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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조르바 싸부님 안녕하시죠 ?
벌써 십몇년이 흘렀네요.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살기가 좀 힘들어서 싸부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요즘 제 심정이, 꼭 싸부님을 처음 만나던 이십대 초반,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금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쉬 잠들지 못하던 그때 같아서 싸부님 생각이 유달리 많이 났습니다.
싸부님은 천국에서도 여전하시죠 ? 카잔차키스 두목님은 다시 만나셨나요 ? 두 분이 다시 뭉쳤으니 또 신나게 먹고 마시며 젊은 과부 꼬실 궁리에 바쁘시겠군요. 참 부불리나 아줌마도 잘 계시죠 ? 싸부님이 계시니 천국도 좀 시끄럽겠어요. 입만 열면 하느님 욕을 해댈테니 아무리 인자하신 하느님이라도 좀 짜증이 나실 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시죠 ? 저는 싸부님이 일러주신 말씀들 다 지키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싸부님 덕분에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여전히 카잔차키스 두목님처럼 쓰잘데기 없는 책 좋아하고 개나 물어 갈 사색에 자주 빠지긴 하지만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는 법을 배웠고 여자를 인간을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뭐 아직 싸부님 같은 경지는 아니지만서도.
저는 암만 살아도 싸부님 발치에도 가 닿지 못할 것 같아요. 제겐 싸부님처럼 실천할 용기가 없어요. 그렇다고 카잔차키스 두목님처럼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덴 싸부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주저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틀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건 싸부님을 처음 만나던 당시의 두목님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싸부님이 그렇게 버리라고 했던 "왜요,왜요?" 하는 질문과 항상 달아 보고 재 보는 마음속의 저울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틈날 때마다 싸부님 어록을 펼쳐들고 줄 쳐가며 다시 외우곤 하는데 돌아서면 금방 잊어 버립니다. 싸부님처럼 자유로운 인간, 야성의 영혼을 가진 진짜 사나이가 되길 바랬지만 점점 싸부님 가르침과는 반대로 가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지금 제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싸부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정열"과 "용기" 그리고 "사랑" 입니다. 끊임없이 독신(瀆神)의 말을 쏟아 놓으면서도 가장 신께 가까이 가 있고, 바람둥이 난봉꾼 짓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지만 누구 보다도 패미니스트이며, 젊어서 사람 목도 쉽사리 따곤 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명예도 국가도 다 내팽개칠 수 있었던 진짜 사나이, 참 용기를 가진 자유로운 인간 조르바 ! 그렇게 싸부님을 닮고 싶었지만 지금의 제 모습은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합니다.
싸부님 제게 다시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시오. 세상과 맞서, 신과 악마와 맞서, 인간과 자연, 아니 우주와 제 영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빌어 주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죽어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싸부님을 만나면 자신있게 산투리 켜는 법과 춤 추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싸부님 사랑합니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재미있게 지내십시오.
싸부님의 영원한 제자 술보 올림.
추신: 참 카잔차키스 두목님과 천국에서 다른 건 다 하셔도 사업은 다시 하지 마세요. 두 분은 아무리 봐도 사업엔 재주가 없는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