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2  

...삶의 양식이든 생활이든 나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든, 모든 걸 직접 제어할 수 있다는 건 내게 괘 중요한 의미였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는 예측 가능한 통제 말이다.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자신이 속한 세계가 명확히 자신의 기준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 주차장의 차들을 보며 느끼는 균형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p156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당신들이 '우연'이라고 손쉽게 단정 짓는 수많은 것들 중 단 한 가지도요. 보잘것없어 보이는 먼지만 한 나사와 톱니조차 질서를 수호하고 흐름을 사수하는 거대한 설계의 일부입니다. 치밀하고 예술적으로 짜인 '필연'이죠."

p167

...목적지는 회사 근처 도서관으로 정했다. 도서관에서는 범주를 벗어난 일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또 제법 오래 머무르기에도 적당한 장소다. ....

p178

...한쪽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모든 걸 갖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0과100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하지 않나. 축 하나 반대로 뒤집으면 0은 곧 100이 되고 100은 곧 0이 되는 법이니. 모쪼록 뭔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철저히 감추는 것 외에 되레 모조리 표출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닫는 참이었다.

p202

 '컵에 담긴 게 뭐든 그것이 속한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컵에 맺힌 투명한 물기는 보석 빛깔의 내용물과는 무관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컵에 담긴 것과 세계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 내 세계에 담긴 것이 그 세계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거대한 우주의 흐름 안에 속한 나 또한 어쩌면 소리 없이 뭔가를 움직이는 중인지도.

p206

 "맞습니다. 전혀 이해가 안 가실 테지만 '우연'이라는 건, 실은 없습니다. 솔직히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그건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거든요. 불완전하고, 부조리하고, 부조화적인 세계에서나 통용되죠. 하지만 그래서 제법 낭만적이랄까요. 낭만은 미처 채워지지 못한, 이를테면 여백에서 탄생하니까요."

p211

 "어딘가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어딘가 다르다는 건 모든 게 다르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이 세계에선 유전자의 염기 서열 하나만 살짝 옮겨져도 전혀 다른 종이 되고 마니까요.".....

p220

 "말씀드렸듯이 우린 파수꾼입니다. 겪어보지 않은 변화에 당혹스러울 뿐, 변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아요. 변화 역시 흐름의 일부니까요. 우리가 가장 위대한 존재가 아닐진대 어찌 사사로이 흐름을 돌리거나 거스르겠습니까. 경로가 바뀌고 동반자가 달라져도 강이 잘 흘러가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이 세계에 갖는 경의이자 신념입니다. 우린 그저 교만한 '그림자'가 흐름에 생긴 초유의 변화를 망가뜨리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p239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고 반드시 같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죠. 지금은 당신과 저도 같은 세계에 있지 않습니까."

p273

 "너희는 나약하고 가볍고 얄팍하고 뻔해. 뭘 모르는지도 모를 만큼 무지하면서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 가엽게도. 그러나 그 어리석음에 녹아 있는 불꽃은 다른 어느 차원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건 실로 어리석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아,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난 너희 세계와 그에 속한 너희를 아낄 수밖에 없는 거라고."

p314

 나는 나의 신이 되기로 했다. 오직 내 법칙으로 작동하는 나만의 우주의 신이. 고차원이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울질을 거부하기 위해 저울 밖으로 뛰쳐나간다. 폰으로도 퀸으로도, 어떤 체스 말로도 규정되지 않기 위해 판 자체를 뒤엎는다. 얼굴이 회오리치든 눈이 푸르게 빛나든 이제 그들의 신은 나의 신 앞에서, 주체가 되길 선언한 나라는 존재 앞에서 하염없이 무력하리라.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우주의 구원도 인류의 진화도 아닌, 이기적이고 편협한 지극히 '인간다운' 결말이다. '신'과 '우주'의 관점에서는 한낱 오류일 나의 결단은 그러나, 피조물에 불과했던 미물이 스스로의 질서를 이룩하겠다는 반역의 선포다.

