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2
...삶의 양식이든 생활이든 나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든, 모든 걸 직접 제어할 수 있다는 건 내게 괘 중요한 의미였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는 예측 가능한 통제 말이다.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자신이 속한 세계가 명확히 자신의 기준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 주차장의 차들을 보며 느끼는 균형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p156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당신들이 '우연'이라고 손쉽게 단정 짓는 수많은 것들 중 단 한 가지도요. 보잘것없어 보이는 먼지만 한 나사와 톱니조차 질서를 수호하고 흐름을 사수하는 거대한 설계의 일부입니다. 치밀하고 예술적으로 짜인 '필연'이죠."
p167
...목적지는 회사 근처 도서관으로 정했다. 도서관에서는 범주를 벗어난 일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또 제법 오래 머무르기에도 적당한 장소다. ....
p178
...한쪽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모든 걸 갖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0과100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하지 않나. 축 하나 반대로 뒤집으면 0은 곧 100이 되고 100은 곧 0이 되는 법이니. 모쪼록 뭔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철저히 감추는 것 외에 되레 모조리 표출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닫는 참이었다.
p202
'컵에 담긴 게 뭐든 그것이 속한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컵에 맺힌 투명한 물기는 보석 빛깔의 내용물과는 무관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컵에 담긴 것과 세계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 내 세계에 담긴 것이 그 세계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거대한 우주의 흐름 안에 속한 나 또한 어쩌면 소리 없이 뭔가를 움직이는 중인지도.
p206
"맞습니다. 전혀 이해가 안 가실 테지만 '우연'이라는 건, 실은 없습니다. 솔직히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그건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거든요. 불완전하고, 부조리하고, 부조화적인 세계에서나 통용되죠. 하지만 그래서 제법 낭만적이랄까요. 낭만은 미처 채워지지 못한, 이를테면 여백에서 탄생하니까요."
p211
"어딘가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어딘가 다르다는 건 모든 게 다르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이 세계에선 유전자의 염기 서열 하나만 살짝 옮겨져도 전혀 다른 종이 되고 마니까요.".....
p220
"말씀드렸듯이 우린 파수꾼입니다. 겪어보지 않은 변화에 당혹스러울 뿐, 변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아요. 변화 역시 흐름의 일부니까요. 우리가 가장 위대한 존재가 아닐진대 어찌 사사로이 흐름을 돌리거나 거스르겠습니까. 경로가 바뀌고 동반자가 달라져도 강이 잘 흘러가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이 세계에 갖는 경의이자 신념입니다. 우린 그저 교만한 '그림자'가 흐름에 생긴 초유의 변화를 망가뜨리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p239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고 반드시 같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죠. 지금은 당신과 저도 같은 세계에 있지 않습니까."
p273
"너희는 나약하고 가볍고 얄팍하고 뻔해. 뭘 모르는지도 모를 만큼 무지하면서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 가엽게도. 그러나 그 어리석음에 녹아 있는 불꽃은 다른 어느 차원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건 실로 어리석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아,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난 너희 세계와 그에 속한 너희를 아낄 수밖에 없는 거라고."
p314
나는 나의 신이 되기로 했다. 오직 내 법칙으로 작동하는 나만의 우주의 신이. 고차원이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울질을 거부하기 위해 저울 밖으로 뛰쳐나간다. 폰으로도 퀸으로도, 어떤 체스 말로도 규정되지 않기 위해 판 자체를 뒤엎는다. 얼굴이 회오리치든 눈이 푸르게 빛나든 이제 그들의 신은 나의 신 앞에서, 주체가 되길 선언한 나라는 존재 앞에서 하염없이 무력하리라.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우주의 구원도 인류의 진화도 아닌, 이기적이고 편협한 지극히 '인간다운' 결말이다. '신'과 '우주'의 관점에서는 한낱 오류일 나의 결단은 그러나, 피조물에 불과했던 미물이 스스로의 질서를 이룩하겠다는 반역의 선포다.
나는 단 하나의 기회, 단 한톨의 씨앗으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떤 남자의 운명을 돌이키기를 택했다. '흐름'에 익사한 남자의 운명을. '흐름' 자체를. 살아 있는 것만이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 난 살아 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틔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불꽃, 아니, 있는 힘껏 만개한 타오르는 열화였다.
p316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임에도, 스스로 신이 된다는 것의 무게는 그러했다. 전능한 군림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단 하나의 기적 때문에 가없는 상실을 견뎌야 하는 것. 정답 따위 없는 자신만의 우주에서 그 선택의 종착지가 파멸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를 끌어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기도이자 형벌인 내 결정에 다만 후회는 없었다. 내가 길을 돌린 어떤 남자의 흐름이 또 다른 누군가의 무언가와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 수 있으랴.
......
이 모든 일의 어디부터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필연이었을까. 온갖 연의 복판에서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심하게 훼손됐거나 끝내 이탈되었을지 모른다.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동시에 혼자서는 도저히 확보하지 못했을 한계 너머의 뭔가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는 재단할 수 없다. 그러나 난 그만한 걸 얻기 위해 그만한 걸 잃은 것이고, 그만한 걸 잃었기에 그만한 걸 얻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게 이 세계의 추는 양옆을 묵직하게 오가며 지독히도 고르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거라고.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