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을 깊이 ‘읽는’ 방법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 관하여


“어느 인간에게도 마치 대양의 한 방울처럼 바탕이 되는 문화와 언어가 스며있어. 또 거기엔 모국의 역사가 얽혀 있고. 그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 인간이 있다면 종이쪽처럼 얄팍해보일 거야.”

― 요네하라 마리


루시드 폴의 8집 앨범 발매가 임박했습니다. 2015년 7집 활동 이후 10월 30일에 발매되는 8집 제목은 ‘모든 삶은, 작고 크다’이군요. 루시드 폴의 첫 에세이인 동명의 책도 앨범과 함께 묶인다고 하니, 많은 팬들이 기대할 만합니다. (7집도 책 형태를 띠긴 했었죠.) 11월 초부터 전국 8개 도시에서 낭독회를 겸한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도 전해집니다.


영원히 ‘젊은 오빠’일 것 같았던 루시드 폴도 어느덧 마흔을 넘고, 1997년 ‘미선이 밴드’로 데뷔한 지 무려 20년이 되었다니…. 그의 옛 앨범들을 가끔 꺼내 들으면, 특유의 서늘한 목소리와 여린 감성은 전혀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2009년 4집 ‘레 미제라블’을 내면서 음악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는 소설을 직접 쓰거나 번역하고, (자신이 오래도록 존경해 온) 마종기 시인과 서간집을 출간하기도 하는 등 저자와 번역가로서도 꾸준히 활동해 왔습니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 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중에서


루시드 폴은 다채롭고 엉뚱한 이력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가수입니다.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스웨덴 왕립공대에서 석사, 스위스 로잔연방공대에서 생명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학력이 유명하죠. 스위스 화학회의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고, 미국 약품 특허를 취득하는 등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박사 뮤지션’이 지난 2014년 제주도로 이사한 후 감귤을 재배하고 있으며, 자주 시골 생활을 예찬하곤 하니…. 역시 어떤 면에서 그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2015년엔 홈쇼핑을 통해 7집 앨범의 쇼케이스를 진행하며 자신이 재배한 귤을 세트로 묶어 팔아서, 9분 만에 완판 시켰다는 깜짝 뉴스도 화제가 되었죠. 최근엔 자신의 감귤이 무농약 인증을 받았다고 기뻐한다는 소식도 전해졌고요.



“제가 가장 동경하고 존경하고 또 보살피고픈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한 사람에게서 ‘선’ 이상 빛나는 가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 루시드 폴, 2014. 6. 채널예스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루시드 폴에겐 (그의 변화무쌍한 이력과는 달리) 언제나 한결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깊이 응시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다는 게 그 이미지의 핵심이 아닐까요? 그는 어쩌면 오랫동안 변함없이 ‘평범한 사람’과 ‘착한 사람’에 대한 노래를 불러 오고, 글을 써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이어서 외롭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다른 이와 소통하고 싶고,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고…. 이런 인간적인 마음들이 그의 모든 노래에 고루 배어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죽음과 고통 앞에서 평등하고 평범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루시드 폴이 지난해 번역했던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는 그가 오래도록 천착해 온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장 두드러지게 엿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국의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가 쓰고,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세상에 하나뿐인, 각국의 고유한, 그래서 낯설고도 아름다운 52가지 낱말들을 풀이하고 일러스트로 묘사한 책입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예컨대 나뭇잎 사이로 스며 내리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 ‘코모레비’[KOMOREBI]라는 단어가 있답니다. 정말 예쁘고 정감이 가는 말이죠? 호주의 원주민어인 와가만어에선, 물속에서 발가락으로 무언가를 더듬더듬 찾는 행동을 ‘무르마’[MURR-MA]라고 표현하네요. 스웨덴어 ‘레스페베르’[RESFEBER]는 여행이 시작되기 전, 긴장과 기대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뜻하고, 우르드어의 ‘나스’[NAS]란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긍지와 자신감을 한 단어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요.


