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좋아하지만 겨울마다 졸업식이 있어서 겨울=헤어짐의 계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름에 졸업식을 하는 곳으로 온 지 몇 년만에 드디어 졸업식=여름의 공식이 입력되면서,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슬슬 곧 다가올 이별을 생각하며 우울해진다. 아니나다를까 나는 5월 말쯤부터 곧 졸업할 친구들을 축하해주기는커녕 혼자 아쉬워서 끙끙 앓기 시작했고 그 무렵 계속 연주한 곡도 양관삼첩 뭐 이런 곡조만 멍하니 타고 있었다..

오늘 졸업식이 있었고 적지 않은 선후배들이 학교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간다. 한국에 있을 때는 헤어져도 경조사가 있으면 비교적 쉽게(?)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정말 땅이 워낙 넓다보니 앞으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딘가로 가려면 정말로 하루 이상 걸리고 그러니까... 다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박사졸업생들은 거의 학계에 있으니 언젠가는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다시 만나자는 말과 다시 만날 날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도저히 웃는 얼굴로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울지는 않지만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해진다..

 

그리고 나도 한국갈 날이 어느덧 가까워졌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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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에는 안방에서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 바로 옆에 창고가 있었다. 그 창고엔 엄마와 이모들과 외삼촌이 학창시절 읽던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가뜩이나 좁은데다 양옆이 책장으로 가득차 있고 바닥에도 책이 쌓여 있어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공간만 남아 있었다. 아마 내가 초등학생쯤이던 시절에, 더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그 창고에 들어가, 먼지날린다고 구박받으면서도 보고 싶은 책을 기어코 몇 권 골라 왔다. 책은 중고생이 읽을법한 세계명작전집류가 있었고, 아마 이모들이 사 두었을 당시에 유행하던 여러 시인들의 시를 짜집기해 만든 시집들이 있었으며, 외삼촌이 공부하던 낡은 맨투맨영어와 오래된 수학책, 한국단편문학선집들, 그 때만 해도 전혀 관심이 없던 사회과학쪽 책도 꽤 있었다. 가져온 책들 중에서도 아끼던 검은 표지의 독일인의 사랑 안에 외갓집 앞 풀밭에서 꺾은 네잎클로버를 넣어두었고 그 책은 지금도 9X년의 네잎클로버를 품은 채 내 방에 있다. 

외할머니의 장독대가 있던 뒷마당과 달리 앞마당은 외할아버지께서 소일거리로 만들던 여러 수공품들이 있고, 아마 추석쯤이었을 것이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코스모스가 기분좋게 흔들렸고 나는 책을 옆에 쌓아두고 마당에 앉아서 코스모스랑 하늘이랑 그 사이에 걸려 있는 빨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외삼촌이 작은방에서 틀어둔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악은 주로 재즈나 그 당시 유행하던 팝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노래였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 최근에 방영된 중국 드라마를 보았다. 수업중에 토론한 드라마였는데 70부작이라 거의 20부작밖에 못 보고 수업에 들어갔던 터라 종강을 하자마자 끝까지 달리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삽입된 배경음악이 그 때 외갓집에서 들었던 선율과 비슷했던 걸까. 갑자기 까맣게 잊고있던 그 때와 그 공간의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방금 본 드라마는 2018년작이고 사극인데 보다가 갑자기 생뚱맞은 외갓집이 생각나서 좀 의아했는데, 삽입곡은 현대풍의 곡이니 아마 음악 때문인 것 같다... 음악과 향기가 불러일으키는 기억이란 참. 신기해라.

나는 지금 마음껏 책을 볼 수 있는 내 공간이 있고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살 수도 있지만, 여전히 양쪽 책장 사이에 끼어 있던 그 때 그 책창고가 그립다. 먼지들이 쌓여 있고, 다리가 가늘고 긴 거미들이 기어다니던... 좁은 창문으로 햇살이 더 좁게 비춰 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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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을 뒤지다가 갑자기 벼락처럼 정말 머리를 때리듯이 나는 박사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갑자기.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안 했었나. 아니면 하면서도 무의식 속으로 묻어뒀던가. 돌아보니 너무 멀리 왔다. 과분하다. 재능이 너무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에 재능이 있는가. 하나하나 떠올려봐도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 지금 당장 붙들고 있는 논문으로 대체 무슨 남들과 다른 생산성 있는 작업을 해낼 수 있을까... 갑자기 정말 너무 무서워져서 잠시 멍하게 있었다... 당장 며칠 후까지 읽어야 할 책 논문 써야 할 것들이 한가득인데 너무 많고 어려워서 그냥 일시적으로 심하게 겁을 먹은 걸까...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나 혼자에게만 온 무슨 계시 같은 걸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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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t 2019-06-1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그 생각은 이미 엄청 했었어! 그리고 주변을 봐도 그 생각을 안하는 사람의 비율이 현저히 적은 것 같고. 다만 재능으로만 박사를 받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어! 일시적으로 할 게 너무 많아서 압도된 상황에서 찾아온 생각일거야.

