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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시티 - 딘 쿤츠 장편소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18
딘 R. 쿤츠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바텐더이다. 선술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적당히 말을 맞춰주며, 적당히 팁이나 받으며, ‘나서지 말고, 조용히 하고, 단순화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고, 자신이 가진 것을 즐겨라.’라는 나만의 철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바텐더이다.
사실 지금은 바텐더의 생활에 만족하며 하루하루 평. 범. 하. 게. 살고 있지만, 한때는 탐욕스러울 정도로 -나의 집 한쪽 벽이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미리 밝히면서…- 책을 많이 읽었고, 또 한때는 글을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사 년 전, 아니 정확히 삼 년 십 개월 사 일 전이라는 시간은, 나의 약혼녀 ‘바바라’가 혼수상태에 빠진 시점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에게서 약혼반지를 받고서 불과 한 달 만에 그런 모습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집, 나의 곁이 아닌 요양소에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나의 직장인 이름 없는 선술집과 바바라가 있는 요양소를 오가며 여전히 나만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평범하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삶에 평범하지 않음을 선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나의 차 와이퍼 밑에 한 장의 쪽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이 쪽지를 경찰에 가져가지 않아서 그자들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내퍼 군 어딘가에 있는 학교의 사랑스런 금발머리 여선생을 살해하겠다.
이걸 경찰에 가져간다면, 여선생 대신 자선 활동을 하는 할망구를 살해할 것이다.
결정할 수 있도록 여섯 시간을 주마.
선택은 네 몫이다.”
이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뜬금없이 남겨진 쪽지 한 장을 보고 뭔가를 선택하라니. 그것도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말이다. 나는 뭔지 모를 찝찝함에 친구 같은 형이자, 보안관 대리인 ‘래니 올슨’을 찾아가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도 별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결국에는 그냥 누군가의 조금 심한 장난이라 결론 내린다. 하지만 다음 날 여선생의 시체가 발견되고, 나에게는 두 번째 쪽지가 찾아온다.
“만약 경찰에게 달려가지 않아서 그들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어느 누구 하나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미혼 남자를 살해하겠다.
만약 경찰에 신고한다면, 아이 둘이 있는 젊은 엄마를 살해하겠다.
결정할 수 있도록 다섯 시간을 주마.
선택은 네 몫이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어느 누구 하나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미혼 남자와 아이 둘이 있는 젊은 엄마 사이에서, 어떻게든 뭔가 하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또다시 누군가의 장난일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무시하고 넘어가겠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야 말 것인가. 난 어떻게든 뭔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선택도 최선이 될 수는 없겠지만, 결국에는 경찰에게 달려가지는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이런 생각부터가 끔찍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보다는 아무래도… 흠…. 이 쪽지와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내가 뭔가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이 게임(혹은 악몽?!)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선택이라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고 남겨지며….
경찰에 찾아가지 않은 나의 선택에 따라 -안타깝게도-‘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어느 누구 하나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미혼 남자’가 살해된다. 하지만 그 남자… 그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에 엮이게 되는가?!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끊임없는 궁금증과 압박감이 나를 조금씩, 그러면서도 빠르게 갉아먹는다.
흠…. 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싶을 것이다. 이 장난 같은 쪽지들로 도대체 뭘 시작하고, 뭘 선택한다 말인가, 싶을 것이다. 물론 나의 실제이야기가 아닌 소설 속 주인공 ‘빌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빌리가 아닌 ‘나’로 이야기를 시작해봤다. 당연한-혹은 정반대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장르의 소설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주인공이라는 이름의 ‘빌리(혹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주인공이 되어서….
『벨로시티』는 어느 선술집에서 네드라는 사람과 이방인과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리고 바를 담당하는 빌리가 조금씩 이야기 속에 섞여 들어가면서 차츰 중심은 그쪽으로 옮겨간다. 이야기의 제 삼자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가는 짧은 순간은 평범함을 좀 더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아닌 단역, 혹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인이라도 어딘가에서는 결국 주연이라는 -단순하지만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생각들을 글로 옮겨놓은 것 같아 ‘평범한 일상에 닥쳐온 사건’이라는 기본적인 배경과 무척 잘 어울리는 시작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런 ‘평범한 일상에 닥쳐온 사건’이라는 설정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라 생각된다. 당장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래서 이야기에 집중도 더 잘 할 수 있게 되고 말이다.
이 이야기의 최대 궁금증은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그와 동일 선상에서 도대체 이런 일이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빌리에게 일어났는가, 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범인은 밝혀지지만, 왜 하필 빌리인가, 라는 질문에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어진다.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악이 존재하고, 그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 악을 제거하면서도 왜 하필 빌리(혹은 나)인가, 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아내기란 힘들었던 것이다. 단순히 개연성의 부족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아쉽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면서,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삶에서 왜 하필 나인가?! 라는 질문보다는 뭔가 또다른 질문이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벨로시티Velocity’는 속도라는 의미에 방향성이 더해진 의미라고 한다.) 속도감 있게 달려 나간다. 살인이 시작되고, 살인을 위한 선택-자의든 타의든-이 이어진다. 그 단계별 속도는 점점 빨라만 지고, 그 속에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의심 또한 커져만 간다. 하지만 그렇게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누군가를 의심하기에는 단서도 부족할뿐더러,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조차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것이 ‘벨로시티’의 전부냐?! 그렇지 않다. 앞서 ‘벨로시티Velocity’는 속도에 방향성까지 더해진 의미라고 했다. 솔직히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저 속도감에만 집착하면서 달려 나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방향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사람이 -사실 그리 평범하지만도 않은 것이 빌리 아니던가?!- 전혀 평범하지 않은 모습으로 어려운 순간들을 헤쳐 나가는 것은 결국 한 방향, 한 사람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바바라라는 사랑의 방향으로…. 자신 보다 더 소중한 사람인 바바라를 위해 달려 나가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생존본능에 의존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평범하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들도 어느 정도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험한 일을 겪고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 그 순간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 말이다.
“죽음은 인간이 티격태격하는 것들을 보다 큰 관점에서 보도록 하죠.” -P23
어떻게 보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악과 선의 구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죽음과 어둠을 몰고 다니는 그 악이라는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퍼져나가는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에서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빌리가 보여준 많은 행동들이 죽음, 그리고 어둠을 통해서 역설적이게도 삶과 밝음을 발견하는 과정들이 아니었을까?! 빌리(그리고 딘 쿤츠…)가 보여준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들과 -그와 정반대인- 초인적인 모습들이 결국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가장 원초적이면서 절대 필요한 것들을 찾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바바라를 향하고 있던 사랑과 같은 소중하지만 잊고 살아갈 수도 있는 어떤 것들을 찾아가도록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대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책하고 또 누군가를 원망하며 주저앉거나, 주저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빌리의 모습들을 좀 더 자세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답도 주어지지 않을 물음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이런 순간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순간 속에서도 작은 빛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도록 말이다. 『벨로시티』를 통해서, 빠르다는 ‘속도’가 전부인 것만 같은 요즘의 세상에서 나는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