 나는 단 하나의 기회, 단 한톨의 씨앗으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떤 남자의 운명을 돌이키기를 택했다. '흐름'에 익사한 남자의 운명을. '흐름' 자체를. 살아 있는 것만이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 난 살아 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틔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불꽃, 아니, 있는 힘껏 만개한 타오르는 열화였다.

 p316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임에도, 스스로 신이 된다는 것의 무게는 그러했다. 전능한 군림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단 하나의 기적 때문에 가없는 상실을 견뎌야 하는 것. 정답 따위 없는 자신만의 우주에서 그 선택의 종착지가 파멸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를 끌어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기도이자 형벌인 내 결정에 다만 후회는 없었다. 내가 길을 돌린 어떤 남자의 흐름이 또 다른 누군가의 무언가와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 수 있으랴.

......

 이 모든 일의 어디부터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필연이었을까. 온갖 연의 복판에서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심하게 훼손됐거나 끝내 이탈되었을지 모른다.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동시에 혼자서는 도저히 확보하지 못했을 한계 너머의 뭔가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는 재단할 수 없다. 그러나 난 그만한 걸 얻기 위해 그만한 걸 잃은 것이고, 그만한 걸 잃었기에 그만한 걸 얻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게 이 세계의 추는 양옆을 묵직하게 오가며 지독히도 고르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거라고.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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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의 새 - 2025 박화성소설상 수상작
윤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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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읽었다. 훅 재미있었네.  


자유의지.

완벽한 톱니에 걸린 티끌 하나와...

오랫만에 홀랑 반한 소설.

마지막 진율의 선택은?

이렇게 등장인물이 번갈아 서술되는 소설이 요즘 자주 잡히네.

SF인듯 아닌듯. 개연성, 상상력, 재미까지 있다.

난 좋았음.

내가 그녀라면 하면서 진율의 마음을 상상해보게 된다.


자다가 죽은 젊은 사람이야기를 듣고 불면이 생겨버린 진율

생선을 잘 바르던 갑자기 죽어버린 도준 옆에 있었던 차수지.

생경함. 분노. 

어렸을때 이상한 일. 꿈 없어진 밤.

잠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수면부족.

천문연구원. 기자.

묘하게 이야기가 재미있다. 얼른 끝까지 읽고 싶게.

차수지. 진율 모두 알과 새를 만난 거네.

평행 세계관인가. 삼체 느낌도 나고.

도준의 죽음.

좀 철학적이기도 하고.

자두에이드컵. 꿈을 잃었던 진율과 도준의 여친 차수지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는데, 어느 순간 둘이 헷갈리기도 하고.

진율이 새였다가?

'우연'

앎의 격차, 그림자, 흐름을 따르는 쪽, 장악해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

파수꾼.

새, 새알, 거북이, 상징인가.

미리내여행사까지.

도서관, 여백.

하비스커스 차를 마셔야겠다.

입구에 초록색 차양이 있는 좋은 음악을 틀어놓는 카페도 하고 싶네.

새가 선택한 진율이 둥지였나?


한번 읽는 걸로는 안되고 여러번 읽어야 제대로 알게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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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을 폭파하라
구소은 지음 / 검은모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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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썼어야 하는데 누락됐었네....

재미있게 읽었다.

보들보들...착해지는 이야기.


여러가지 이야기가 겹친다.

등장인물은 파스칼, 한울. 기타등등.  

문제가 생겼는데도 그냥 두는 에펠탑을 제대로 다시 하기 위해 폭파하는...


그 과정에서 파스칼과 한울의 개인사...그리고 살짝 등장하는 파스칼의 지인들...

그냥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여러가지 생각들을 부른다.


그린 듯한 파리풍경.

파스칼의 생각 빌어 얘기하는 자폐이야기.


검은 모래라는 출판사...페북에서 봤다.


스물셋에 국제 미아가 된 자폐 청년 한울이 12년 노숙자 파스칼을 만나게 된다.

