. 흔히 책을 읽고나서 휙 던져두듯이 그렇게.
   인쇄술이 발달하고, 독자 대상이 수도원을 벗어나면서 책의 종수나 부수가 많아졌다. 소량생산에서 대량생산으로 책이 만들어지면서 서점과 도서관이 생겨났고, 개인 서재도 생겨났다. 개인 서재처럼 책을 적게 보관하는 경우는 역시나 눕혀 놓거나 궤짝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는 많은 책을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방법과 함께 읽는 공간도 마련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도난을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책은 세로로 책장에 꽂히게 되었는데, 아직은 책등이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 손때가 묻은 배면이 밖으로 나왔다. 왜냐하면 도난을 막기 위해 책의 두꺼운 앞장이나 뒷장을 사슬에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와 책이 폭발적으로 많아지면서 도서관은 좀더 건축학적으로 설계되었다. 책의 효율적 보관과 함께 좋은 독서환경이 중요해졌다. 때문에 창문의 배치, 책장의 배치, 공간의 활용, 전기의 활용 등을 골똘히 연구했다."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이제는 읽는 책과 읽지 않는 책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사료로써 의미를 더 많이 가지게 되는 책들은 독서가 아니라 보관용으로 어딘가에 둘 것이다. 앞으로 계속 쏟아져 나올 책들을 그려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디스크 한 장에 수십 권의 책에 든 내용을 넣고, 컴퓨터로 클릭만 하면 원하는 쪽이 나온다. 그러면 내가 바라는 덩치 큰 책꽂이는 필요가 없어지는 걸까? 아담한 시디 장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책의 미래를 그려볼 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추가되었다. 책의 수량도 책의 미래에 영향을 주겠구나. 사회에 나도는 책의 수량에 따라서 책을 보관하는 방식과 형태가 달라졌듯이 말이다.

   한 가지 드는 궁금함과 아쉬움. 동양에서 책은 어떤 형태로 발전했을까? 옮긴이 역시 후기에서 잠깐 밝혔지만, 동양에서의 책의 역사도 서양 못지않게 흥미로웠을 성싶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반짝하는 아이디어를 줄지도 모른다.   

   다른 얘기인데, 서양 중세기에 대한 기술은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암울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안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공학적인 설명이 주된 내용인지라 이 역시 나에게는 좀 답답한 면이 있었다. 보다 옛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종이와 서체 등을 가려 선택한 듯하다. 그럴 의도였다면 충분히 전달한 셈이기는 하다. 책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좋고 무엇보다 가벼워서 좋다. 하지만 서체나 인쇄 상태는 읽는 입장에서 보면 그리 좋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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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상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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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에 든 책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에 관한 문제.

사실 『소설』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어제 오늘의 것은 아니다. 또한 문학에만 있는 문제만도 아니다.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해결하기 힘든 골칫거리다.

우선 읽혀야지 좋다 나쁘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잔소리라도 할 게 아닌가. 때문에 우선 소설에서 대중들의 손길을 타는 게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다수의 입맛에만 맞출 수만은 없다. 독자 대중의 유행과 익숙함에 오히려 문학이 길들여진다? 좀 우스운 일이다.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소설이나 출판에도 유행이 있다니깐.

문학은 스스로 늘 새로워야 한다. 늘 고민해야 하고 실험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을 새로움으로 이끌어야 한다. 흥부전의 권선징악을 익숙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써먹고 있었다면 문학은 아마 쓰레기장에서 재활용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현실에서야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닐 터.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골 터지게 고민되기 마련이다. 소설가나 비평가뿐만 아니라 편집자나 독자까지도 이 고민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느 편에 끼어들든지 갈런드 부인의 처지가 된다. “왼손에는 암호문 같은 티모시의 새 소설이, 그리고 오른손엔 재미있는 드래블의 소설이.”

제임스 미치너는 이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어느 한 편으로 약간씩 기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움이다. 미치너의 네 명의 주인공은 갈등 끝에 새로움 쪽으로 또 다시 익숙해진다. 요더는 마지막으로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하고, 마르멜르는 돈 안 되지만 멋진 작가를 찾고 있고, 스트라이베르트는 자신의 잣대를 더욱 새롭게 하려고 하고, 갈런드 부인은 암호문 같은 소설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아마 익숙해진 새로움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긁어낼 것이다.

편집자를 한 명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주목되는 책이다. 마르멜르가 편집자로서 일하고 생활하는 모습에 너무 주의해서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호감을 가질 수는 있어도 환상을 가지면 안 되겠기에. 편집자 역시 새로움과 익숙함을 더 고민해보는 게 좋겠다.

제임스 미치너는 소설과 문학에 대해 더 깊은 얘기들을 늘어놓는데 아직은 정리하기 벅차다. 언젠가 다시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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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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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

 

   그래요, 어쩔 수 없군요. 헤어지고 싶다니 당신 말대로 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맞지 않는다는 당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구구절절이 쓴 당신의 편지를 받은 다음날, 당신과 만난 자리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저 멍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와서 혼자 있어보니 스스로 정리가 되더군요. 그래서 이렇듯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메일로 보냅니다. 당신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처음 만날 때같이. 당신은 아득한 옛날 같은 사람입니다. 아득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볼 때면 나는 늘 추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에 관한 기억들도 아득한 옛날처럼 잘게 부수어진 조각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 순서를 꿰어 맞추려 해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세종문화회관 앞이었지요. 시월 말쯤이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시월을 좋아해서 시월에 일어난 일은 잘 기억하는 편이거든요. 딱히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의 일이니까, 10월이겠죠.


