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묵향 > * 민주주의와 반증가능성

  이 날 책을 읽을 때 으슬으슬 춥더니 결국 몸살이 났던 기억이 난다.

  무리하게 1년을 쥐어짜내고 보면, 이맘때쯤 쉬면서 꼭 많이 앓곤 한다.
  여유가 너무 없다.

  여하간 북플 '지난 오늘' 기능을 활용하여 페이퍼처럼 쓴 리뷰들을 다시 페이퍼로 정리하려고 한다.

  (아래도 종전 글을 거의 그대로 옮겨오면서 보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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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포퍼(1902~1994)의 말년 인터뷰와 에세이를 담은 책으로, 1992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1, 2부는 이탈리아 언론인 Giancarlo Bosetti와의 대담을, 3부는 '민주국가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반성', '자유와 지적 책임'이라는 두 편의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칼 포퍼 정치사상의 완성되고 정리된 모습을 개략적으로 살필 수 있다.

 

  포퍼에 따르면,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서투른 정식화이다. 군주정, 과두정, 민주정을 비교하여 '철인통치'를 주창한 플라톤에서부터 비롯된 이런 형식의 물음과 해결책들은, 언제나 최악의 불행을 야기했다.

  민주주의의 본질 역시 '국민주권'이나 '국민에 의한 지배'가 아니다. 그는 과학철학에서 택한 전략대로 민주주의도 부정적(否定的) 방식으로 접근한다. 포퍼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제거할 수 없는 정부', 다시 말해 '독재'와 '부자유', '법의 지배가 아닌 다른 지배의 형식'을 피할 수 있는 힘, 즉 '심판가능성(= 반증가능성)'에 있다. 사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고, 실수와 오류를 통하여 배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만이 폭력 아닌 이성으로 정치개혁을 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제공한다. 처칠의 표현처럼,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 형태이다. 다른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하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공동의 노력으로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따름이다. 영구불변의 절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얼마간 반증을 견디고 있는 잠정적 진실만 있을 뿐이다. 목표는 추상적 선의 실현이 아니라, 구체적 악의 제거에 놓여야 한다. 그 성패는 '의사결정의 제도적 틀로서 비판과 토론이 얼마나 현실적 힘을 가지고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이성/합리주의, 즉 사실의 존중, 비판과 토론에 열린 태도, 오류 가능성에 대한 관용의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이타적 개인주의' 윤리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국민법정(popular tribunal)'이어야 한다.

 

  칼 포퍼의 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번역되어 있다. 번역되지 않은 것은 The Self and its Brain (NY: Springer, 1977); 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From the Postscript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2); 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2); 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From the Postscript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3); The Myth of the Framework: In the Defence of Science and Rationality (London: Routledge, 1996); Knowledge and the Body-Mind Problem (London: Routledge, 1996) 등이다. (추가) 2018년에 『포퍼 선집』이라는 것이 나오기는 하였는데 어떤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현대과학철학 논쟁』은 토머스 쿤과 임레 라카토슈,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의 논쟁을 담은 책이다.



"우리의 문명이 살아 남으려면 우리는 먼저 위대한 인물에 맹종하는 습관부터 타파해야 한다. 역사에 관한 예언자로 행세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운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 사회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견해는 흔히, 너무나 쉽게 폭력적 조치를 초래한다. 지상에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만이 그의 동료를 위해 준비하는 지옥을 만들 뿐이다.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오히려 어떤 선한 의도에서, 즉 동료들의 참담한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우리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 (4쪽)

"통치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평균 이상인 자가 거의 없었고, 더러는 평균 이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탁월하고 유능한 통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에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건다는 것은 나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인다." (41쪽)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155쪽)

"합리적 접근법은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0쪽,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재인용)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논문들과 강의는 매우 간단한 주제의 변주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182쪽, 『추측과 논박』 머리말 중에서)

"우리의 행정은 소수 대신에 다수를 옹호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이유이다. 법률은 개인들의 사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정의를 행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탁월한 자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떤 시민이 뛰어나면, 그는 다른 사람에 앞서서 국가에 봉사하도록 요청된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장점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 페리클레스(203쪽)