말도 안통하는데도 한울을 데리고 다니는 파스칼.

아버지가 목사였는데...씁슬하다. 가족이 자폐면 힘들긴 하겠지...나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뭐라 할 순 없지만....

식구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존재였는데 파리에서 파스칼, 미루, 자끄를 만난거?

파스칼의 과거, 파스칼이 꾸는 꿈. 한울이 꾸는 꿈....

자꾸만 에펠탑이 무너지는 꿈을 꾸는 파스칼.

에펠탑이 무너질가봐 폭파시키기로 하는건가...

파스칼의 아프고 슬픈 과거.


결국 해내고 해피엔딩.

난 좋았다.

따스한 파스칼, 한울도. 새로운 에펠탑도 보러 가고 싶다.


p53

...자네가 내 친구 파스칼을 만난 건 행운이야. 꽤 섬세하고 지적이면서도 자상한 친구지. 뭐, 예전엔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야. 사람은 늙을 필요가 있어. 대체로 순해지거든. 물론 정반대로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p91

 장, 살다 보면 해선 안 되는 말이 있고, 할 수밖에 없는 말도 있어.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라는 거야. 안 하는 게 좋지. 그러나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있어. 그건 꼭 나쁘다고 할 수 없어. 말하자면 좋은 거짓말이라는 뜻이야. 거짓말이 꼭 필요할 때가 있거든. 어떤 위험한 상황이나 어려움에 처한 경우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지. 말하자면,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예를 들면 이래. 어떤 거짓말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슬픔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또 싸움을 말릴 수 있다면, 거짓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p102

 살아오는 동안 자폐증을 앓는 사람이 내 주위에 별로 없었다. 오래전 친구의 아들에게서 봤고, 한동네 살던 소년을 가끔 만난 게 전부다. 자폐는 증상이지 결코 병이 아니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우리가 소위 일반적이라고 규정한 것들과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일 뿐이다. 장애는 인내심과 시간 그리고 주변의 도움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연유로 이 세상과 사회와 사람을 향한 문이 고장 난 것인지도 모른다. 고장 난 채로 자기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면 그런 삶도 있다는 걸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결함이 있는 문은 고치면 된다. 다만 무리하게 고치려다가 오히려 망가뜨릴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고장 났다고 고물 취급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자폐증을 지닌 사람들이 정상이고 우리가 심하게 고장 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인 셈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이 자극만 없으면 전혀 위험하지 않을뿐더러 아주 조용하다는 걸 봐왔다. 게다가 그들이 가진 재주나 재능이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외눈박이 마을에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면 정상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도 어느 순간 비정상인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어쨌든 장애를 가졌다는 것으로 나는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그럴 권리가 내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없으니까.

p146

 ...이미 결정해서 진행 중인 일에 지나버린 가능성은 무의미하다. 다른 말로 하면 후회라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후회는 어리석은 짓이다. 궁하면 통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러니 계속 직진하는 거다.

p169

 ...자폐란 당사자가 처한 환경이나 심리적 상황에 따라 최악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소위 정상이라고 하는 삶을 순조롭게 살 수도 있다. 정상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상황에 따라 감정기복이 심하거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했다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자폐로 진단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감정과 행동을 보여줄 뿐인데 환자 취급하는 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결례다.

p253

 제가 용서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운명이 우리 모두에게 불행을 던졌던 거예요. 그것도 한순간에. 그때는 아빠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지만, 살다 보니 세상에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운명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일도 있잖아요.

p285

...굉장히 추운 겨울이 왔어. 얼어 죽지 않으려면 벽난로에 불을 피워야 돼. 그러니까 불을 피워 따뜻해지는 것이 소원이야. 벽난로에 불을 피우려면 장작이 필요할테고, 나는 그 장작을 희망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잖아. 소원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희망이 이루어지길 소원한다는 말은 안 하지.

......

