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시작은 상당한 짜증을 유발합니다."지금 기둥-지붕의 남서쪽 모서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그림자는 기둥 밑에 맞닿은 테라스의 동위각을 정확히 반분하고 있다. 이 테라스는 지붕으로 덮인 넓은 회랑의 형태로, 집을 세 면에 걸쳐 둘러싸고 있다. 테라스의 폭은 집의 중앙과 양쪽 편이 같기 때문에 기둥이 투사하는 그림자의 직선은 정확하게 집 본체의 모서리에 가 닿는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곳에서 끝난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떠 있어, 테라스 바닥의 포석들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머리를 굴려 보아도 풍경이 떠 오르지 않는데 작가는 지루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기가 나서 더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갈수록 더 하더군요. 책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아프리카 식민지의 농장을 경영하는 화자는 아내 A...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A....는 이웃에 사는 프랑크와 바람이 난 것 같습니다. 아내 A...가 프랑크의 차를 빌려 타고 갔다가 차가 고장나 하룻밤을 보내고 들어왔거든요. 그렇다고 무슨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화자는 A...와 프랑크를 관찰하며 질투하고 있습니다.남편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것을 그대로 옮긴 이야기는 아무런 줄거리도 감정도 없이 건조하게 흘러갑니다. 책의 첫머리처럼 집요하다 싶을 정도의 지루한 묘사만 이어질 뿐입니다. 십여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 쯤에서 책을 덮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좀 더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그런데 분명 처음 보는 페이지인데 어디선가 읽은 듯한 데자뷔현상이 생기더군요. 이거 왜 이렇지 하고 생각하다보니 그래, 이거 앞 부분에 나왔던 그 묘사잖아 ! 책을 앞으로 넘겨 다시 보니 분명 좀 전에 읽었던 부분과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문장이 조금씩 변주되어 있어서 눈치를 못챘던 겁니다.어라, 이거 봐라 ! 좀 특이한데 ! 계속 읽어 보자.읽을수록 계속해서 했던 얘기를 반복 합니다. 그래도 책을 덮을 수가 없더군요. 남편의 시각으로 쓰여진 문장들은 건조하고 감정이 배제된 듯 하지만 사실은 심한 질투에 불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반복은 풍경의 묘사 뿐만 아닙니다. 보다보면 시간도 닫혀 있는 것처럼 돌고 돌아 원래의 자리로 와 있는 걸 깨닫게 됩니다.남편의 시각으로 본 글 속엔 어떤 감정의 언표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화자는 심한 질투로 인해 착란에 가까운 집착에 빠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는 아직도 아내가 바람을 피우던 시간의 블랙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그는 한 마디도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집요한 관찰의 반복과 집착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소설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무런 줄거리도 사건도 감정의 묘사도 없는 이 이야기에 눈을 뗄 수 없는 긴장이 흐릅니다.로브그리예는 영화감독으로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합니다. 소설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듯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카메라도 감정이 있습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대상이 주는 느낌은 달라집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죠. 철저한 관찰기록처럼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결국 가장 감정적인 카메라의 시선과 닮았습니다.놀라운 소설 "질투"를 통해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