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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평점 :
몇 년 전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었다. 제자이자 저자이기도 한 미치 앨봄이 그의 스승 모리 슈워츠와 매주 화요일마다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기록했다. 그 지혜를 나누는 것이 아름답게만 그려지지 않는다. 루게릭 병에 시달리는 모리 교수에게 미치 앨봄은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드려도 드시지 못하는 장면도 있으며 모리 교수의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것도 다 묘사했다. 실제 인간 사이의 따뜻한 이야기가 참 인상적으로 남았다.
미치 앨봄의 다른 작품인『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 에디는 80살이 넘은 바닷가의 작은 놀이공원인 ‘루비 가든’에서 정비공으로 일한다. 그의 생일날에도 그는 출근해서도 일하며 다른 사람들과도 깊이 있는 관계를 갖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놀이공원의 프레디 낙하라는 놀이기구에서 카트 한 칸이 느슨해져 케이블이 풀리게 된다. 위험한 놀이기구에서 4명의 사람들을 구했지만 거기에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에디는 아픈 다리를 끌고 기구에 다가간다. 그리고 작은 두 손이 잡히면서 충격을 받는다. 여자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여자아이를 구하다 에디는 죽었고 다섯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책에는 그의 죽음부터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주인공 에디의 탄생부터 어린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 후가 짤막하게 소개된다. 소설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한다. 그에게 끝이 없다면 시작이 무슨 가치를 갖는 것일까. 노인들에게도 어린 시절은 있었다. 끝과 시작은 연결되는 것이다.
제목에서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이라면 다들 부모나 친구, 지인과 같은 그에게 아무 상처 없이 행복하게 지낸 사람들만 나타나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이제 좋은 경험만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을 뒤엎었다. 56쪽을 보면 에디가 첫 번째 만난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천국을 파라다이스 동산처럼 생각하지. 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니고, 강과 산에서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곳 말이야. 하지만 어떤 위안도 줄 수 없는 풍경은 무의미하다네.”라는 말을 한다. 이 소설은 그런 선입견을 벗고 에디가 어떻게 삶을 살고 평안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이 보여준다.
그가 만난 첫 번째 사람은 에디가 제대로 본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에디의 어린 시절 야구공을 갖고 놀다 길가로 날아가 그것을 줍다가 요제프 코발츠비치라는 이름의 남자가 모는 차가 경로를 이탈하면서 트럭에 받혀 죽고 만다.
그러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번개가 내리치기도 하고, 막 탑승 시간을 놓친 비행기가 추락하기도 하지.(72쪽)”라고 말해준다. 꼭 죽음만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원한 대학에 다른 사람이 떨어준 덕에 붙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취업되지 않아서 내가 거기서 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변에 감사한 마음을 지니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 같다.
에디가 두 번째 만난 사람은 전쟁에서 만났던 대위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멋지게 전쟁에 참가해 적들을 죽이고 승리로 이끌어 훈장을 받거나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의 무용담이 아니다. 에디와 전우 몇 몇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후의 상황이 무척 열악했다. 죽은 호박벌이 둥둥 떠다니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아파도 탄광에서 석탄을 채취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 묘사된다. 그때 에디의 기지로 포로 모두들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디가 헛간에서 누군가 발견한 것 같아서 그 안에 들어가려는 것을 대위가 다리를 쏘아서 억지로 데리고 나온다. 다리가 불구가 되면서 그는 더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와 함께 어제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에디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관심에 폭력까지 휘둘렀다. 요즘 아빠들은 달라지는 중이지만 6,70년 전의 많은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대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비록 가족에게는 잘 못하더라도 그에게 도움과 해를 입힌 사람이라도 위험에 처하면 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네 번째로 만난 사람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마거릿이다. 그녀는 비록 서로 젊은 시절에 만나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는 문제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다툼을 마지막으로 영영 아내를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에디의 아내는 다시 만난 에디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잃어버린 사랑도 여전히 사랑이에요, 여보. 다른 형태를 취할 뿐이죠. 가 버린 사람의 미소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에게 음식을 가져다줄 수도 없고, 머리칼을 만질 수도 없고, 같이 빙빙 돌며 춤을 출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런 감각이 약해지면 다른 게 강해지죠. 추억 말이에요. 추억이 동반자가 되는 거예요. 당신은 그걸 키우고 가꾸고 품어 주죠. 생명은 끝나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끝이 없어요(238).’