 그래,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 그렇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니야. 마음먹기에 달린 일도 충분히 많거든. 아마 나중에라도 소원이 생기면 넌 꼭 이룰 수 있을거야.

p299

...나는 이제 알았다. 행복은 토막토막 느끼던 기쁨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 걸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모르는 게 유감이다.

p374

 내가 진짜로 수호천사면 좋겠네. 참, 내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장, 한국으로 돌아가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해. 그리고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 하고 싶은 일과 가장 잘하는 일이 일치할 때, 넌 반드시 성공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꼭 합니다. 약속합니다.

p376

 괜찮습니다. 살다 보니 세상에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일도 있습니다.

p382

 이틀의 자유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작별은 언제나 슬프다. 그렇다고 슬픔만 있는 건 아니다. 작별 속에는 다시 만날 희망도 있다. 희망이 있는 한 소원을 이룰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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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9  

 사회 민주주의에 따르면, 모든 일은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 평등. 정의. 연대는 사민주의자들의 핵심 가치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와 평등,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내놓지는 않는다. 사회는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 '더 많은 정의'를 위해 끊임없이 힘을 합쳐 나아갈 뿐이다.

 사민주의자들은 경쟁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정한다. 또한 단번에 완벽한 세상이 이루어지리라 믿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조금씩 줄이고 복지 혜택을 늘려 가는 가운데, 조금씩 세상은 살기 좋아지리라 믿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보편 복지'와 '보편 의료', '국민 연금과 실업 급여', 같은 직업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봉급을 받는 '표준 임금제' 등은 사회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꼽힌다.

p73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꿈구었던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반면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욕구는 만족시킬 수 있어도 탐욕은 채울 길이 없다"고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필요한 만큼의 소비'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우리 사회가 모두에게 보장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으며지나치지 않은'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p91

 지도자가 사라진 순간, 포퓰리스트가 지배하던 나라는 위기를 맞곤 한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혼자 국가를 좌지우지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정치에 필요한 능력을 기를 공간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곳은 지도자가 사라져도 사회가 흔들리지 않는다. 국민의 뜻을 귀담아듣고 펼치는 과정이 제도로 굳어져 있는 덕분이다. 시민들도 평소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까닭에 민주주의를 이끌 능력이 몸에 배어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 자리 잡기 어렵게 한다. 다양한 언론들은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낸다. 이 가운데서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부족한 주장은 걸러지곤 한다. 아무리 귀에 끌리는 소리를 늘어놓아도, 시민들은 늘 반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23

 물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될 경우도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인생을 허비했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빅터 플랭클은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누구도 내 과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에 치열하게 뛰어들었던 경험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그때 느꼈던 뿌듯함 또한 누구도 앗아 가지 못한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튼실했던 삶의 순간은 아무도 앗아 가지 못할 '나의 가치'로 내 삶을 굳세게 다잡아 줄 것이다.

 사르트르도 비슷한 말을 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앙가주망'(참여)하는 데 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행동하는 것이어야말로 내 인생을 스스로 만들고 개척하는 일이다. 남들이 나를 받아들일지, 사회가 나를 인정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매 순간의 결정과 행동이 어느 누구도 빼앗지 못할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p138

중도: 치우치지 않은 바른 도리 또는 집착과 분별을 떠난 경지

반야: 온갖 분별과 망상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앎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되는 마음의 작용

공성: 온갖 것이 모두 공이라는 이치를 깨우칠 때 나타나는 본성

여래장: 여래(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중생의 청정한 본마음을 가리킨다.

p141

 해체주의는 솔직하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옳고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점에서 해체주의는 정의롭기까지 하다. 세상의 주된 것, 바람직한 것, 올곧은 것이 없다면, 진리를 내세우며 상대를 공격할 명분이 없다. 나아가 모두가 중심이고 옳고 바람직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그 자체로 다 가치 있고 소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해체주의는 이원론을 없애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앞서 살펴보았듯, 인간의 생각과 언어는 이원론을 넘어설 수 업삳. 다만 이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김보현 교수는 데리다의 노력을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에 견준다.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 한 장 한 장은 뜻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여러 장이 쌓이고 모이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차별을 막기 위해 차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려는 해체주의의 노력에는 '뚜렷하지 않지만 분명한'메시지가 있다. 불교의 고승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봐야 할 것은 달이다. 해체주의자들의 말장난에 머리 싸매기보다, 말과 행동으로 전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더 주목할 일이다. 물론, 해체주의는 한 가지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이해를 그 자체로 즐길 일이다.

