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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 : 언어가 사라진 세상
앨리너 그래이든 지음, 황근하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조지 오웰의 『1984』를 현대판 스릴러로 만나다
_신간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에 대해
“언어는 언어가 없다면 증발해버렸을 망자들의 생각을 우리에게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역사의 청명한 울림을 듣게 해주고 우리 자신의 시대라는 고리를 그 장구한 연속에 이어준다.”
―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 141페이지 중에서
세계는 무서울 만큼 빠르게 변해갑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공지능이 이처럼 대중들의 화젯거리가 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첨단 과학 기술이 우리 곁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그 기술을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거기에 절박하게 매달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마트폰 없는 하루, 아니 불과 반나절을 생각하더라도 이젠 거의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인간의 미래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물질적으로는 이미 전 세계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야 마땅할 만큼 진보했지만, 우린 그 진보된 환경에서 전혀 느긋한 안정감이나 행복을 누리지 못하니까요. 오히려 과거보다 더 불행하고. 쫓기며, 미래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여전히 대량 실업과 전쟁, 테러 따위의 ‘전근대적인’ 공포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7/1201/pimg_7246351011786708.jpg)
인류의 디스토피아에 관한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는 조지 오웰의 『1984』입니다. 1949년 발표된 이 작품은 인간의 개인적인 삶과 사상이 말살되어버린 전체주의적 미래를 음산하게 묘사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당선되자 미국과 영국 및 유럽 각국에서 이 책이 불티나게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죠. 당의 진리부에서 기록 조작 일을 하던 윈스턴 스미스가 어느 순간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부조리를 깨닫고 자유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여러 제도적·기술적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진리부의 신어(新語)에 대한 내용은 의미심장합니다. 언어는 인간의 정신을 성숙하게 하고, 날카롭게 만드는 문화적 유산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동물과 구별되는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고, 수만 년의 역사에 걸친 공동체의 지혜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정신을 복종하기 쉽고 무디게 만들기 위해선 그들에게서 ‘말’을 빼앗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1984』의 진리부에서 신어의 사전 작업을 맡은 동료 사임은 윈스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단어들을 파괴하고 있어. 매일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씩 말이야. 단어를 뼛속까지 잘라 내고 있지. 제11판에는 2050년 이전에 쓸모없어질 단어는 단 한 개도 들어 있지 않을 거야. 단어를 없앤다는 것은 멋진 일이야. 물론 가장 쓸모없는 말은 동사와 형용사에 많이 있지만 없애야 할 명사도 수백 개에 이르지. (…) 해를 거듭할수록 단어는 자꾸 줄어들고 의식의 범위도 좁아지게 될 테지. 신어가 다 완성되면 동시에 혁명도 완수되는 거지.”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언어를 통해 사상의 범위를 좁히고 마침내 인간을 노예화 한다는 발상은 이미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로 잘 알려진 『멋진 신세계』에도 등장합니다. 1932년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이 작품에선 ‘런던 중앙 인공부화 및 조절국’의 국장의 입을 빌려, “선량하고 행복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되도록 일반적인 개념을 적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개념은 사회의 악이며, 철학자는 세상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혼자 책을 읽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며 셰익스피어와 파스칼 따위는 먼지를 털어내듯 소멸시켜 버렸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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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마음에 연결되려고 책을 읽는 거야. 하지만 제 삶의 번드르르한 잡동사니들을 묘사하느라, 소위 '글을 쓰느라' 바쁜데 왜 책을 읽겠어? 자기가 뭘 먹는지, 얼마나 추운지, 글쎄 모르겠구나, 축구경기가 져서 속상하다고 강박적으로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 모두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그러나 또 누구에게도 흘러들어가지 않는 그 끊임없는 홍수 현재를 따라가기도 힘든데 누가 구태여 과거를 들여다보겠니? 그러나 우리에겐 과거가 필요하단다. 하루보다 더 길게 갈 것들이….”
―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 141페이지 중에서
2020년을 목전에 둔 지금, 세상은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전망과는 꽤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회도 텔레스크린을 통하여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고 세뇌하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수면교육이나 행동조절을 당하면서 포르노 영화와 환각제에 취할 것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점 더 무엇인가에 예속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더 편리하고 ‘직관적으로’ 거부할 수 없게끔 만들어주는 테크놀로지에 말이죠. 우린 누가 막지 않더라도 더 이상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지 않고, 그 대신 1시간에도 몇 번씩 인터넷에 접속하기 바쁩니다. SNS는 마약처럼 우리를 붙잡아두고요.
이는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오웰과 헉슬리가 미처 예기치 못했던 부분입니다. 미국 작가 앨레나 그레이든은 바로 이런 부분에 주목하며,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두 선배를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으로 되살려 냅니다.
작품의 주인공 애너는 머지않은 미래. 책, 서류, 하다못해 손으로 쓴 일기장까지 과거의 유물이 된 세상에살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4년이 됐고, 미술가의 꿈을 버리지 않은 채 사전 편찬 회사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인 애너 존슨.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활자의 힘’을 믿는 『북미영어대사전』 편집주간 더글라스 존슨입니다. 『1984』의 진리부 사무실을 연상시키는 복고풍의 무대에서, 두 부녀(父女)는 세상의 문화적 대유행,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하는 ‘빅 브라더’에 대항하여 위험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전체주의의 폭력이 아니라, ‘언어’와 ‘활자’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밈’이라는 차세대 초소형 스마트기기에 빠져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고, 그 ‘밈’ 안의 언어들이 언젠가부터 아주 교묘하게 뒤틀려져 결국은 파국을 불러오는 세상입니다. 밈은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돕고, 신경 정보와 생체 정보를 이용해서 쇼핑에서부터 교통, 음식 주문과 배달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생활의 전 분야를 돕는 필수품입니다 “자동완성기능” 등으로 우리의 언어 사용의 에너지를 줄여주려 애쓰고, 개인정보를 활용한 “알고리즘”으로 “자동화 된 추천”을 쉼 않고 보내는 지금 이 “스마트한 디지털 세상”의 최종 목적지랄까요?
서른아홉의 나이로 ‘오른쪽 발목에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는 남성 지식인’인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와 다르게,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의 주인공 애너 존슨은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고, 완전히 독립하지도 못했으며, 갈팡질팡 방황하면서 실수를 저지르는 젊은 여성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점이 있는 만큼, 반대로 그녀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가족과 연인이 줄 수 있는 사랑과 헌신의 힘을 믿는 존재이죠.
애너 존슨은 윈스턴처럼 가까운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절연된 채 절망적인 싸움을 진행하는 고독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언어가 사라진 세상”은 타인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이해, 사랑이 결여된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과 싸워나가는 주인공은 『1984』나 『멋진 신세계』의 캐릭터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도 자신 안에서 먼저 타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발견해 나가는 ‘성장하는 인물’이어야 할 테니까요.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은 차근차근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눈 깜짝할 새 마지막 장에 도달하는 스릴러 소설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어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교양 소설의 성격도 갖고 있습니다. 『헝거게임』과 영화 <블레이드 러너>, <메멘토>, <인셉션> 등을 계승할 지적인 스릴러소설이자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일 거예요. 올 겨울, 스마트폰을 잠시 놓아두고 읽기 시작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