나라별로 문화와 언어는 천양지차지만, 뭇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은 전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쯤 되니 언어와 음악의 공통점이 느껴지시지 않나요? 사람이어서 누구나 느끼고, 누구나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도구 말이죠…. 루시드 폴 역시 옮긴이의 글에서 “시간이 흘러 매일같이 ‘코모레비’ 내리는 나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 지금, 이 책을 통해 다시 ‘코모레비’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며, 책을 번역하는 일이 더없이 행복했다는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당신이 오래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를 되찾아 준다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추억을 되찾아 준다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제대로 표현할 수 없던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비로소 말로 옮길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 자, 그럼 이제 완벽히 번역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책의 서문


다른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어 올해 두 번째 후속작까지 출간되었답니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두 번째』는 번역가 김서령의 손을 통해 옮겨졌고요.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의 이 두 번째 책에서도 세련되고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맛깔진 문장들로 소개되는 각국의 고유한 어휘들이 가득합니다.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요네하라 마리의 문장처럼, 세계엔 수많은 문화와 언어들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국의 역사와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내 영혼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우린 소중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 나라의 예술과 언어를 배웁니다. 세계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누볐던 루시드 폴이 음악과 책을 통해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진실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오랜 팬으로서….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왕좌의 게임>에 '양심 두 스푼'을 더한 소설

_노벨문학상 가즈오 이시구로 최고의 작품, 『파묻힌 거인』



서점가에 불고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 열풍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를 향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건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더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뉴스는 물론이고, 그의 작품들을 함께 읽으려는 독서 모임들도 SNS를 중심으로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예년에 비하여 올해 더 노벨상 작가와 작품에 대한 환호가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오랜만에 순수문학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요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작년 저널리스트에 가까웠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이어, 작년엔 대중음악가인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요. 정통 순문학에 매진했던 작가들이 지나치게 노벨문학상에서 소외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올 한 해 우리나라에서도 다소 현실참여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소설이 인기가 많은 측면이 있었는데요. 그런 분위기에서 인간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조망하는 '다소 무거운' 작품들은 베스트셀러에서 찾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문학시장의 흐름에서 노벨문학상이 하나의 전환점이 된 건 아니었을까요? 더욱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물론 어릴 적 영국으로 이주한 영문학 작가이지만) 일본 태생이며, 한국 독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일본 문학의 전통을 일정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파묻힌 거인』, 가즈오의 세계를 압축한 한 권의 책


지난 일주일 간의 노벨문학상 열풍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5년에 펴낸 마지막 장편소설인 『파묻힌 거인』에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는 1982년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을 시작으로, 35년간 7편의 장편과 1편의 단편모음집을 발표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틈틈이 영화와 드라마 각본을 작업한 것을 고려한다 치더라도 아주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죠. 『파묻힌 거인』도 그의 전작 이후 무려 10년만에 쓴 신작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내 목에 칼 끝을 겨누며 이시구로 소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파묻힌 거인』을 고르겠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저자인 데이비드 미첼은 이런 '과격한' 찬사를 남기기도 했는데요. 이 말은 『파묻힌 거인』에 이시구로가 천착했던 세계관과 인간관이 가장 원숙하게 녹아있다는 시각으로 읽힙니다. 비단 노벨문학상이란 휘황이 아니더라도, 『파묻힌 거인』은 놀라운 작품입니다. "아름다운 동화 같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는 <더 타임스>의 평가가 작품을 한 마디로 설명해 줍니다.


고대 잉글랜드의 브리튼 섬, 역사와 전설이 아직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시기에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거대한 전쟁과 학살을 벌입니다. 『파묻힌 거인』은 그 살육과 전쟁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말살하는 제노사이드를 겪은 후 황량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소설이 보스니아와 르완대의 대학살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파묻힌 거인』의 배경은 그 집단대학살을 겪은 이후에 브리튼족과 색슨족이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학살의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무도 그 학살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묘한 세계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았다’는 역설이 지배하는 시공간이죠. 먼 시간이 지난 후, 당시 학살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했던 액슬이라는 노인과 그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다시금 그 기억을 헤집습니다. 이 소설의 서사를 완성시키는 것은 ‘집단의 기억’이라는 소재와 절묘하게 맞물린 ‘두 노부부의 사랑'입니다.