p152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아무런 전망도 저항도 하지 못하게 하는 불임의 유행'이라며 강하게 몰아붙인다. 예를 들어보자. '인종차별은 나쁘다'는 주장은 차별을 받는 사람들만 고개 끄덕일 소리가 아니다. 인종 차별이 역사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은 진리에 가깝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나 '역사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반론을 펴기 위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모으지도 못한다. 이것 자체가 다양한 생각을 억누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생각이 가치 있다면, 올곧지 못한 주장에 반론을 펴야 할 이유 또한 흐릿해진다.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과 목표 의식이 스러진 사회, 사람들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연예인 소식이나 스포츠 뉴스가 정치나 인권 같은 이슈와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야기 되는 시대, 과연 문제는 없을까?

 모든 사상은 시대의 문제를 담고 있다. 모더니즘은 차별이 심하고 경제가 주저앉은 시대를 이기기 위한 사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낳은 환경 파괴, 획일화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운데 태어낫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도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또다시 '포스트'시킬 사상은 무엇일까?

p160

 정치학자 워커 코너는 말한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다."무엇을 이루기 위해 고생하는지 아는 사람은 까닭 없이 시달리는 이들보다 힘든 현실을 잘 견뎌 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인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사실적으로'분명하게 일러준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운찬 예술'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은 늘 '낙관적 전망'을 담고 있다. 현실은 괴롭지만 노력하면 결국 모두가 잘사는 사회주의를 이루리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식이다.

p187

... 파시즘이라는 말은 라틴어 파스케스에서 유래했다. 파스케스는 로마의 최고 행정가가 들고 다니던 상징이었다. 도끼에 나뭇가지들을 돌돌 묶은 모양인데, 도끼는 지도자를, 나뭇가지는 전체 시민을 뜻했다.

 무솔리니는 강력한 지도력과 단결을 나타내는 파스케스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그가 이탈리아 국가 파시스트당을 만들면서 세상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파시즘이란 한 마디로,'지도자를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강력한 독재 권력'을 뜻한다.

 등 따습고 배부른 상황이라면 파시즘은 헛소리처럼 들린다. 자유를 억누르고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하라는 요구가 달가울 리 없다. 그러나 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는 어떨까? 살아남기 위해서 선장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p195

내 삶이 신산스럽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누구'도는 '무엇'때문인가? 이 '누구'또는 '무엇'을 없애고 내 삶을 제대로 세우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대의 논리를 파시스트들의 주장과 견주어 보라. 과연 그대의 삶은 '그 사람' 또는 '그것'때문에 꼬인 것일까?

p245

 혼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농부는 남는 농산물을 나눠 줘도 상관없다. 하지만 '상품'을 만들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자신도 필요한 것을 사서 살아가는 농부는 그럴 수 없다. 자기가 생산한 상품이 공짜가 되면 수입도 사라져 버리는 탓이다. 그러면 살아갈 방법이 없다. 따라서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쌓아 두고 버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편에서는 물자가 넘쳐 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굶주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p273

 수능 성적을 올리는 데는 야간 자율 학습이 꽤 효과적이다. 하지만 평생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한다면 어떨끼? 개발 독재도 마찬가지다. 개발 독재는 결코 영원히 이어지지 못한다. 성장은 공평한 분배와 민주주의라는 열매로 맺어져야 한다. 성장만 있고 분배와 민주화가 없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 제 뜻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부잣집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그렇지만 시끄러운 정치판, 주춤한 경제를 보고 있으면 여러가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진정 개발 독재는 사라져야 할 악일까? 민주주의는 최상의 정치 제도라고 할 수 있을가?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단순히 더 많은 수입을 바라기 때문일까? 민주주의를 한층 발전시키려면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할테다.