(7-1) "우리는 마르크스의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고서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의 열린 마음과 사실에 대한 감각, 그리고 쓸데없는 말장난에 대한 혐오, 특히 도덕적 훈화조의 말장난에 대한 혐오는 그를 위선과 표절에 대해 싸우는,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투사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불타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입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를 깊이 느꼈다. 그의 재능은 주로 이론적인 데 있었으므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투쟁을 위한 과학적 무기라고 그가 믿는 것을 주조해 내는 데 엄청난 노력을 바쳤다. 진리를 모색하는 성실성과 지적 정직성은 그를 그의 많은 추종자들로부터 구별해 준다. (7-2로 이어짐)

(7-2) 지적 원천에서는 헤겔의 철학과 거의 동일하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인도주의적 충동이 밑에 깔려 있다. 더구나 헤겔 우파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적 문제 가운데 가장 절박한 문제에 합리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가치는 그 노력이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는 사실에 의해 감소되지 않는다. 과학은 시행착오에 의해서 진보한다. 마르크스는 그런 시행착오를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7-3으로 이어짐)

(7-3) 경제적 힘이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다는 독단은 없애버려야 한다. 오히려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은 모든 형태의 통제되지 않은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 경제적 힘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은 돈이 직접 권력을 살 수 있게 된다든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파는 경제적 약자를 노예화함으로써 권력을 간접적으로 살 수 있게 될 때이다. (...) 우리는 경제적 힘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 착취를 방어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상 7-1~3은 239쪽에서 인용)

"선거일은 새로운 정부에 적법성을 부여하는 날이 아니라, 과거 정부를 우리가 재판하는 날, 즉 과거 정부가 그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날이다." (249-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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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용 2019-01-06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 연휴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었는데 말이죠 ㅎㅎ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1부밖에 읽지 못하고 다시 생산에 집중을..

묵향 2019-01-06 12:42   좋아요 0 | URL
영어로?? 단숨에 읽기는 좀... 옛날 판 민음사 한글 책이면 더더욱ㅎㅎ 씩씩하게 생산하시기를 응원함!
 
 전출처 : 묵향 > * 리처드 파인만의 物理學

  싸이월드, 페이스북에도 흩어져 있던 책 후기 정리와 알라딘 서재, 북플 활용에 관하여 이런저런 시행착오가 있었다.

  북플에 '지난 오늘' 및 '공유하기' 기능이 생겨 이를 활용해보려 한다.

  다만 서재 ↔ 북플 간 자연스러운 연동이 되지 않는 때가 있다는 점은 아쉽다. 언젠가 개선되면 좋겠다.


  (언젠가 하고 싶었던 일인데... 2년 전 추억으로 뜬 김에, 아래에 종전 글을 거의 그대로 옮겨오면서 재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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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권으로 나온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1963)』(이른바 '빨간 책') 중 비교적 이해가 수월한 여섯 장을 발췌하여 재편집한 책이다. 화학, 생물학, 지질학, 천문학을 넘나들며 왜 물리학(物理學, physics)이 자연(physis)과 사물(物)의 이법(理)에 관한 근본 학문인지를 알게 해준다. 파인만 강의 시리즈를 접하기 전에 가볍게 준비운동을 하는 책 정도로 볼 수 있겠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다룬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선 '빨간 책'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1, 2학년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칼텍 학부생들이 점차 물리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것을 우려한 학교 측에서 파인만에게 특별히 강의 개설을 부탁한 것이었다. 파인만이 오로지 학부생만을 위한 수업을 개설한 것은 위 빨간 책 강의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파인만의 강의는 뉴욕타임즈 기자가 "이론 물리학자와 서커스 광대, 현란한 몸짓, 음향효과의 절묘한 결합"이라고 평할 정도로 다이내믹했고, 인기가 많았다. 강의실은 늘 만원이었지만(그래서 파인만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로는 학부생들의 출석률이 점점 떨어지고, 수강생 중 대학원생과 교수의 비율이 점차 높아졌다고 한다. 『파인만의 물리학 길라잡이』는 위 강의록에 딸린 문제풀이집으로 제4권 정도에 해당한다.

