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사 1
김진명 지음 / 대산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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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나라에서 책 팔아 큰 돈 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김진명이란 작가가 있죠.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난리를 치는데도 전 지금까지 김진명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음모 이론을 마구 남발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선입견도 있었고 그동안 인연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제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재미있다고 갖다 주길래 읽어 본 겁니다.

재미있더군요. 아무리 통속 소설이라고 해도 그렇지, 역시 예상대로 문체도 빈약하고 스토리도 얼기설기 허술한 데가 많았습니다만 배울 점은 있었습니다. 앞뒤 재지 않고 일필휘지로 갈겨 쓴 듯한 배짱과 용기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 조금 ! 분명 대중을 상대로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저에겐 배워야할 점이었습니다.

대중소설이나 영화에 도박은 언제나 인기 있는 소재입니다. 도박이 빚어내는 사건들은 인간사 어떤 이야기들 보다 극적이니까요. 주위엔 자칭 도박 고수라는 사람들이 널렸습니다. 강원랜드가 개장 되면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인터넷의 가장 인기있는 온라인 게임 사이트는 모두 고스톱 아니면 포커 게임입니다. 아무리 경기가 안 좋아도 도박의 열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뉴스엔 심심치 않게 사기 도박 사건이나 도박으로 패가망신하고 소중한 목숨 마저 버린 사건들이 올라옵니다. 로또 열풍도 크게 보면 도박심리의 일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도박을 좋아할까요 ? 물론 도박의 마력은 우선 인간의 탐욕을 자극한다는데 있습니다. 남의 돈을 따먹겠다는 욕심, 한방에 큰 돈을 만들어 보겠다는 허황된 꿈, 이런 것들이 도박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차 요인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도박 자체가 주는 승부의 스릴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문적인 도박꾼들이 아닐지라도 도박의 마력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들이라면 도박의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이건 비단 승부 본능이 강한 남성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개 여성 중에 뛰어난 도박사가 드문 까닭은 여성들이 그 유혹을 잘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서 여성들은 처음부터 도박을 접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한 번 그 맛을 보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설이 길었는데 이 책은 도박 중에서도 카지노 도박, 그 중에서도 바카라를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바카라는 자세히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홀짝을 맞히는 게임처럼 단순한 형태의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외형적으론 가장 단순해 보이는 이 게임이 도박 중의 도박이라고 하니 재미있습니다.

007 영화에 보면 모나코 몬테카를로 같은 세계적인 카지노에서 제임스 본드가 턱시도를 차려입고 유럽의 갑부 상류층과 거액을 놓고 게임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 게임이 바로 바카라입니다. 이 게임이 도박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는 실력 보다는 운에 운명을 걸고 베팅에 의해 승부가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카지노를 상대로 하는 게임인데 궁극적으론 절대로 카지노를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고 합니다.

이론상으로론 50대 50의 승부라고 하지만 인간의 탐욕 때문에 결국엔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이라는 것이죠. 이 게임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바로 김진명이 소설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사 보셔도 되고 카지노에 관한 책 아무거나 사 보셔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책에 다 나오는 해법이 있습니다. 핵심만 얘기하면 그 비결은 절제입니다.

모든 도박을 이기는 방법은 도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도박을 하면서 이기는 법이라야 비결 아니냐 라고 한다면 그런 비결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부분적으로 적게 지고 가끔 이길 수도 있는 방법이 절제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이론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이 비법을 익히고 또 익혀도 도박판에 앉는 순간 완벽하게 절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오죽하면 주식 투자 같은 고도로 이론화된 분야에서도 전문가들 조차 컴퓨터에게 투자를 맡기겠습니까 ! 결국 도박을 이기는 방법은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런 책도 읽을 필요가 없겠죠. 맞습니다. 도박에 이기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이런 책도 읽을 필요 없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도박소설과 영화는 결국 같은 내용입니다. 김진명의 "도박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책에서도 배울 게 있습니다. 우리가 느낄 수 없지만 인생 자체도 도박과 유사하거든요. 수 많은 정자 중에서 하나의 정자가 난자에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생은 도박을 닮았습니다. 살아 가는 동안 만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들은 도박판의 베팅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 5분 뒤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리석은 판단들은 또 어떻습니까 ! 결국은 죽음이란 결과에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도박사의 운명과 꼭 닮았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이길 수 있는 방법 또한 없습니다. 그나마 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인생을 즐기고자 한다면 절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도박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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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nnn11 2014-12-0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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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카 2014-12-1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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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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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 싸부님 안녕하시죠 ?
 
벌써 십몇년이 흘렀네요.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살기가 좀 힘들어서 싸부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요즘 제 심정이, 꼭 싸부님을 처음 만나던 이십대 초반,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금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쉬 잠들지 못하던 그때 같아서 싸부님 생각이 유달리 많이 났습니다.
 