p278

 한스 큉은 신유교 윤리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서도'다. 이는 자신이 우너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둘째는 '인도'다. 내 뜻대로 하고 싶으면 남이 먼저 자기 뜻대로 하게 하고, 내 뜻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면 남이 원하는 바를 먼저 받아들이는 태도다.

p315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의 잘못을 바로잡기보다,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좀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 않을까? 옛 일본은 열등한 동양 세계에서 벗어나 우수한 서구 문명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OECD''선진국'등의 잣대에 목을 매는 우리의 모습은 그들의 절절했던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의 발전이 다른 이들에게는 억압과 착취가 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침략의 논리인 오리엔탈리즘을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는 이유다.

p332

다운시프터: 고소득이나 빠른 승진보다는 비록 저소득일지라도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사람들. 다운시프트는 원래 자동차를 저속 기어로 바꾼다는 뜻이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듯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생활의 여유를 느끼며 삶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p341

 관공서에서 하는 일은 다르다. 관료적 관리에서 조직원들의 역할은 이윤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에 있을 뿐이다. 관료 조직에서 돈을 버는 것과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업무'다. 돈을 쓰는 쪽(예산을 집행하는 부서)에서는 정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보다, 절차와 규정대로 해서 책잡히지 않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은 누가 질까? 비난의 손가락은 관료 조직으로 향하지 않는다. 비난을 받는 쪽은 법을 만든 이들과 정책을 펼친 정치가들이다. 이 때문에 관료들은 정책이 불합리하다고 해서 굳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이유가 없다. 큰 조직의 분위기가 복지부동, 무사안일로 흐르곤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만약 이윤 관리를 좇아 조직을 합리적으로 꾸려 온 최고 경영자를 모셔 와 관료 조직을 꾸리게 하면 어떨까? 이는 지금도 공기업 등, 관직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제스는 <관료제>에서 별 효과가 없을 게 분명하다고 잘라 말한다.

관료 조직의 개혁을 위해 기업가들을 관료 조직의 장으로 임명해봤자 소용이 없다. 예전에 기업가였다 해도, 정부 관청의 책임을 맡으면 그는 사업가가 아니라 관료가 되어 버린다. 그의 목표는 더 이상 이윤을 낳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새로운 목표는 규칙과 규정을 제대로 따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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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

 때로는 틀리고 실수하면 어떤가. 중요한 건 지금보다 나아지는 것이다. 자기 신뢰가 삶의 뿌리가 되는 한, 우리에겐 틀려도 좋은 자유가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향해 '당신은 틀렸어'라고 단정 짓는 것이야말로 틀린 것이다. 완전히 맞고 완전히 틀린 삶이 없는 한,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이 책을 통해 그 다정하고 유연한 시선을 건네고 싶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 누려야 할 '틀려도 좋은 자유'다.

p16

 세월이 켜켜이 쌓인 파리 골목길은 '길을 잃어야만 길을 찾는다'는 나의 믿음을 실현한 꿈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길을 정하고 나서지 않았기에 길을 잃을 것도 없었다. 매 순간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ㄴ 것, 그것이 그날의 행운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들른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일상을 다시 시작할 용기와 힘을 주었다.

p23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모험을 멈추지 않는 것, 나아가 그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삶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

p24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한 삶. 그 카오스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고대 그리스 회의론자들은 에포케epoche 즉, 판단중지를 강조했다. 모든 것은 좋다 나쁘다를 한 번에 판단해서는 안되며, 있다 없다를 보이는 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기 시작한 '메타인지와 맥락적 사고'다. "전체를 훤히 내려다보지 못하는 이상, 이 길들이 셀 수 없이 많은지 아니면 단 하나에 불과한지 확인한 길이 없다."이렇게 말한 카프카 역시 판단 유보에 자신을 맡긴 듯하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고 하는데,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고 태어나 죽는 것이 곧 해탈이라는 뜻이다.

