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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탁석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을까 ?
탁석산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고보니 어딘가 수상합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까지 짊어지고 태어났겠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민족은 꼭 중흥 시켜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TV토론 방식으로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 한국의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일본이나 미국은 우리에게 타자(他者)인가, 한국 민족주의의 장래와 나아갈 방향까지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1900년 이후 일본을 통해 들어왔고 그 개념은 실체가 없는 상상의 산물이란 설명은 충격적입니다. 민족이란 실체를 가진 공동체는 없다는 얘긴데 얼핏 황당하지만 듣고보니 맞는 말입니다. 언어, 핏줄,문화,국가 어떤 것으로도 민족이란 실체를 잡아낼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민족이란 개념 위에 모든 지고지순한 이미지를 덮어 씌우고 경배해왔던 걸까요 ? 그것은 "민족주의" 때문입니다. "민족주의"란 민족이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받아 들이고 이용 되어온 이데올로기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 건설기인 1900년 이후 중국의 몰락과 함께 다가온 외세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구심점을 가지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엔 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해방 후엔 남북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민족주의가 유지 돼 왔다는 얘깁니다.
이런 역사적 사정을 알고보니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만 온 나라가 붉은옷의 열풍을 일으킨 점, 평소 클럽 축구는 잘 안 보면서 국가대항전만 유달리 많이 관전하는 이유,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정체로 다투다가도 독도나 종군위안부 문제만 나오면 한 목소리가 되는 이유, 유달리 일본과 일본인을 싫어하는 이유, 요즘 일고 있는 반미감정 등의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사책이 상당히 감정적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쓰여졌고 역사왜곡도 심하다는 사실과 당연하게 받아 들였던 "한(恨)의 문화"에 대한 의심, 일본은 우리와 달리 민족의식도 민족주의도 희박하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 동안 당연시 해 왔던 많은 가치들이 전복되는 경험은 충격적이지만 유익하기도 합니다.
탁석산은 민족주의가 수행해온 역사적 역할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이젠 민족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자고 말합니다. 저자는 아직 통일국가 수립이란 과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민족주의란 "사다리"는 제 역할을 거의 다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 민족주의의 사다리를 버리고 세계체제 속의 시민국가를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지요.
이 책을 알게 된 건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민족에 대한 개념과 알게 모르게 몸에 베어있는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들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민족주의의 과잉상태에 빠져있는 한국의 참모습도 반성해 볼 수 있었고요. 이제부터라도 민족에 앞서 개인과 세계를 더 중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