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신 장편

<파묻힌 거인> 옮긴이의 글


기억은 아프고, 망각은 취한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놀라운 변신을 보여주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변신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내놓은 작품은 역사 판타지물이며 용과 도깨비, 괴물, 그리고 늙은 기사와 전사가 등장한다. 부커 상 수상작 <남아 있는 나날>에서 영국 집사의 심리 풍경을 일인칭 화자 시점으로 밀도 있게 그려낸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존재들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그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는 탐정물을, <나를 보내지마> 에서는 공상과학 소설을 선보이며 늘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한 작가에게서 이처럼 다채로운 변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못 놀랍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러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읽어나가다보면 어김없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또다시 만났다는 반가움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서사보다는 등장인물의 삶과 내면적 심리 풍경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책장을 덮는 순간 삶의 진실에 맞닿아 있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작품은 망각의 안개로 뒤덮인 마을에서 지난 삶을 잊은 채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살아가던 브리튼족 노부부가 어느 날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여행길에 나선 아내 비어트리스가 남편을 잃을까 까닭 없이 불안해하고 뭔가 병을 앓고 있는 듯 몸이 불편한 증상을 보이면서 이들의 여행길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우며, 이어서 기이한 만남과 사건들이 벌이지기 시작한다.


베어울프를 연상시키는 색슨족 전사 위스턴이 이들 노부부의 여행길에 동행하고, 전설 속 아서 왕의 조카로 알려진 가웨인 경이 돈키호테를 연상시키는 늙은 기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알 수 없는 비밀에 싸인 수도원, 도깨비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 이상한 환각 증상을 보이는 소년 에드원, 각가지 기괴한 도깨비까지 등장하면서 작품은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간다. 또한 이러한 신비한 분위기는 판타지물의 장르적 재미를 덧붙이는 데 그치지 않으며 독자를 점점 모호한 의문의 안개 속으로 끌어들인다.


작품 초반부 노부부가 아직 여행길을 나서기 전, 떠도는 한 여자가 우연히 마을을 지나가는 길에 주인공 비어트리스에 묻는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어떻게 서로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 보일 거예요?"


이 물음은 곧장 독자의 가슴에도 와 닿으며 기억을 잃어버리 노부부의 삶과 정체성, 이들이 떠올리는 기억 모두에게 의문부호를 품게 된다. 이들은 정말 아들을 찾아 떠나는 것일까? 며칠만 가면 아들이 사는 마을에 닿을 수 있다고 하는데 왜 그토록 오랫동안 아들을 찾지 않았던 것일까? 가슴속에 솟아는 의문들은 모혐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점점 파문처럼 퍼져나가고 마침내 독자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커다란 의문부호의 영역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가? 

오늘을 좀 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기억을 묻어야 할까? 

집단적인 망각, 혹은 기의 조작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작가는 대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불현 듯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망각에 취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에 마법사도, 용도 없지만 바쁜 일상과 화려한 재밋거리들이 어쩌면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는 망각의 안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


ⓒ하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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