p27

 요즘 신경과학자들의 강연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마음과 감정'이 건강한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소통'은 운명이다. 우리는 소통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와 타인, 그리고 시대와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위트와 순발력의 선율이 지속되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손님처럼 맞이하고 '다양한 시선'이라는 악기로 즉흥연주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이라는 스탠리 휘트니의 말은 '경계 없음의 시대'를 겨냥한 재즈적 표상이다. 정해진 것은 없다. 필요한 것은 세상을 향해 자유롭게 열려 있는 재즈의 정신이다. 즉흥연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p30

 스캔은 사진, 문서를 복사해서 이미지 파일로 저장하거나 프로그램의 내부를 검색해 필요한 항목을 찾는 것을 뜻하지만 동사로는 '무엇을 유심히 살피다'라는 의미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바디스캔 명상은 마치 스캐너로 스캔하듯이 각 신체의 부분을 집중해서 관찰하며 몸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명상이다.

 알아차림은 다시 명확하게 보는 것이다. 스캔과 알아차림은 그대로 살피고 느낀다는 의미에서 많이 닮았다. 바디 스캔은 단순히 몸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서 열려 있는 감각으로 '완전히 깨어남'이며, 내 몸의 감각을 세밀하게 느끼고 이완시킴으로써 몸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눈을 감고 신체의 각 부분에 조용히 머물며 집중하다 보면 긴장된 곳이 느껴지는데 그곳에 바로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으로 몸을 수용하는 순간, 호흡은 부드러워지고 억눌린 감정들이 고요해지며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p45

...사진가의 보는 방식은 주제 선택에 반영된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 또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p51

 하지만 "인생이 어떻든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했던 그녀의 선언은 지금도 여전히 재생되고 있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도 반짝일 필요도 없이, 오직 자신으로 살았던 울프의 삶 또한 재생될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어 살아가는 게 어려워진 세상이라면 더더욱.

p58

 재즈에는 왜 즉흥연주가 중요한가요?

재즈에서 즉흥연주는 악보 속 테마에 대한 연주자 고유의 해석이자 의견입니다. 

때로는 질서를 깨는 듯하지만, 전체적인 개연성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남과 다른 나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즈의 핵심입니다.

p79

 ...연암의 풍자가 남을 조롱하는 데 있지 않고 공감 속에서 모순을 발견하려 했던 것처럼, 패츠의 풍자는 흑인 연주자로서 겪는 사회적 제약에서 발현된 생존의 예술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웃음은 단순한 농담이 아닌 가장 세련된 방식의 저항이었다.

 실학자 이전에 사는 방식을 예술로 만든 사람이 연암이었다면, 흥겨운 연주로 관객을 즐겁게 한 패츠월러는 삶의 고통을 유쾌한 리듬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왼손의 규칙과 오른손의 즉흥은 전통 질서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던 패츠의 삶이자 연암의 삶이었다. 이들은 모두 경직된 질서를 가장 자유롭게 해석한 천재들이기에 '재미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p86

 빠르고 간단한 것, 바로 결과나 반응을 알 수 있는 것에 익숙해진 삶. 이제 다시 비워낼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상력도 활기를 잃었다. 프루스트가 과제로 삼았던 '삶에서 마주쳤던 사물들에 충실하기'를 삶에 적용할 시간이다. 다행히 연습할 때의 집중력은 그대로다. 비법은 하나다. 매번 연습한 그 음을 처음 부르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그러면 천 번을 노래해도 지루하지 않다.

p103

 지루함의 한계를 견뎌내는 건 사물이 아닌 시간에 대한 '응시'다. 에릭 사티는 우리가 <짜증>을 감상하지 않고 그저 응시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밀어내고 싶어 하는 지루함, 짜증, 권태는 에릭 사티의 독특한 풍자와 역설이 담긴 작품을 통해 우아함, 부드러움, 친밀함으로 환원된다.

p106

무엇인가를 시도할 계획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렇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시작되는 그의 시는 삶에 대한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또 끝까지 가기 위해서 '고립'은 선물이라며 위로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하고, 하고, 하라.