싸부님은 천국에서도 여전하시죠 ? 카잔차키스 두목님은 다시 만나셨나요 ? 두 분이 다시 뭉쳤으니 또 신나게 먹고 마시며 젊은 과부 꼬실 궁리에 바쁘시겠군요. 참 부불리나 아줌마도 잘 계시죠 ? 싸부님이 계시니 천국도 좀 시끄럽겠어요. 입만 열면 하느님 욕을 해댈테니 아무리 인자하신 하느님이라도 좀 짜증이 나실 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시죠 ? 저는 싸부님이 일러주신 말씀들 다 지키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싸부님 덕분에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여전히 카잔차키스 두목님처럼 쓰잘데기 없는 책 좋아하고 개나 물어 갈 사색에 자주 빠지긴 하지만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는 법을 배웠고 여자를 인간을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뭐 아직 싸부님 같은 경지는 아니지만서도.
 
저는 암만 살아도 싸부님 발치에도 가 닿지 못할 것 같아요. 제겐 싸부님처럼 실천할 용기가 없어요. 그렇다고 카잔차키스 두목님처럼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덴 싸부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주저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틀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건 싸부님을 처음 만나던 당시의 두목님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싸부님이 그렇게 버리라고 했던 "왜요,왜요?" 하는 질문과 항상 달아 보고 재 보는 마음속의 저울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틈날 때마다 싸부님 어록을 펼쳐들고 줄 쳐가며 다시 외우곤 하는데 돌아서면 금방 잊어 버립니다. 싸부님처럼 자유로운 인간, 야성의 영혼을 가진 진짜 사나이가 되길 바랬지만 점점 싸부님 가르침과는 반대로 가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지금 제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싸부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정열"과 "용기" 그리고 "사랑" 입니다. 끊임없이 독신(瀆神)의 말을 쏟아 놓으면서도 가장 신께 가까이 가 있고, 바람둥이 난봉꾼 짓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지만 누구 보다도 패미니스트이며, 젊어서 사람 목도 쉽사리 따곤 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명예도 국가도 다 내팽개칠 수 있었던 진짜 사나이, 참 용기를 가진 자유로운 인간 조르바 ! 그렇게 싸부님을 닮고 싶었지만 지금의 제 모습은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합니다.
 
싸부님 제게 다시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시오. 세상과 맞서, 신과 악마와 맞서, 인간과 자연, 아니 우주와 제 영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빌어 주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죽어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싸부님을 만나면 자신있게 산투리 켜는 법과 춤 추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싸부님 사랑합니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재미있게 지내십시오.
 
싸부님의 영원한 제자 술보 올림.
 
추신: 참 카잔차키스 두목님과 천국에서 다른 건 다 하셔도 사업은 다시 하지 마세요. 두 분은 아무리 봐도 사업엔 재주가 없는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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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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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줄을 장식하기 위하여
꿈을 꾼 것이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45년 28세의 나이에 숲으로 둘러싸인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스스로 통나무 집을 짓고 혼자서 2년을 자연과 함께 삽니다. "월든"은 그 삶의 기록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길 원했던 청년 소로우는 가볍게 입고 적게 먹으며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집에서 명상하고 책을 읽으며 사는 생활을 몸소 실천합니다. 그는 20세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지만 소박한 삶을 살길 원했습니다.

그는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 두 권의 책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은 그의 사후의 일입니다. 그의 글은 기껏해야 30대 초반이라는 그의 당시 나이를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는 성현에 다가간 사색과 통찰을 보여줍니다.

150년 전 그의 사상은 지금에도 신선합니다. 당시 이미 노예제도를 반대했고 시민운동 환경운동의 시조라고도 불릴 주장과 실천을 보여 주었습니다. 간디나 함석헌, 가까이는 바람의 딸 한비야씨도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문명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인류의 문명과 지성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인류에 국한되지 않고 숲속의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도 닿아 있습니다. 그의 글은 때로 우리의 양심을 칼날처럼 아프게 후벼 파지만 여름날 한 줄기 바람처럼 달래주는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이 되새기고 되새겨야할 빛나는 경구들이며 한 편의 그림이요 노래입니다.

"간소하게,간소하게,간소하게 살라 ! 제발 바라건대."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우리는 왜 성공하려고 그렇게 열심일까요 ? 우리는 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먹으려고 할까요 ? 그렇게 이룬 성공과 그렇게 먹은 음식과 화려한 옷과 집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토끼도 자신의 굴이 있고 원시인들도 집이 없어서 죽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직 자본주의 속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집을 가지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생명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지려 하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주변엔 문명의 이기들이 넘쳐나고 물질이 넘쳐나지만 인간은 점점 더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삶 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까지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월든"의 생각은 반문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오래 인류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지혜의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나 마음의 치료제로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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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탁석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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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을까 ?

