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가 있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김예진 옮김 / 검은숲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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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가 있었다> 편집자 J입니다.

살벌한 추위에 다들 고생 많으십니다ㅠㅠ 이런 날씨엔 역시 이불 속에 들어가 귤 까먹으며 책 한 권 읽는 맛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할 책은 절찬리(이고 싶은!)에 예.약.판.매 중인 엘러리 퀸 컬렉션 : 《노파가 있었다》입니다.


엘러리 퀸 컬렉션을 모으고 계신 분들이라면 반가운 소식이지요? 특히나 이번 작품은 한동안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엘러리 퀸 형제가 초기 소설 스타일의 비현실적인 퍼즐 미스터리 포맷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데요. 엘러리 퀸을 처음 접하신 분들도 좋습니다. 마더 구스 동요를 소재로 마치 한 편의 환상적인 동화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 감히 단언해봅니다!


다른 어떤 말보다 《노파가 있었다》의 역자 후기로 이 책을 설명할까 합니다. 사실 후기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어 고민했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꼭 소개하고 싶었그든요!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 이 후기는 《노파가 있었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엘러리 퀸 전문가의 글이 읽고 싶다’는 분들은 아래 김예진 번역가 님의 후기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 소개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러리 퀸, 맨해튼의 토끼 굴에 뛰어들다


작가가 평생을 들여 한 주인공을 묘사하다 보면 주인공의 인물상 또한 작가를 따라 나이를 먹게 마련이다. 처음 등장할 때는 치기에 가득하고 자신만만했던 젊은이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더 성숙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고,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기보다도 더욱 쓰는 이의 심정이 솔직하게 반영된다는 소설이라는 매체 속에서, 기나긴 세월 작가의 페르소나로서 함께한 주인공이 그 영향을 받는 현상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러리 퀸 또한 1929년 로마 극장 관객석의 느닷없는 시체와 함께 탄생한 이래 꾸준히 나이가 들었고, 오로지 ‘누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가에만 관심을 두었던 이 날카로운 젊은이도 점점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사이 두 창조주들 역시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독자에의 도전’뿐만 아니라 ‘청취자에의 도전’, ‘시청자에의 도전’을 던지며 퀸 부자가 활약하는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영상 매체에 활발하게 도전하던 할리우드 시기를 거쳐 이른바 ‘3기’라 불리는 라이츠빌로 돌아온 엘러리는 더욱 진중하고 차분해진 성격으로 1942년 《재앙의 거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 사이의 사연에 고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인간미 가득하며 어른스러운 면모를 갖추게 된 인물로. 라이츠빌에 처음 도착하여 ‘콜럼버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엘러리의 눈에 이 시골 마을은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사회의 축소판으로 비쳤다. 그 눈은 단순한 사물을 관찰하는 차갑고 이성적인 눈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깃든 따스한 시선을 던지는 눈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인 1943년, 프레더릭 다네이와 만프레드 리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내놓았다. 현실 사회와의 관련도, 등장인물의 현실성도,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드라마도 없이 오로지 ‘옛 방식’대로 승부를 건 《노파가 있었다》였다. 냉혹하고 비정한 페이퍼백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한창 횡행하던 시절 이는 꽤 흥미로운 시도였다. ‘마더 구스’ 등의 동요를 이용한 동화 같은 미스터리는 1928년 밴 다인이 내놓은 《비숍 살인 사건》 즈음의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40년대 들어서는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소재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노파가 있었다》의 배경은 심지어 라이츠빌도 아니므로 라이츠빌 시리즈에 포함시킬 수도 없다. ‘노파’의 웅장한 저택은 허드슨강을 바라보는 뉴욕 한복판에 떡 버티고 있다. 엘러리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집이나 아버지가 있는 경찰청에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다.


