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을 깊이 ‘읽는’ 방법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 관하여
“어느 인간에게도 마치 대양의 한 방울처럼 바탕이 되는 문화와 언어가 스며있어. 또 거기엔 모국의 역사가 얽혀 있고. 그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 인간이 있다면 종이쪽처럼 얄팍해보일 거야.”
― 요네하라 마리
루시드 폴의 8집 앨범 발매가 임박했습니다. 2015년 7집 활동 이후 10월 30일에 발매되는 8집 제목은 ‘모든 삶은, 작고 크다’이군요. 루시드 폴의 첫 에세이인 동명의 책도 앨범과 함께 묶인다고 하니, 많은 팬들이 기대할 만합니다. (7집도 책 형태를 띠긴 했었죠.) 11월 초부터 전국 8개 도시에서 낭독회를 겸한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도 전해집니다.
영원히 ‘젊은 오빠’일 것 같았던 루시드 폴도 어느덧 마흔을 넘고, 1997년 ‘미선이 밴드’로 데뷔한 지 무려 20년이 되었다니…. 그의 옛 앨범들을 가끔 꺼내 들으면, 특유의 서늘한 목소리와 여린 감성은 전혀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2009년 4집 ‘레 미제라블’을 내면서 음악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는 소설을 직접 쓰거나 번역하고, (자신이 오래도록 존경해 온) 마종기 시인과 서간집을 출간하기도 하는 등 저자와 번역가로서도 꾸준히 활동해 왔습니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 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중에서
루시드 폴은 다채롭고 엉뚱한 이력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가수입니다.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스웨덴 왕립공대에서 석사, 스위스 로잔연방공대에서 생명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학력이 유명하죠. 스위스 화학회의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고, 미국 약품 특허를 취득하는 등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박사 뮤지션’이 지난 2014년 제주도로 이사한 후 감귤을 재배하고 있으며, 자주 시골 생활을 예찬하곤 하니…. 역시 어떤 면에서 그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2015년엔 홈쇼핑을 통해 7집 앨범의 쇼케이스를 진행하며 자신이 재배한 귤을 세트로 묶어 팔아서, 9분 만에 완판 시켰다는 깜짝 뉴스도 화제가 되었죠. 최근엔 자신의 감귤이 무농약 인증을 받았다고 기뻐한다는 소식도 전해졌고요.

“제가 가장 동경하고 존경하고 또 보살피고픈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한 사람에게서 ‘선’ 이상 빛나는 가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 루시드 폴, 2014. 6. 채널예스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루시드 폴에겐 (그의 변화무쌍한 이력과는 달리) 언제나 한결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깊이 응시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다는 게 그 이미지의 핵심이 아닐까요? 그는 어쩌면 오랫동안 변함없이 ‘평범한 사람’과 ‘착한 사람’에 대한 노래를 불러 오고, 글을 써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이어서 외롭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다른 이와 소통하고 싶고,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고…. 이런 인간적인 마음들이 그의 모든 노래에 고루 배어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죽음과 고통 앞에서 평등하고 평범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루시드 폴이 지난해 번역했던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는 그가 오래도록 천착해 온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장 두드러지게 엿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국의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가 쓰고,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세상에 하나뿐인, 각국의 고유한, 그래서 낯설고도 아름다운 52가지 낱말들을 풀이하고 일러스트로 묘사한 책입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예컨대 나뭇잎 사이로 스며 내리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 ‘코모레비’[KOMOREBI]라는 단어가 있답니다. 정말 예쁘고 정감이 가는 말이죠? 호주의 원주민어인 와가만어에선, 물속에서 발가락으로 무언가를 더듬더듬 찾는 행동을 ‘무르마’[MURR-MA]라고 표현하네요. 스웨덴어 ‘레스페베르’[RESFEBER]는 여행이 시작되기 전, 긴장과 기대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뜻하고, 우르드어의 ‘나스’[NAS]란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긍지와 자신감을 한 단어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요.
나라별로 문화와 언어는 천양지차지만, 뭇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은 전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쯤 되니 언어와 음악의 공통점이 느껴지시지 않나요? 사람이어서 누구나 느끼고, 누구나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도구 말이죠…. 루시드 폴 역시 옮긴이의 글에서 “시간이 흘러 매일같이 ‘코모레비’ 내리는 나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 지금, 이 책을 통해 다시 ‘코모레비’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며, 책을 번역하는 일이 더없이 행복했다는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당신이 오래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를 되찾아 준다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추억을 되찾아 준다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제대로 표현할 수 없던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비로소 말로 옮길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 자, 그럼 이제 완벽히 번역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책의 서문
다른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어 올해 두 번째 후속작까지 출간되었답니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두 번째』는 번역가 김서령의 손을 통해 옮겨졌고요.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의 이 두 번째 책에서도 세련되고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맛깔진 문장들로 소개되는 각국의 고유한 어휘들이 가득합니다.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요네하라 마리의 문장처럼, 세계엔 수많은 문화와 언어들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국의 역사와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내 영혼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우린 소중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 나라의 예술과 언어를 배웁니다. 세계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누볐던 루시드 폴이 음악과 책을 통해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진실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오랜 팬으로서….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