탁석산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고보니 어딘가 수상합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까지 짊어지고 태어났겠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민족은 꼭 중흥 시켜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TV토론 방식으로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 한국의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일본이나 미국은 우리에게 타자(他者)인가, 한국 민족주의의 장래와 나아갈 방향까지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1900년 이후 일본을 통해 들어왔고 그 개념은 실체가 없는 상상의 산물이란 설명은 충격적입니다. 민족이란 실체를 가진 공동체는 없다는 얘긴데 얼핏 황당하지만 듣고보니 맞는 말입니다. 언어, 핏줄,문화,국가 어떤 것으로도 민족이란 실체를 잡아낼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민족이란 개념 위에 모든 지고지순한 이미지를 덮어 씌우고 경배해왔던 걸까요 ? 그것은 "민족주의" 때문입니다. "민족주의"란 민족이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받아 들이고 이용 되어온 이데올로기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 건설기인 1900년 이후 중국의 몰락과 함께 다가온 외세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구심점을 가지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엔 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해방 후엔 남북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민족주의가 유지 돼 왔다는 얘깁니다.

이런 역사적 사정을 알고보니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만 온 나라가 붉은옷의 열풍을 일으킨 점, 평소 클럽 축구는 잘 안 보면서 국가대항전만 유달리 많이 관전하는 이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정체로 다투다가도 독도나 종군위안부 문제만 나오면 한 목소리가 되는 이유, 유달리 일본과 일본인을 싫어하는 이유, 요즘 일고 있는 반미감정 등의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사책이 상당히 감정적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쓰여졌고 역사왜곡도 심하다는 사실과 당연하게 받아 들였던 "한(恨)의 문화"에 대한 의심, 일본은 우리와 달리 민족의식도 민족주의도 희박하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 동안 당연시 해 왔던 많은 가치들이 전복되는 경험은 충격적이지만 유익하기도 합니다.

탁석산은 민족주의가 수행해온 역사적 역할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이젠 민족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자고 말합니다. 저자는 아직 통일국가 수립이란 과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민족주의란 "사다리"는 제 역할을 거의 다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 민족주의의 사다리를 버리고 세계체제 속의 시민국가를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지요.

이 책을 알게 된 건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민족에 대한 개념과 알게 모르게 몸에 베어있는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들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민족주의의 과잉상태에 빠져있는 한국의 참모습도 반성해 볼 수 있었고요. 이제부터라도 민족에 앞서 개인과 세계를 더 중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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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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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은 상당한 짜증을 유발합니다.

"지금 기둥-지붕의 남서쪽 모서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그림자는 기둥 밑에 맞닿은 테라스의 동위각을 정확히 반분하고 있다. 이 테라스는 지붕으로 덮인 넓은 회랑의 형태로, 집을 세 면에 걸쳐 둘러싸고 있다. 테라스의 폭은 집의 중앙과 양쪽 편이 같기 때문에 기둥이 투사하는 그림자의 직선은 정확하게 집 본체의 모서리에 가 닿는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곳에서 끝난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떠 있어, 테라스 바닥의 포석들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

한참을 머리를 굴려 보아도 풍경이 떠 오르지 않는데 작가는 지루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기가 나서 더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갈수록 더 하더군요. 책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프리카 식민지의 농장을 경영하는 화자는 아내 A...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A....는 이웃에 사는 프랑크와 바람이 난 것 같습니다. 아내 A...가 프랑크의 차를 빌려 타고 갔다가 차가 고장나 하룻밤을 보내고 들어왔거든요. 그렇다고 무슨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화자는 A...와 프랑크를 관찰하며 질투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것을 그대로 옮긴 이야기는 아무런 줄거리도 감정도 없이 건조하게 흘러갑니다. 책의 첫머리처럼 집요하다 싶을 정도의 지루한 묘사만 이어질 뿐입니다. 십여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 쯤에서 책을 덮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좀 더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처음 보는 페이지인데 어디선가 읽은 듯한 데자뷔현상이 생기더군요. 이거 왜 이렇지 하고 생각하다보니 그래, 이거 앞 부분에 나왔던 그 묘사잖아 ! 책을 앞으로 넘겨 다시 보니 분명 좀 전에 읽었던 부분과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문장이 조금씩 변주되어 있어서 눈치를 못챘던 겁니다.

어라, 이거 봐라 ! 좀 특이한데 ! 계속 읽어 보자.

읽을수록 계속해서 했던 얘기를 반복 합니다. 그래도 책을 덮을 수가 없더군요. 남편의 시각으로 쓰여진 문장들은 건조하고 감정이 배제된 듯 하지만 사실은 심한 질투에 불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반복은 풍경의 묘사 뿐만 아닙니다. 보다보면 시간도 닫혀 있는 것처럼 돌고 돌아 원래의 자리로 와 있는 걸 깨닫게 됩니다.

남편의 시각으로 본 글 속엔 어떤 감정의 언표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화자는 심한 질투로 인해 착란에 가까운 집착에 빠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는 아직도 아내가 바람을 피우던 시간의 블랙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한 마디도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집요한 관찰의 반복과 집착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소설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무런 줄거리도 사건도 감정의 묘사도 없는 이 이야기에 눈을 뗄 수 없는 긴장이 흐릅니다.

로브그리예는 영화감독으로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합니다. 소설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듯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카메라도 감정이 있습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대상이 주는 느낌은 달라집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죠. 철저한 관찰기록처럼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결국 가장 감정적인 카메라의 시선과 닮았습니다.

놀라운 소설 "질투"를 통해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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