또 하라 끝까지, 끝까지 하라. 너는 마침내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니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멋진 싸움이다.

p108

...그리고 끊임없는 탐구 정신으로 변화를 추구했다. 실패에 초연하는 자세, 삶의 고통을 마주하는 능력, 진실을 향한 갈구, 글쓰기와의 투쟁, 담담한 낙관주의,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 현실에 대한 비판, 인생의 공허함에 대한 통찰력, 어딘가에 늘 한줄기 빛이 있다는 희망, 머지 않은 소통과 조화......그의 시와 소설과 산문은 결코 재즈가 아니다. 컨템포러리한 삶에서 보여준 모든 삶의 양식, 그것이 재즈다.

p125

 바흐음악은 뇌에 안정감을 주고 반복적이고 질서 있는 구조로 인해 불만, 스트레스, 과잉 자극을 줄이며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바흐의 곡은 복잡하지만 대위법적 구성이 많아서 뇌의 좌우 반구를 동시에 자극함으로써 집중력과 인지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한다. 꾸준히 듣다 보면 창의력이 증진되고 문제 해결 능력이 개선되는데 이것이 일명 '바흐 효과'다.

p143

 ..."좋은 재즈 청취자는 단순히 음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즉흥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순간을 목격하는 존재이며, 재즈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실천하는 윤리적 행위다. 연주자와 청중의 관계 또한 윤리적 듣기의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재즈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 듣는 것, 그러나 그 순간을 오롯이 듣는 것이 중요하다. 즉흥연주를 통해 실존적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와의 관계를 실천하는 '진정한 듣기, 공감적 경청'이다.

 말이 빠른 것은 마음이 급하기 대문이다. 말이 빠르니 발음이 불분명해지고,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니 말소리가 커진다. 말소리가 커지면 신경도 예민해진다. 편안하지 않은 상태가 되면 대화의 포인트를 놓친다.

p177

 재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블루노트'이다. 장음계의 음을 반음 낮추어 연주하는 것이다. 반음과 온음 사이의 미묘한 음색은 인간의 감정(슬픔, 희망, 긴장, 해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재즈에서의 반음은 서사적 장치로서 음과 음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준다. 같은 멜로디라도 반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하다.

 중세 음악에서 '질서의 균열'을 의미했던 반음이 재즈에서는 '인간 내면의 혼란과 해방'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다. 거대한 우주적 질서가 아닌 개인의 자유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재즈에서 불협화음으로 쓰인 반음은 내밀한 개인성을 나타낸다. 중세 음악이 추구한 구조와 질서가 '선명함의 세계'라면, 재즈의 본질인 즉흥과 감정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흐릿함의 세계'다. 이것은 표현의 유동성을 의미한다. 미세한 음정 변화는 다양한 해석과 감정을 낳는다. 반음이 중세 음악에서는 경계로, 재즈에서는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애매한 음으로 들리는 이 흐릿함은 인상주의가 표현했던 것처럼 '의도된 흐릿함'이다.

p189

촬영이 혐오스럽게 느껴지고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 지치고 무기력해진 최근의 끔직한 나날들도 내 작업 방식의 일부를 이룬다.

p196

"신화란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든 믿는 것이다. 그러니 신화 없이 또는 신화에 속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예외적이다. 그는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나 선조들의 삶 또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거나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p212

...알렉산더 테크닉에 중요한 것은 판단하지 않기와 하지 않기, 자제하기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과의 소통이 원활해지면 스스로를 치유할 힘이 생기기 때문에 예술 분야나 스포츠 외에도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p262

즉흥ㅇ은 지나온 것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미리 염려하지 않으므로 

지금 여기 이 순간야말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결심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한걸음도 허투루 내딛지 않겠다고

하루에 한 번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그리고 모든 사물에 나만의 이름을 지어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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