책만 읽는 언니 옆에서 졸음을 참으며 연신 하품을 하다 시계를 보고 바삐 뛰어가는 흰토끼를 보고 저도 모르게 뒤따르게 된 앨리스처럼 엘러리 역시 법원에 앉아서 오지 않는 판사를 기다리느라 아버지와 벨리 경사 사이에 낀 채 꼼짝 못 하고 하품만 하다가, 흰토끼처럼 돌연 나타난 찰리 팩스턴이라는 변호사에게 이끌려 저도 모르게 기상천외한 토끼 굴 같은 포츠 저택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저택 한구석에는 수수께끼 같은 물질을 끝없이 끓여대는 과학자의 기괴한 탑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피터 팬의 환상적인 동화 속 오두막이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결투로 해결하자고 우겨대는 시대착오적인 남자가 있고, 또 한쪽에서는 왕년에 전장에서 활약 좀 했다는 중년 남자 둘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체커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 모든 저택의 정점에는 신발 사업으로 ‘왕조’를 꾸린 하트 여왕 같은 노파가 앉아 있다가 신문기자들을 향해 총을 쏘아댄다. 시체 옆에는 영문 모를 닭고기 수프 그릇이 나뒹굴고 흉기는 플라타너스 나무 위 찌르레기 둥지 속에서 튀어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신문 카툰에서 ‘신발 속의 노파’라며 조롱조로 그려진 집안이라서인지 엘러리는 들어가 식탁에 앉자마자 포츠 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마더 구스 동요와 바로 결부시켜 연상한다. 네온사인 글자가 번쩍이는 커다란 신발 동상 앞에 일단 발을 들인 순간, 애써 얻었던 진중함과 어른스러움은 안타깝게도 우선 잃어버리고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꾸며진 연극 무대 같은 집 안에서 우왕좌왕 일어나는 소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현실감을 잊게 된다. 두 작가가 라디오 드라마를 한창 쓰던 와중이어서 그런지 가끔 나타나는 라디오 드라마 대본 같은 대화도 비현실성을 더해준다. 사실상 한 집안을 다스리는 폭군 같은 노파란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나 《Y의 비극》에서도 이미 등장한 소재였지만 《노파가 있었다》의 농담 같은 세계 속에서 결국 노파는 한없이 권위적이거나 한없이 음울할 수만은 없게 되고 말았다. 뭐,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자연사를 맞이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노파가 가졌던 일종의 유머 감각 덕분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타 매체에서 먼저 태어나 이 책에서 생명력을 얻은 니키 포터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겠다. ‘빨간 머리의 깜찍하고 전형적인 미국 아가씨’로 묘사되는 니키는 당시 라디오 청취자들이 원하던 엘러리의 파트너상에 까무잡잡한 소년 주나보다 더 잘 부합했던 모양이다. 니키는 속기사라는 명목으로 취직했지만 결국은 엘러리의 ‘비서’로 자주 등장한다. 엘러리도 본업은 소설가지만 작품 속에서 소설 쓰는 모습이 자주 나오지는 않으니 비슷한 맥락의 직업인 셈이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범인과 결혼할 뻔했다가 광기의 토끼 굴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니키가 《범죄 캘린더》에 실린 단편 〈약손가락의 모험〉에서 신성한 결혼식의 수호자처럼 분개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니키는 이토록 사연 많은 집안에서 탈출한 생존자치고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오지랖 넓은 조수가 되었다. 그러나 엘러리와 니키는 연인이 될 듯 말 듯 애매한 거리에 있으나 결코 연인이 되거나 결혼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탐정 탐구 생활》에서 두 사촌 형제가 그러지 않겠노라고 딱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이미 세상에 차고 넘치는 부부 탐정 위로 또 한 쌍의 부부 탐정 팀을 굳이 추가할 생각이 없고, 엘러리는 영원한 독신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잠깐 등장했던 엘러리 퀸 부인은 영영 등장할 일이 없을지어다. 아멘!


일견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해 보이는 뒤죽박죽 토끼 굴 세계 같은 무대에서 아주 사소한 단서로 이성적인 범죄자의 두뇌를 발견하고 사건을 극적으로 해결해낸 엘러리 퀸의 활약상은, 초기 국명 시리즈의 또박또박한 연역추리를 선호하던 독자들에게는 오랜만에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성숙해졌다가도 가끔은 젊은 시절의 경쾌함을 떠올리곤 하는 것처럼, 농익은 인간 관찰을 한참 읽다 보면 때로는 가볍고 산뜻한 퍼즐 미스터리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김예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부 영어통번역학 전공. 양질의 미스터리 작품을 널리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국 총 미스터리》, 《스페인 곶 미스터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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