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박범신의 소설은 이 소설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 그리 뛰어나진 않은 듯 싶다.

이 소설은 안정되고 잘 읽히는 문장과 빛나는 몇몇 표현, 풍부한 자료 조사, 그리고 전반부는 엄마의 시점에서 후반부는 딸의 시점에서 씌여졌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인물에 대해서는 설득되지 않았다.

여주인공 신우는 40,50대처럼 마음이 넓은데 딸의 나이가 2021년일 때 17살이었고, 신우가 31살에 딸을 났으니 대략 1972년생 쯤 된다. 물론 모든 70년대생이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신우는 돈도 벌어다주지 못하며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네팔 출신 가난한 노동자 카밀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변함없다. 끊임없이 사비나를 생각하는 카밀이 그렇게 좋을 수 있을까. 지나친 이해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한국사에 대해 굉장히 해박하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말이다. 그녀는 의류공장에서 일하다가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일을 하면서도 한국의 역사, 사회지식에 풍부하다. 의류업에 있는 사람은 그런 걸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 흑자를 내며 옷가게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식할수록 이기적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녀는 카밀이 그녀의 나가라는 말 한마디에 참아주지 나가버렸는데 그러고도 그렇게 헌신적인 여자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작가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신우가 아이를 서른 살 여름에 임신을 해서 30살에 애를 낳는다. 육삭둥이가 아닌 이상 31살에 낳는다(육삭둥이는 아니었다).

카밀 역시 2003년 25살을 사는 젊은이답지 않다. 그리고 너무 인생의 변화가 급격하기만 하다. 네팔에 있을 때 고등학교 때 몇 년 간을 오토바이족과 강간공범까지 한 남자가 20대 전후에 카펫장사를 하고 21살쯤 한국에 온다.

그런데 그는 자국의 신화에 굉장히 해박하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그 후로는 몇 년 동안 장사하고 언어도 다른 국가인 한국에서 살면서 언제 자국신화까지 공부했을까.

한국말을 잘 한다고 하지만 그가 말더듬이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어 "우리 할, 할아버지, 나무, 목재일, 잘했어요. 목, 목……."(24쪽), "두고 보세요. 특별한 파, 파티를 하려구요."(36쪽) 같은 부분이 부지기수인데 네팔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설정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말하면 정신이나 신체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오히려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같다.

그리고 카펫장사에 성공한 그가 사랑 찾으러 한국에 왔다지만 처음에는 겨우 100만원, 그리고 나중에는 65만원씩 벌며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의 가장 큰 오류가 될 수 있는 부분도 이것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사랑 때문에 살 수 있다면 정말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면서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현실감이 부족한 사랑엔 공감할 수 없다.

그리고 신우와 카밀의 딸 이름은 '애린(愛隣)'이다. 그렇게 남편 카밀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한국적 정서가 강하게 배인 한자 이름을 쓰는 대신 네팔 이름이나 최소한 신우와 카밀을 합친 이름인, '밀우'나, '신밀' 정도의 이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더 황당한 것은 애린의 태도다. 배다른 동생을 임신한 여자에게 어떻게 아빠를 떠났다고 원망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잘 됐다고 하진 않을까. 최소한 원망하기 전에 설득할만한 과정이 있던가.

그리고 결말 역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반항으로 불에 타죽는 설정은 전태일을 연상시켰을 뿐이다.

작가는 동남아시아 근로자들의 고통에 대해 크게 감싸는 한 인물(신우)을 만들고 싶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성이 떨어질 때는 그만큼 울리지 않는다.

주제에 별 두 개 반, 잘 읽히는 문장과 빛나는 몇몇 표현(손차양)에 별 셋 반, 그래서 총 별 세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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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즈 2005-08-0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으며 카르마와 바르도의 깨달음보다는 소설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만 보신분 같군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일들은 ‹š론 이해하지 못하는것도, 그런일은 일어날수없는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죠... 신우의 카밀에 대한 사랑도 그렇죠, 이 소설에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사랑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카밀에 대한 사랑 그 이상으로서 카르마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바르도를 이해하는것, 깨닫는것, 깨달음에의 사랑을 상징하죠....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이성의 잣대와, 수치의 잣대와, 사실성의 잣대로 세상을 보다보면, 결국 자신도 이성과 수치와 사실속에 갇히게 된다는것입니다. 그냥 지나치려했으나, 안타까워서, 감히 말씀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