노벨문학상 작가가 판타지 소설을 쓴다면?


아서 왕의 전설은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명검 엑스컬리버와 성배를 찾기 위한 13인의 원탁의 기사 등등은 지금도 동화로 널리 읽히는 이야기입니다. 아서 왕은 고대 브리튼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왕인데, 중세 시대의 유럽에선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유명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서 왕은 5~6세기경 영국 켈트족의 수장으로 브리튼 섬을 침략한 앵글로색슨족을 무찔렀던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실존 인물은 아닙니다.) 켈트족 입장에선 영웅이었겠지만, 앵글로색슨족 입장에선 학살자에 가까운 이름이었겠죠.


맨부커상에 더해 이번엔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쥔 '순수문학' 작가가 아서 왕의 전설을 차용해서 판타지 소설을 썼다면, 과연 놀랄 만한 일일 겁니다. 어느 작가라도 쉬운 도전은 아니었을 것은 분명한데요. 『파묻힌 거인』은 바로 이 아서 왕의 전설을 직접적으로 소설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심지어는 전설 속 그대로 용과 괴물, 도깨비들과 마술이 주요한 캐릭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판타지 소설'입니다!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알렉스 프레스톤은 영국 <가디언>지에 이 책의 서평을 썼는데요. 그는 『파묻힌 거인』에 대해 "<왕좌의 게임>에 양심이 더해진 소설, 기억해야 하는 의무와 잊으려는 욕망에 관한, 아름답고 심금을 울리는 책"(The Buried Giant is Game of Thrones with a conscience, a beautiful, heartbreaking book about the duty to remember and the urge to forget)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양심적인 <왕좌의 게임>이라니, 꽤나 흥미로운 표현이죠? 


드라마의 재미에 취하여, 철왕좌를 위해 웨스터로스에 뿌려진 그 어마어마한 피를 우리는 쉽게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드라마와 현실은 자주 서글프게 닮아 있곤 하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모티브까지


『파묻힌 거인』에는 아서왕의 전설뿐만 아니라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 죽은 이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그리스 신화의 뱃사공 카론의 모티브도 등장합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이 늙은 뱃사공과 만들어내는 '러브 스토리'는 처연하고, 비극적이며,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작품에서 평생을 함께 살아나가는 반려 관계의 본질에 관하여 절박하게 매달립니다. 작가 자신이 노벨상 수상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그 덕을 부인에게 돌리며, "아내의 가사 전담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진중하고 성찰적인 작가의 성품이 물씬 느껴지는 에피소드입니다. 그 성품은 소설의 행간에도 깊이 배어있습니다.


아서왕의 전설에 암용과 도깨비, 카론 신화가 등장하고, 집단학살을 다루면서도 부부 간의 러브스토리가 얽혀 있다니….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분이라면 어리둥절 불신의 눈초리를 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이 모든 모티브들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 "(가즈오 이시구로는) 위대한 정서적 힘이 담긴 소설을 통해, 세계와 맞닿은 인간의 환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드러냈다"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지명 이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파묻힌 거인』의 결말에 작가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남겨두었습니다. 백귀와 용들이 물러간 <왕좌의 게임> 속 세상에서도, 칠왕국의 주민들은 제각기 서로에 대한 분노와 상처의 그림자를 떠안고 살아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년의 평화’를 향한 우리들의 염원은 드라마나 현실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신 장편