sifr 2019-06-19 00:23   좋아요 0 | URL
내가 이공계 박사시절과 현재를 비교하게 될 때마다 이공계 때는 호스에 입을 대고 꾸역꾸역 밀어넣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망망대해에 혼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라고 했었는데 저때는 갑자기 두개를 합친 느낌이 너무 강하게 왔어. 엄청난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라고. 하지만 어찌어찌 기말논문을 마무리했고 지금은 다시 조금 나아졌어 :) 이제 방학이니 좀 쉬려고! 우리 쉬엄쉬엄 한 발짝씩 해보자 그만둘 생각은 없으니까 ㅎㅎ

brot 2019-06-19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말 논문 마무리하느라 정말 수고 너무 많았어! 맞아, 이렇게 한 고비 또 한 고비 넘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와 있지 않을까 ㅎㅎ 나도 시험 끝나고 방학인데 방학이어서 좋다 ㅠㅠ 흐. 푹 쉬었다가 우리 다시 쉬엄쉬엄 가보자 웃쌰

sifr 2019-06-19 03:25   좋아요 0 | URL
ㅎㅎ 너희는 시험이구나. 세상에 시험이라니... 그것도 끔찍하다 ㅋㅋㅋ 방학에도 계속 거기 있는거야? 한국 갈 계획은 없니 ㅎㅎ
 

다시 엄청 바쁜 생활로 복귀했다 내가 그렇지 뭐 ^^!

기말에 예정되어 있던 독서회 발표가 예상치 못하게 밀리며 다음학기 두번째로 밀려났길래 이번학기 발표 없다 만세 이렇게 한가할수가! 를 외치고 있었는데

후배 1이 펑크를 내고.... 그래 다음학기 첫번째로 발표하면 되지 ^^!

후배 23이 나란히 펑크를 내고 그걸 오늘 알려주는 바람에......... 심지어 맨처음 계획보다 앞으로 당겨졌다. 얘들아.....?

아무튼 그래서 다다음 주에 없던 발표가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쭉 당겨진 거지만......

...

그래서 매학기 말마다 발표하는 징크스는 역시 깨지지 않은 걸로...

 

슬슬 기말논문을 준비하고 수업 끝나자마자 내고 한국으로 오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되면 기말논문이 밀리게 되고

한국행도 밀리게 되고

여름계획도 밀리게 되고

...

 

내인생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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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생활이 조금 정상적 리듬을 찾은 것 같다. 물론 안 바쁜 건 아닌데 바쁘고 난 후에 며칠 쉴 수 있는 거. 세상에 ㅠㅠ... 아무 스케줄 없는 날이 너무 고맙다.
이번주는 일월 쉬고 화수목 엄청 바빴고 오늘은 또 아무 일이 없고 토일 바쁠 예정이지만 월요일에 또 쉴 수 있다. 이제야 좀 사는 것 같네.... 그래 제가 매일 놀고 뒹굴거리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 스케줄이 없어야 지금처럼 도서관도 오고 논문도 보고 그러죠 ㅠㅠㅠㅠㅠㅠ
쉬는(?)날 기념으로 아껴둔 실론티 티백을 텀블러에 넣어 마시고 있는데 차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고 도서관은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조용하고 오늘까지 고쳐 내야 하는 논문작업은 적당히 순조롭다. 논문스트레스가 물론 없진 않지만 그 이후에 날 기다리고 있는 스케줄폭격이 없는 것만 해도 매우 행복하다 ㅠㅠ 천천히 홍차를 마시고 논문 체크를 하면서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그리고.... 오늘밤엔 논문을 정말 내고 말리라 오늘밤에 못 내면 자체징벌로 일주일 홍차를 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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