 굿스타인 부부의 『파인만 강의(Feynman's Lost Lecture, 1996)』는, 위 빨간책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누락되어 잊혀진 '행성운동에 관한 강의록'을 편집·재구성한 것이다. 칼텍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던 주디스 굿스타인 교수는 대학 공문서 보관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위 빨간책 출간을 책임졌던 당시 물리학과 학과장 로버트 레이턴의 서류철을 정리하던 중 위 강의록을 발견하였고, 그녀의 남편으로서 칼텍 물리학과 교수였던 데이비드 굿스타인 교수가 남아 있던 녹음테이프, 칠판 사진 등을 바탕으로 이를 보완하였다. 1장은 뉴턴 이전까지 우주관 변화, 2장은 파인만의 일생, 3장은 파인만의 타원 법칙 증명을 다루고 있다.




 『파인만의 또 다른 물리이야기』는 위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책으로, 역시 빨간 책에서 상대적으로 쉬운 내용을 추린 것이다. 주로 '상대성 이론'을 다룬다. 『물리법칙의 특성(1965)』은 파인만의 코넬대학교 '메신저 강좌' 강의록이다('메신저 강좌'는 코넬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Hiram Messenger가 1924년 설립한 기금으로 진행되는 '명사 초청 강의' 같은 것으로, 1945년 강좌에는 오펜하이머, 1976년 강좌에는 노암 촘스키 등이 연사로 초청되었다. 상세는 링크 클릭). 대상은 학부생과 일반인이었다. 번역본이 두 종 나와 있다. 『파인만 적분론』이라는 책도 있다.



 아래 책들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묶은 것이다. 『발견하는 즐거움』은 에세이와 강연문을 모은 책이다. 나노테크놀로지 시대의 개막을 알린 기념비적 강연, "바닥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가 수록되어 있다.




 파인만의 에세이집은 사이언스북스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를 보면 된다. 그런데 위 시리즈에 붙은 번호는 혼란스럽다. 『파인만!』은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 『남이야 뭐라 하건!』을 묶여 파인만 서거 2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재출간한 것이다. 또한 위 시리즈 중 『미스터 파인만!』은 『남이야 뭐라 하건!』과 같은 책이다. 2018년에 『클래식 파인만』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파인만의 일생을 다룬 책들이 있다. 이 부분은 2018년에 다시 정리하면서 조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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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묵향 > [100자평] 미술 시장의 법칙


 『미술경제학』 28~30쪽에서 발췌...


  시장이 미술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미술시장은 수준 낮은 미술품을 생산하도록 만드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시장의 기능에 대한 일종의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 시장은 수요에 반응하는 일종의 기구이다. 만일 저급한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공급될 것이고, 고급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공급될 것이다.

  (...) 낮은 수준부터 높은 수준까지 다양한 미술수요가 존재할 때 시장제도는 그 모든 수준의 미술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특정한 미술만 생산이 가능한 후원제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 시장제도는 대량소비되는 저급한 미술만이 아니라 고상한 미술에 대한 엘리트 수요에 대해서도 작동한다.

  (...)

  미술경제학은 미술시장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경제학 이론과 방법론을 활용하여 현대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도출하여 정책대안을 제시한다.

  미술경제학은 상품으로서의 미술품, 그리고 그것의 경제적 가치(economic value)에 관심을 갖는다. 미술품의 본래적 가치인 예술적 가치(aesthetic value)를 평가하지 않는다.

  (...)

  그러나 경제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중시장에서 제품가치는 다수의 일반 소비자가 결정하고, 부자시장(deep-pocket market)에서의 제품가치는 돈과 자산이 많은 소수의 부자 소비자가 결정한다. 경제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의 괴리현상은 대중시장에서 더 크게 발생한다. 부자시장에서는 양자의 수렴현상이 더 강하다(Hans Abbing, 2004). 음반시장과 같은 대량생산된 대중시장에서 경제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의 괴리가 크게 발생한다. 반면 미술시장에서는 예술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수렴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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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묵향 > [100자평] 미술 시장의 법칙

  공유기능 실험. 

  2년 전 추억이라고 뜨기에 근처의 책 한 권을 펼쳐 보았다.