<파묻힌 거인> 옮긴이의 글


기억은 아프고, 망각은 취한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놀라운 변신을 보여주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변신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내놓은 작품은 역사 판타지물이며 용과 도깨비, 괴물, 그리고 늙은 기사와 전사가 등장한다. 부커 상 수상작 <남아 있는 나날>에서 영국 집사의 심리 풍경을 일인칭 화자 시점으로 밀도 있게 그려낸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존재들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그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는 탐정물을, <나를 보내지마> 에서는 공상과학 소설을 선보이며 늘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한 작가에게서 이처럼 다채로운 변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못 놀랍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러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읽어나가다보면 어김없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또다시 만났다는 반가움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서사보다는 등장인물의 삶과 내면적 심리 풍경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책장을 덮는 순간 삶의 진실에 맞닿아 있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작품은 망각의 안개로 뒤덮인 마을에서 지난 삶을 잊은 채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살아가던 브리튼족 노부부가 어느 날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여행길에 나선 아내 비어트리스가 남편을 잃을까 까닭 없이 불안해하고 뭔가 병을 앓고 있는 듯 몸이 불편한 증상을 보이면서 이들의 여행길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우며, 이어서 기이한 만남과 사건들이 벌이지기 시작한다.


베어울프를 연상시키는 색슨족 전사 위스턴이 이들 노부부의 여행길에 동행하고, 전설 속 아서 왕의 조카로 알려진 가웨인 경이 돈키호테를 연상시키는 늙은 기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알 수 없는 비밀에 싸인 수도원, 도깨비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 이상한 환각 증상을 보이는 소년 에드원, 각가지 기괴한 도깨비까지 등장하면서 작품은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간다. 또한 이러한 신비한 분위기는 판타지물의 장르적 재미를 덧붙이는 데 그치지 않으며 독자를 점점 모호한 의문의 안개 속으로 끌어들인다.


작품 초반부 노부부가 아직 여행길을 나서기 전, 떠도는 한 여자가 우연히 마을을 지나가는 길에 주인공 비어트리스에 묻는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어떻게 서로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 보일 거예요?"


이 물음은 곧장 독자의 가슴에도 와 닿으며 기억을 잃어버리 노부부의 삶과 정체성, 이들이 떠올리는 기억 모두에게 의문부호를 품게 된다. 이들은 정말 아들을 찾아 떠나는 것일까? 며칠만 가면 아들이 사는 마을에 닿을 수 있다고 하는데 왜 그토록 오랫동안 아들을 찾지 않았던 것일까? 가슴속에 솟아는 의문들은 모혐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점점 파문처럼 퍼져나가고 마침내 독자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커다란 의문부호의 영역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가? 

오늘을 좀 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기억을 묻어야 할까? 

집단적인 망각, 혹은 기의 조작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작가는 대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불현 듯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망각에 취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에 마법사도, 용도 없지만 바쁜 일상과 화려한 재밋거리들이 어쩌면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는 망각의 안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


ⓒ하윤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XYZ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조 뇌섹남이죠! 허지웅 작가가 엘러리 퀸의 오랜 팬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서도 그의 거실 탁자엔 엘러리 퀸 컬렉션의 대표작 『Y의 비극』이 놓여 있었는데요. 허지웅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그는 왜 엘러리 퀸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먼저, 추리소설의 고유명사인 셜록 홈즈의 말을 들어 볼까요? 

『즐거운 살인: 범죄 소설의 사회사』에서 추리/미스터리 문학의 사회적·역사적 연원을 되짚었던 사회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에 따르면, 사실상 코난 도일이야말로 『주홍색 연구』에서 범죄학을 엄밀한 과학으로 전환시키려는 고전적인 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다른 학문들도 다 그렇겠지만, 연역의 과학과 분석이야말로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연구를 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네. 아주 난해한 사건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전에, 보다 기본적인 문제점들을 조사해 봐야 한다는 말일세. 탐정이라면 시체를 보자마자 한눈에 그 사람의 내력이나, 그 사람이 종사하고 있는 생업이나 직업을 구별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에르네스트 만델, 『즐거운 살인: 범죄 소설의 사회사』 46페이지 중에서 재인용