   당신이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을 스쳐 지날 때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머뭇거리다 당신을 따라가며 내가 아는 어떤 이름을 불렀지요. 당신의 옆얼굴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당신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그 아득한 눈길이라니. 사방에 눈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주위에 흩날리는 줄 알았습니다.
   “괜찮아요. 잘못 본 게 아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눈이 쌓이는 듯한 목소리로 당신이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유치하지만, 다음에 내가 꺼냈던 말은
   “바쁘시지 않으면……”으로 시작했더랬지요.
   당신은 그 눈으로 주섬주섬 꺼내놓는 내 말들을 바라보다, 품에 끼고 있던 책을 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던 길을 돌아서 걸어갔습니다.
   당신이 내게 건네준 책은 윤대녕 산문집인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이었습니다. 표지를 들춰보았더니 면지에 사인과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이메일 주소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뒤 당신과 나는 인사동 어느 찻집에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티벳풍으로 문양이며 장식품들을 꾸며놓은 찻집이었는데, Beegees의 ‘Holiday’가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당신이 내게 건네 준 책에 이 노래에 대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1988년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 얘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아는 체를 했지요. 책을 읽었다는 걸 은근히 내비치고 싶었거든요.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 듣고 있으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시간이 잠시 느리게 간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지강헌이라는 사람, 무척 외로웠나봐요. 그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잠시라도 시간을 붙들어 매고 싶었을 거예요.”
   그때 당신의 눈은…… 더욱 아득해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같이.
   눈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얼 할까 고심하다 남산에 갔지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산 타워 전망대에 들어갔습니다. 원형으로 된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며 눈으로 덮인 서울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로 만났던 광화문 사거리가 있었고, 경복궁도 아슴푸레 보였습니다. 당신은 볼이 발개져서 신기한 듯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연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때 당신 너무나……
경복궁을 보며 당신이 얘기했습니다.
   “오늘처럼 눈 덮인 날 경복궁에 가는 것도 좋지만, 사월에 가면 더 좋아요. 강녕전이던가, 하여튼 어떤 건물로 가는 대문에 들어서면 라일락이 있는데 그 향이 너무 좋거든요. 이 세상 향기 중에 라일락향이 가장 좋아요. 이건 비밀인데요. 그래서 우리집 화장실 방향제가 라일락향이에요.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나무 아래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습죠? 아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는 데 창밖으로 스쳐지나던 아래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신기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다 읽고 나서 창밖을 내다봤는데,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왜 아름다움은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까요. 참 우습죠?”
   여드름이 없어지면서 나의 사춘기도 끝났다고 믿었을 때, 그 시절에 나는 어두운 방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산을 함께 오른 날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걸린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상반신이 모두 드러나는 그 거울 앞에서 전망대 유리창에 얼굴을 꼭 붙이고 다분다분 이야기하던 당신의 그 눈을 떠올렸습니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눈 속에서 춤을 추는 꿈을 꾸었습니다. 눈이 멀어버리도록 하얀 눈 속에서 미치도록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인지 혹은 죽음인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늘 아득한 눈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우리는 길거리를 걸으며 오징어다리를 씹기도 했고, 오락실에서 나란히 앉아 게임도 했고, 강한 비트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했고, 달콤한 입맞춤도 있었고, 당신의 손은 무척 따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당신의 눈은 아득할 때가 많았고, 엊그제 나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며칠 사이 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눈이 내려 쌓이듯 얘기했습니다. 헤어져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순간 화가 났습니다. 우리는 무슨 관계였냐고 따져 묻는 말에 당신이 대답했습니다.
   “관계라는 건 저마다 고유해서 규정지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우리였어요. 친구도 애인도 다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요.”
   지난주 내내 연락이 되지 않던 때, 나는 당신의 말대로 생리 기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게 아니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우울에 빠져 있었어요. 내 우울증은 마치 길게 생리통을 앓는 여자의 그것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와요. 시지프스 삶처럼 다 빠져나왔나 싶으면 또다시 저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아요. 그 우울은 결국 외로움으로 변해버려요. 구덩이 속에서 결코 이곳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외로워지는 거예요. 이루 말할 수 없이 광막한 외로움 말이에요. 천형과도 같은 외로움은 누군가가 옆에 없어서 외로운 것과는 달라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는 것과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한참 동안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나는 나대로 창밖만 무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종지부를 찍듯 당신이 말을 꺼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얘기가 있어요.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자세하게 털어놓지 못한 얘기가 있어요. 죄다 쏟아버리면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아플 얘기가 있어요.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지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가끔은 어디 여행 가다가 아무나 만나서 죄다 쏟아버리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항상 상상만 하곤 하죠. 아니면 단 한 사람에게만 모두 얘기할까 생각하기도 해요. 마음이 아프지도 날 불쌍하게 만들지도 않을 사람이어야 해요. 미안하지만 당신은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없어요. 세상에 나 혼자만 아는 비밀이 있어서 외로운 걸 거예요.”
   바보같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말이 너무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눌러서, 아니, 무심코 바라본 당신 눈길, 당신 숨결이 너무나도 아득해서 아무리 애써도 그 옛날 아득함 속으로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당신이 헤어지기 바로 전에 내게 했던 말. 그 말이 진정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저는 손이 따뜻하지만 몸은 찹니다. 그래서 늘 뜨거운 바람이 길게 불어가길 바랬어요. 열대에 있었으면서도 제 몸과 마음이 하나도 타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가 눈에 보이기도 하고 느껴지기도 해요. 저는 여전히 이 자리에서 옮겨지지 않은 모양이에요. 미안해요.”
   지금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만 내일, 그리고 모레 어찌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단 한 번 만났다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보고 싶은 사람은 기어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인간 존재는 소금기둥이 될 수밖에 없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2002년 12월 27일 자정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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