  밑줄긋기는 『그림과 그림값』 서문에서 따온 것이다.

  책 몇 개를 아래에 보태어 본다. William D. Grampp의 『Pricing the Priceless: Art, Artists, and Economics』는 검색되지 않는다.



  지금은 미술시장이 좀 어떻게 달라졌으려나...






어찌 생각하면 ‘모은다‘라는 행동에는 아마도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싶은 심리가 배어 있는 것도 같다. 내적으로는 자기자신의 삶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레코드를 만 장 모은 사람은 레코드가 한 장도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천 장쯤 모은 사람에 대해서도 무의식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마련이라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토록 열심히 뭔가를 모은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는 그 많은 수집품들을 몽땅 국가나 학교에 기부해 버리는 사태가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으는 것도 극에 달하면 욕심이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갈 데까지 가면 대욕은 무욕과 통한다는 것이다. 즉 큰 욕심은 욕심이 없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진정한 경지에 오른 콜렉터들은 그러할 것이다(『그림과 그림값』, 13~14쪽).

내 생각에는 와인과 오디오, 그리고 좋은 그림 사이에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세계적인 화상이나 콜렉터 중에는 와인 애호가가 많기도 하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의 극치, 섬세함이란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그림과 그림값』, 1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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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카도조 로스쿨의 Peter Neufeld와 Barry Scheck이 주도하여 시작된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 Innocence Project'는,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에 관하여 DNA 재감정을 통해 2017년 6월까지 351명의 유죄 확정자가 무고함을 밝혀냈고, 그중 20명은 사형수였다. 억울함이 밝혀진 사건들의 40% 정도는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DNA 감정결과만 가지고도 무고함을 입증할 수 있었고, 그 때까지 그들이 교도소에서 복역한 기간은 평균 13년 정도였다. DNA 검사를 통해 150여 명의 진범을 찾아내기도 했다. 매년 3,000명 정도의 기결수가 이노센스 프로젝트에 자신의 결백함을 밝혀달라고 편지를 쓰고, 이노센스 프로젝트는 이를 포함하여 6,000에서 8,000건 정도의 사건을 들여다 보는데, 그중 22% 정도 사건은 DNA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공식 사이트를 참조 https://www.innocenceproject.org/ 재심을 통하여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 이들 한 명 한 명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전락자백』은 일본 '진술증거 평가의 심리학적 방법에 관한 연구회'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위 연구회는 2008년 9월 구상되어, 2009년 3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일본의 형사법학자, 심리학자, 변호사 등이 20회에 달하는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이들은 특히 '왜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거짓자백하는가'를 심리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아시카가足利 사건, 도야마히富山氷見 사건, 우쓰노미야宇都宮 사건, 우와지마宇和島 사건 네 사건을 주로 다루었는데,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슬픈 자백'이 이루어진다(책 94~100쪽).

  a. 일상생활로부터 격리된 고립무원의 상태(일상에서는 당연했던 심리적 안정을 잃고, 수사기관은 주변 사람들 모두 너를 범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의 정보 혹은 심리적 압력을 불어넣는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수사기관으로부터 불러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 범죄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b. 타자에 의한 지배와 자기통제감 상실(구금되고 나면 식사, 배설, 수면 등 기본적 생활에서 자유의 범위가 크게 줄어들고 피의자신문을 위하여 반복하여 불려나가야 하게 된다)

  c. 증거 없는 확신에 의한 장기간의 정신적 굴욕(수사관들은 객관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는 더욱, 보다 안심하고 기소할 수 있는 자백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피의자들을 비난하고, 매도하면서 심리적으로 도발하는데, 피의자가 계속하여 부인하는 한 이러한 시도는 계속된다)

  d. 사건과 관계없는 수사와 인격부정(결혼적령기를 지난 비혼으로 이성과 안정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거나 충실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같이 사건과 무관한 사항에 관해서 자꾸 비난받다 보면 사건과는 무관하게 죄책감이 생기고, 실패자로 낙인찍힌 기분이 되어 저항력을 상실하게 된다)