연역 추리의 정수,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 


코난 도일이 위에서 밝힌 것처럼, 범죄/추리 소설은 기본적으로 '연역의 과학'에 속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용의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건 추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멉니다. 탐정은 오직 눈에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치밀한 '사고 실험'을 전개합니다. 범죄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뒤쫓으며 나름의 전제를 세우고, 그에 맞는 결론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연역 추리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해결에 이르기 직전까지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제공되며, 독자는 전지전능한 탐정을 보며 감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공정한 단서를 통해 탐정과 지혜를 겨룰 수 있습니다. 영국풍의 거대한 햄릿 저택에 은둔하는 노배우 드루리 레인은 독자들의 안내자이면서,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초 엘러리 퀸이 내놓은 4권의 '비극 시리즈'는 미스터리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중에서도 허지웅 작가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Y의 비극』은 '세계 3대 추리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만큼 8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상을 지켜온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되고 있죠. 연이은 살인으로 얼룩진 해터 가문의 일원들의 억눌리고 비틀린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기법도 일품입니다. 반전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다면 허지웅 작가는 왜 『Y의 비극』, 나아가 엘러리 퀸의 세계를 좋아할까요? 그가 오랫동안 써 왔던 여러 글들을 읽어보면, 허지웅 작가가 얼마나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인간이라는 종자를 모순과 흠결 투성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고독한 개인의 힘과 성찰성 


들여다보면 인간이 참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축축한 그늘이 있고, 거기엔 뱀들이 몇 마리씩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속 편하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사회성과 긍정성이라는 명목 하에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합니다. 추리 소설 안에서 펼쳐지는 '연역적 사고 실험의 세계'와는 정반대로, 타인에 대한 조종과 의존, 편견이 난무하는 사람살이의 풍경입니다. 이런 풍경에 질색하며 허지웅 작가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반사회적인 인간이다. 혹은 그런 평가를 받는다. 조직 지향적이지 못하다. 결손 가정에서 자랐다. 세상의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라는 말을 혐오한다. 그런 말을 뱉는 자의 주둥이를 의심한다. 집에는 연쇄살인을 다룬 도서와 DVD가 수십 개에 이른다. (…) 


세상은 얼마나 쉽게 이유를 만들고 합리를 씌워 결과를 만들어내는가. 누군가의 죄를 묻기에 얼마나 편리한 곳인가. 내가 살인 혐의를 받게 된다면, 범죄를 잉태한 그 역겨운 속내와 어두운 과거가 단 하루 만에 낱낱이 밝혀지고야 말 것이다. 수수께끼는 풀렸다!" 


허지웅, 『대한민국 표류기』 ‘용의자’ 중에서


엘러리 퀸과 허지웅 작가의 글을 공히 좋아하면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키워드는 ‘개인’입니다. 고독한 개인만이 이룩할 수 있는 성찰성과 합리성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청력을 잃은 채 셰익스피어를 줄줄 읊으면서도 묵묵히 살인의 단서를 추리하는 드루리 레인과, 자신 안의 쓰라린 아픔을 숨기지 않고 기어이 쓰다듬으며 방송과 글쓰기를 넘나드는 허지웅 작가는 어떤 면에선 꽤나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 등 ‘비극 시리즈’의 대표작 3권을 합본으로 묶은 《XYZ의 비극》이 곧 출간됩니다. 이 합본호에 부치는 허지웅 작가의 추천사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드루리 레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 가운데 하나다. 탐정은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에 근거해 사건을 해결한다. 반면 이 멋진 노인은 탁월한 연역추리로 이미 사건을 다 해결해놓고도 법과 윤리, 사회적 역할과 어른의 책무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조금씩 풍화되어가는 것이다. 드루리 레인의 모험은 ‘누가 범인인가’로부터 ‘무엇이 옳은 것인가’로의 여정이다. 나는 부디 이 연작이 ‘앨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라기보다 ‘바너비 로스의 드루리 레인 4부작’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허지웅 작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df657 2017-09-21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 불만입니다. 최후의 비극은 왜 합본에서 누락했는지 궁금합니다. 드루리레인의 마지막 사건편인데 합본판에서 조차 누락시킨것은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책가격이 높아지더라도 최후의 비극편도 합본판에 들어가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비극시리즈 합본판에서도 누락되는 바람에 최후의 비극편도 따로 사야 하는 판국이군요. 하여튼 이번 합본판 아주 비추천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는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시절입니다. 36년간의 굴종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아픔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역사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컴컴한 시간 속에서도 낭만과 해학을 잃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 어두웠던 시절에도 발랄하고 명랑한 것들은 남아있어 우리를 미소 짓게 합니다. 일제 강점기엔 악랄한 억압과 지난한 투쟁도 있었지만, 동시에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연애와 우정이 있고, 춤과 노래가 있고, 무엇보다도 문학과 문학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이상과 박태원,

