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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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끼라
 

성석제의 글솜씨나 입담에 대해서야 앞서도 슬쩍 짚었으니 새삼스레 다시 꺼내지는 않겠다.

다만, 90년대에 주목을 받은 개성 있는 작가들의 소설과는 틀린 성석제의 소설 형식이 오히려 소설이라는 의무에 충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소설이 딱 무슨 형식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알맹이를 말로다가 이러니저러니 할 게 아니라 눈 감으면 영상이 돌아가듯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시점에도 변화가 있겠다. 1인칭 시점에서 관찰자 시점으로 변하면서 독백을 차용하기보다는 나타난 행동을 퍼다가 보여주겠다.

두서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소설집인 이 책에 실린 여러 단편들이 씌어진 시기는 2000년에서 2002년 사이다. 이 가운데 몇몇 단편들을 통해 과연 작가는 이 기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  작가는 황만근이라는 덜떨어져 보이는 사내를 내세워 점차 신용을 앞세우는 사기극 같은 이 시대에 대해 반항이라도 하는 걸까.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공장은 미리 어음을 끌어다가 무지막지하게 생산하고, 상품이 남아돌지 않게 또한 개인에게도 앞서 돈을 빌려주어 소비를 부추긴다. 이미 이것이 거대한 흐름이 되었는데 이를 거스르는 꿈이라도 꾸는 건가. 어쩌면 황만근이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다. 빚 안 지고 좀 손해 보면서 그의 생각이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쓰레기는 안 만들어내고 살지는 않겠는가. 자본주의 시대에 반자본주의적인 삶의 극단적인 반동.

“나 말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 자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자기가 무슨 마르크스라도 되나? 뜬금없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호웅의 해설에서도 이 부분은 그냥 은근슬쩍 넘어간다. 다만 ‘그 뜻을 헤아리는 일은 이제 독자에게 넘어왔다’라며 책임을 방기(?)하고 만다. 독자가 바본가? 누가 헤아려보지 않겠나, 어려우니까 하다 마는 거지. 해설에서는 그저 평론가의 해석을 보고 싶을 뿐이다. 자유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가는 소외의 상태로부터 탈출했을 때 얻어지는 해방이라는 거창한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되겠다. 동환(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을 한 인물)은 그저 사람들이 바라지만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나보다. 자신은 망가져가면서도. 보기에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나?

‘갈비 스무 근, 개 한 마리, 흑염소 전골 다섯 냄비, 상추며 마늘 풋고추 등속의 야채, 양념거리’ 과연 많이도 소비하고 또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내겠다. 곗날 모인 인간들은 이 먹거리를 죄다 먹어치울 것이다. 쾌활냇가에 사람들은 왜 모이는 걸까? 각각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이 패거리에 끼고 싶겠는가? 소외되는 게 두려워 사람들은 떼지어 모이고 꼭꼭 참석하고, 쾌활하게 웃고 떠드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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