  e. 전혀 들어주지 않는 변명(아무리 열심히 변명해도 변명은 변명처럼 들리고, 수사기관은 결정적 증거가 있는 양 말하며 설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일상에서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설득하기를 단념하고 떠날 수 있지만, 피의자신문은 결론이 날 때까지 계속된다)

  f.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전망 상실(언제 확실히 끝날지 모르는 상태를 사람들은 더욱 버티기 어렵다)

  g. 부인할 경우의 불이익 강조(계속 부인하면 오히려 형이 무거워진다고 타이른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 죄가 없더라도 자백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h. 수사관과의 '자백적 관계'(물론 피의자와 수사관은 경쟁적 관계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정이 통하는 일종의 동료의식으로 묶여버려 법정에서조차 자백철회가 그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지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심리적 구속이 유지된다)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 (일본) 형사절차의 구조적 문제도 크게 작용하는데(이는 우리 사법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과 같은 추궁형 신문방식 하에서 수사관은, 자백함으로써 느끼는 불안감을 증대시키지 않으면서도 부인을 계속함에 따른 불안감만 증대시키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유인을 갖게 되고, 그래서 d, g와 같은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우월한 조직력을 가진 수사기관과 대치할 때 독립한(그래서 고립된) 재판관이 받는 심리적 스트레스(여론의 결론이 정해져 있다면 이는 가중될 것이다) 혹은 때로는 (무)의식적 동료의식, 과거에 행해진 DNA 검사의 기술적 한계(그리고 그 해석방법에 관한 법률가들의 무지), 실제 체험을 말할 때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말할 때의 차이에 대한 간과(체험기억을 진술할 때는 자기와 타자를 번갈아 고르게 말하지만, 거짓자백을 할 때는 자기의 운동행위를 쭉 이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범행현장에서도 피해자나 피해품은 범인의 주요한 관심사일 것이므로 나 아닌 것에 관한 진술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체험진술에서는 수사기관이 몰랐던 '비밀'이 폭로되는 반면 비체험진술에서는 피의자의 '무지'가 폭로되기도 하는데, 이를 사법기관이 섬세하고 공정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피의자에게 크고 작은 지적장애가 있는 경우(이들은 자신이 질책받고 야단맞고 있다고 느낄 때 수사관에게 심리적으로 구속될 가능성이 더 높다), 목격자나 피해자에 의하여 범인을 식별할 때의 위험(피해자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도망갈 수 있는 길이나 흉기에 주목하기 때문에 범인의 용모에 관한 기억은 불확실할 가능성이 높은데, 수사기관이 보여주는 인물은 진범일 것이라는 암시를 받기 쉬우므로, 엄격한 범인식별절차가 준수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기억과 진술에 의존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 위태롭고, 재판절차에서는 위험하다)과 같은 것들도 거짓자백에 의한 재판을 보충하는(?) 요소로 책은 다루고 있다.


  따라서 자백의 신용성을 판단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책 199쪽).

  ① 범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심증을 형성할 때에는, 인간이 하는 일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오류를 더 적게 하기 위해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 것. 진실 앞에 겸허하고 우직할 것.

  ② 자백이 있는 사건에서도 특히 피고인과 범행을 연결지을 때, 정황증거의 정확성과 한계를 엄밀하게 분석하는 것을 '제1차적 작업', 즉 출발점으로 할 것. 자백의 검토는 그 후의 '제2차적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③ 심증 형성의 과정에서는 스스로 세운 '가설' 위에 항상 새로운 '가설'을 던지고, 예외에 눈감지 않고 시야를 넓게 가지며 끊임없는 '검증'을 거듭해갈 것(인간은 하나의 관점을 가지면 다른 관점을 가지기 어렵다. 특히 그것이 확신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이것이 평소에도 입장을 즉자적으로 세우기 전에,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검증하는 훈련이 중요한 이유다. 다만, 재판관은 과학자를 가장하거나 과학에 정통한 태도를 취하여 '전문가인 척하는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확신은 위험하다는 동일한 이유에서다.).