그리고 1930년대 경성 


1909년에 태어난 박태원과 1910년에 태어난 이상. 실제로도 문학회 동인 활동으로 인연이 있던 두 사람입니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 씨의 1일』로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지평을 열었고, 이상은, 말 그대로 고유명사 이상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한국 문학의 전설이죠. 



천재 시인으로 불리는 이상 김해경은 짧은 삶을 강렬하게 살다 갔는데, 그의 문학과 생애는 그야말로 극적이고 전위적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자리에 앉은 이상에겐 역시 범상치 않은 패기와 강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반면 이상 뒤편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구보 박태원은 어딘가 '모범생' 같은 이미지가 강합니다. 소설가 박태원의 성격 그대로라고 합니다. 


김재희의 탐정소설이자 시대극인 『경성 탐정 이상』은 바로 이 사진에서 시작됩니다. 마치 셜록과 왓슨처럼, 두 사람은 기막힌 호흡을 맞추며 1930년대 경성에서 벌어지는 범죄 사건들을 추적합니다. 한국 근대문학의 또 다른 거목이자 둘의 선배인 염상섭이 마치 007 시리즈의 'M'처럼 두 콤비를 은밀히 지휘합니다. 


“상에게는 이상스러울 만치 남에게 신뢰를 주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외모나 옷차림으로 보나 허술해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강인한 눈에서 빛을 발하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진리처럼 들리기도 해 경이로운 느낌을 주었다.” 

 『경성 탐정 이상』 1권 95페이지


이상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다소 둔하지만 성실한 박태원을 이끌면서, 복잡하게 꼬인 사건들을 추리하고, 그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음모를 파헤칩니다. 그러나 단순히 캐릭터와 역사적 사실들에 기댄 팩션 소설은 아닙니다. 『훈민정음 암살사건』으로 이미 그 진가를 인정받은 김재희 작가는 사건 하나하나에 세심한 플롯들을 이중 삼중으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밀도 있는 미스터리와

식민지 시대의 풍경 


더욱이 그 범죄들은 모두 당대의 식민지 현실과 절묘하게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작가는 1930년대의 역사에 기록된 여러 인물과 사건들을 꼼꼼하게 복원하면서 식민지 시대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합니다. 작품에선 간송 전형필과 나비박사 석주명, 조선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을 비롯하여, 당대를 뒤흔들었던 예술인 윤심덕과 왕수복, 최승희 등등이 등장하기도 하죠. 


“사토 박사가 만주에서는 불법 실험을 자행했지만, 이번 일로 크게 깨달은 것 같네. 내게 조선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진심으로 돕겠다고 약속했네. 조선인을 황국 신민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네. 그리고 자신의 조교가 그런 무시무시한 생체 실험에 깊이 관여되었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네. 아마 의사로서 직업적 양심을 깊이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겠지.” 

 『경성 탐정 이상』 2권 163페이지


소설 속 인물이 일본인이라고 다 사악한 것만은 아니고, 조선인이라고 해서 모두 선한 건 아닙니다. 1930년대 경성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공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식 문물에 환호하던 모던보이와 모던걸, 고등교육을 받은 채 실업자가 되어버린 룸펜들, 밤을 환하게 밝히는 다방과 술집들, 덕수궁과 명동, 종로와 동묘를 잇는 골목들의 풍경…. 


그렇지만 김재희 작가가 그린 이상과 박태원 탐정 콤비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절로 식민지의 본질과 한계를 차분하게 복기하게 됩니다. 이상은 유쾌함을 잃지 않지만, 그는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작품에서 다뤄진 그의 ‘데드마스크’는 『경성 탐정 이상』에서도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경성 탐정 이상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을까요? 여러분께도 이 책의 일독을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