특별한 사고를 제외하고는 부부가 동시에 사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이 먼저 갔을 때 얼마나 이 말이 위안이 되어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소녀다. 그 소녀는 그가 필리핀에서 구하기 위해 헛간에 들어갔을 때 있었던 소녀였다. 그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숨어있던 곳에 있던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 새 생명을 구한다.
이 소설에서 흠 없이 무결점의 인생을 산 등장인물은 아무도 없다. 에디를 처음 구했던 남자는 병 치료를 위해 약을 먹다 파랗게 변해서 에디가 일하는 루비 가든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난 남자는 비록 에디의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아군이자 자기 부하인 남자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세 번째 만난 아버지는 비록 친구 미키의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가족에게 냉담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네 번째 만난 마거릿은 아이가 없어 에디와 다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소녀는 자신의 목숨이 사는 대신 아이의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끊임없이 질문한다. 자신의 인생이 낭비된 것 같아 소녀를 구했는지 물어본다. 꼭 사람을 살리지 않더라도 의미있는 일들을 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
탑골공원에 가보면 어르신들이 세월의 희로애락을 담은 눈을 지닌 채 그냥 앉아 있다. 그러나 80살이 넘은 에디는 자신이 가진 직업으로 도움을 주고 있으며 그의 희생으로 생명까지 살린다.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자신이 하던 일에 대한 지식이나 삶의 지혜를 나누거나 아니면 마지막까지 봉사활동이라도 하며 산다면 그의 인생은 단 한순간도 헛되지 않은 것이리라.
미치 앨봄의 책은 요즘 중요시되는 물질을 늘려주는 경제서도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원동력인 처세서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읽히는 것일까.
현대 사회에서 개인화, 정보화의 발달로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이익이 될지 간파하기 쉬워졌다. 학교 교사나 교수는 공인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한때의 관계일 뿐이고, 주변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 알고 함께 일하다가 그것이 끝나면 금방 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외로움을 느낄 뿐이다. 인구는 계속 늘어 가는데 점점 더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은 어쩌면 남과의 관계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어른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을 도왔던 일에 기뻐하고 남을 상처 줬던 일에는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누가 나에게 도움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점점 차갑게 군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 누구를 봐도 잘 하려 했지만 그 사람이 내게 플러스가 되지 않으면 나눠졌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에디의 목숨을 살렸듯 어떤 사람이 어떻게 내게 도움을 줬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났던 추억이 떠올랐다. 삼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부모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그네와 시소를 타고 놀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찻길에서 막 뛰다가 차가 ‘끼익’하고 서며 멈춘 적이 있었다. 비록 나도 운전수도 그 누구도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운전자분께서 순발력있게 차를 세우지 않으셨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한참 시험 직전에 생일이 걸렸는데 케이크를 챙겨주던 친구와 대학 때 수업 내용을 꼬치꼬치 물어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시던 교수님, 그 외에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던 사람들. 결국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며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울고 웃는 일이 생긴다. 괴로웠던 순간도 추억으로 남아 인생의 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나쁜 일이 없었다면 좋은 일에 대한 고마움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74쪽에 에디가 “당신의 죽음에서 좋은 게 뭐가 있소?”라고 묻자 “자네가 살았지.”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는 “타인이란 아직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라네.”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자신 혹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 위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시장이나 마트에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없다면 입고 먹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당장 굶어야 할 것이다. 서로서로의 도움이 없는 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타인이 곧 가족 아닐까. 그런 걸 인식한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이 책은 청년과 장년, 노년의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지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려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 없이 살 수 없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받고 어른들이 교육을 해 공부할 수 있으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국에서 만날 네 사람의 얼굴을 그려본다. 아직 살아 계시지만 언젠가 내 곁을 떠날 부모님과 상처와 기쁨을 주고받았던 직장 동료, 언제만 고마웠던 지인. 그리고 일면식 없이 전혀 모르지만 내게 큰 도움을 주었을 그 누군가. 오랜만에 소설속 주인공 에디처럼 과거 속 여행을 한 기분이 들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적도 많았다. 다양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더 잘할 걸 ‘아차’ 싶기도 하고 참 잘했다 싶기도 하다. 기쁨만이 아니라 상처도 추억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