  ④ 재판관이 행하는 증거의 종합적 판단은 최종적으로는 재판관의 '전인격적 판단'이 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도 개별적인 증거에 대해 충분한 조사와 분석을 반복하여 검토하고, 거기에 더해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할 것.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항목을 체크하여야 한다(상세는 책 200~204쪽).

  a. 자백의 성립 과정-자백과 부인이 뒤섞인 경우, b. 자백 내용의 변동과 합리성, c. 자백의 체험진술성, d. '비밀의 폭로', e. 자백과 객관적 증거가 부합하는 정도, f. 뒷받침해야 할 물적 증거의 부존재(관련성이 희박하고 불확실한 증거를 아무리 모아도 확실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 확실한 물적 증거가 '왜 없는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g. 범행 전후의 수사관 이외 사람에 대한 언동(피의자, 피고인이 된 사람은 상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심리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해야), h. 피고인의 변명, i. 정황증거와의 관계.


  일본에서는 '설원雪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원죄冤罪 피해 근절과 피해 회복을 목표로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공식 사이트를 참조 http://setuen-project.com/


  일본에서 2012년에 쓰였고, 번역작업도 꽤 일찍 시작된 것 같은데, 2015년에야 책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옮긴이가 덧붙인 "김인회의 한국 이야기" 부분은 국내의 최신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이 철 지난 이야기에 오도될 우려가 있다고 보인다(예컨대, 책 255쪽 유죄율 통계 등. 약식사건을 빼고 제1심 공판사건 재판결과를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사법연감』http://www.scourt.go.kr/portal/news/NewsListAction.work?gubun=719 자료를 통해 계산해 보면, 한국에서 유죄판결(선고유예 포함) 비율은 2011년 70.0%, 2012년 67.0%, 2013년 74.5%, 2014년 80.5%, 2015년 83.4%, 2016년 87.1%, 2017년 86.0% 정도로,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유죄판결이 98%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다. 검찰에 불기소재량이 있다는 점에서 이는 검찰과 법원 사이의 밀당게임인 측면이 있다. 국민참여재판도 책 곳곳에 지적된 것과 같은 여러 한계로, 확대되기보다는 사양화에 가까운 길을 걷고 있다고 알고 있고, 참심제를 시행하는 나라들에서도 특히 현대사회에 와서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참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서증을 꼼꼼히 비교, 대조하여 보기가 거의 어렵고, 검사나 변호인이 가공, 요약한 프리젠테이션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일 개정하는 데 현실적 제약이 있어 '일격성'(일회적 공격) 사건이 아니면 제대로 된 심리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일본의 최신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형사법 영역에서는 책에 나온 것과 같은 고질적 문제들도 있어서, 모르긴 몰라도 일본은 사법제도가 우리보다 점점 뒤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특히 형사절차에서는 많은 시민들의 희생과 법률가들의 노고로, 일본보다 빠른 성과를 쟁취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도 엄벌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실은 어느 나라나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형량이 가장 높은 미국에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높은 형량이 총기범죄 등 범죄 예방에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언뜻 접하는 언론기사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게 되는 '제1종 오류'와 진범을 방면하는 '제2종 오류'를 함께 줄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실증적 근거에 터 잡은 냉철한 분석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된다[예컨대 개방형 교도소까지 운영하는 핀란드는, 실은 북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좌파 탄압 등을 목적으로 장기구금형 중심의 형사정책을 유지하다가, 그것이 재범방지와 범죄예방에 거의 효과가 없었다는 사회적 결론을 내리고 1960년대부터, 불필요하게 범죄로 규정되어 있는 행위들에 대한 형벌을 폐지하고, 있는 법정형을 줄이고, 재소자들을 빨리 사회로 복귀시키는 등 목적의식적으로 형벌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도 형사정책은 좋은 사회(복지)정책의 뒷받침 없이 달성될 수 없다는 믿음하에, 범죄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재소자들을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는 데 목표를 둔, 'as open as possible'한 교정행정을 견지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관광명소인 헬싱키의 수오멘리나 섬에는 개방형 교도소가 있는데, 여행 중에 수감자와 마주치더라도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2010년 9월에 무죄가 확정된 무라키 아쓰코村木厚子 씨는 "...취조라는 것은 링에 아마추어 복서와 프로 복서가 올라가 시합을 하는데, 심판도 없고 세컨드도 붙지 않는 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책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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