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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
그래요, 어쩔 수 없군요. 헤어지고 싶다니 당신 말대로 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맞지 않는다는 당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구구절절이 쓴 당신의 편지를 받은 다음날, 당신과 만난 자리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저 멍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와서 혼자 있어보니 스스로 정리가 되더군요. 그래서 이렇듯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메일로 보냅니다. 당신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처음 만날 때같이. 당신은 아득한 옛날 같은 사람입니다. 아득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볼 때면 나는 늘 추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에 관한 기억들도 아득한 옛날처럼 잘게 부수어진 조각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 순서를 꿰어 맞추려 해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세종문화회관 앞이었지요. 시월 말쯤이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시월을 좋아해서 시월에 일어난 일은 잘 기억하는 편이거든요. 딱히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의 일이니까, 10월이겠죠.
당신이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을 스쳐 지날 때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머뭇거리다 당신을 따라가며 내가 아는 어떤 이름을 불렀지요. 당신의 옆얼굴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당신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그 아득한 눈길이라니. 사방에 눈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주위에 흩날리는 줄 알았습니다.
“괜찮아요. 잘못 본 게 아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눈이 쌓이는 듯한 목소리로 당신이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유치하지만, 다음에 내가 꺼냈던 말은
“바쁘시지 않으면……”으로 시작했더랬지요.
당신은 그 눈으로 주섬주섬 꺼내놓는 내 말들을 바라보다, 품에 끼고 있던 책을 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던 길을 돌아서 걸어갔습니다.
당신이 내게 건네준 책은 윤대녕 산문집인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이었습니다. 표지를 들춰보았더니 면지에 사인과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이메일 주소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뒤 당신과 나는 인사동 어느 찻집에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티벳풍으로 문양이며 장식품들을 꾸며놓은 찻집이었는데, Beegees의 ‘Holiday’가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당신이 내게 건네 준 책에 이 노래에 대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1988년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 얘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아는 체를 했지요. 책을 읽었다는 걸 은근히 내비치고 싶었거든요.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 듣고 있으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시간이 잠시 느리게 간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지강헌이라는 사람, 무척 외로웠나봐요. 그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잠시라도 시간을 붙들어 매고 싶었을 거예요.”
그때 당신의 눈은…… 더욱 아득해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같이.
눈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얼 할까 고심하다 남산에 갔지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산 타워 전망대에 들어갔습니다. 원형으로 된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며 눈으로 덮인 서울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로 만났던 광화문 사거리가 있었고, 경복궁도 아슴푸레 보였습니다. 당신은 볼이 발개져서 신기한 듯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연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때 당신 너무나……
경복궁을 보며 당신이 얘기했습니다.
“오늘처럼 눈 덮인 날 경복궁에 가는 것도 좋지만, 사월에 가면 더 좋아요. 강녕전이던가, 하여튼 어떤 건물로 가는 대문에 들어서면 라일락이 있는데 그 향이 너무 좋거든요. 이 세상 향기 중에 라일락향이 가장 좋아요. 이건 비밀인데요. 그래서 우리집 화장실 방향제가 라일락향이에요.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나무 아래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습죠? 아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는 데 창밖으로 스쳐지나던 아래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신기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다 읽고 나서 창밖을 내다봤는데,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왜 아름다움은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까요. 참 우습죠?”
여드름이 없어지면서 나의 사춘기도 끝났다고 믿었을 때, 그 시절에 나는 어두운 방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산을 함께 오른 날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걸린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상반신이 모두 드러나는 그 거울 앞에서 전망대 유리창에 얼굴을 꼭 붙이고 다분다분 이야기하던 당신의 그 눈을 떠올렸습니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눈 속에서 춤을 추는 꿈을 꾸었습니다. 눈이 멀어버리도록 하얀 눈 속에서 미치도록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인지 혹은 죽음인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늘 아득한 눈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우리는 길거리를 걸으며 오징어다리를 씹기도 했고, 오락실에서 나란히 앉아 게임도 했고, 강한 비트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했고, 달콤한 입맞춤도 있었고, 당신의 손은 무척 따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당신의 눈은 아득할 때가 많았고, 엊그제 나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며칠 사이 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눈이 내려 쌓이듯 얘기했습니다. 헤어져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순간 화가 났습니다. 우리는 무슨 관계였냐고 따져 묻는 말에 당신이 대답했습니다.
“관계라는 건 저마다 고유해서 규정지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우리였어요. 친구도 애인도 다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요.”
지난주 내내 연락이 되지 않던 때, 나는 당신의 말대로 생리 기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게 아니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우울에 빠져 있었어요. 내 우울증은 마치 길게 생리통을 앓는 여자의 그것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와요. 시지프스 삶처럼 다 빠져나왔나 싶으면 또다시 저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아요. 그 우울은 결국 외로움으로 변해버려요. 구덩이 속에서 결코 이곳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외로워지는 거예요. 이루 말할 수 없이 광막한 외로움 말이에요. 천형과도 같은 외로움은 누군가가 옆에 없어서 외로운 것과는 달라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는 것과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한참 동안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나는 나대로 창밖만 무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종지부를 찍듯 당신이 말을 꺼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얘기가 있어요.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자세하게 털어놓지 못한 얘기가 있어요. 죄다 쏟아버리면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아플 얘기가 있어요.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지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가끔은 어디 여행 가다가 아무나 만나서 죄다 쏟아버리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항상 상상만 하곤 하죠. 아니면 단 한 사람에게만 모두 얘기할까 생각하기도 해요. 마음이 아프지도 날 불쌍하게 만들지도 않을 사람이어야 해요. 미안하지만 당신은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없어요. 세상에 나 혼자만 아는 비밀이 있어서 외로운 걸 거예요.”
바보같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말이 너무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눌러서, 아니, 무심코 바라본 당신 눈길, 당신 숨결이 너무나도 아득해서 아무리 애써도 그 옛날 아득함 속으로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당신이 헤어지기 바로 전에 내게 했던 말. 그 말이 진정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저는 손이 따뜻하지만 몸은 찹니다. 그래서 늘 뜨거운 바람이 길게 불어가길 바랬어요. 열대에 있었으면서도 제 몸과 마음이 하나도 타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가 눈에 보이기도 하고 느껴지기도 해요. 저는 여전히 이 자리에서 옮겨지지 않은 모양이에요. 미안해요.”
지금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만 내일, 그리고 모레 어찌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단 한 번 만났다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보고 싶은 사람은 기어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인간 존재는 소금기둥이 될 수밖에 없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2002년 12월 27일 자정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