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프트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1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처음 만난 날부터 나는 주욱 르귄의 팬이었어요. 내 인생 그 시절 르귄을 만났던 것이 지금의 나로 있게 한 큰 변인이 아니었나 생각할 정도지요. 출간 기대조차 없었다가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구해 읽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표지가 무슨 상관예요, 르귄 할매의 근작인데!

우선 말많은 표지에 대해서. 표지 일러스트는 업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법한 정준호씨가 그렸는데 요약된 줄거리만 보았거나, 아니면 아예 책 내용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르귄의 작품 세계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내용을 읽고 그렸다면 절대로 이런 그림이 되진 않았을텐데.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카스프로만트는 한 번도 번성한 적이 없는 고원 지대의 작은 장원으로,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못 삽니다. -_-; 얘네 영지에는 말이 세 마리 밖에 없고, 소도 세 마리가 전부로 뭐 그 밖에 양이나 닭같은 것도 있을만큼 있는 것 같긴하지만 아무리 봐도 부유하고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멉니다. 정장으로 입는 것이 양털로 짠 재킷과 킬트죠. 그리고 1권을 아무리 읽어도...총 같은 게 있는 문명이 아니예요. ...

스타워즈가 영화계에 가져온 혁명은 "모든 것이 낡아 있는 세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손때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은 재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성과 이야기를 끌어낸다고 봅니다. 게임 일러스트 쪽에는 온통 반짝거리는 새 갑옷이 넘쳐나지만 이제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가져오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원서보다는 그래도 나은 표지라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그림체 좀 바뀌었네요. ~_~

책은 르귄 할매의 번역된 다른 책들과 비교해서 훨씬 읽기 쉬워요. 등장인물들이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그대로이지만 그 침묵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진 않아요. 여기 나오는 사람들도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 그림자는 훨씬 이해하기 쉽구요. 이야기의 흐름은 르귄 할매 작품치고 느리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느리긴 느리게 느껴질 것 같아요. 스펙타클한 사건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팔아보고 싶은 시공사의 마음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르귄 할매의 작품 중에서 적극적으로 애들한테 어필할만한 작품은 헤인 연대기의 《유배 행성》이라고 생각해요. 신부 탈취도 나오고 치고 박고 싸우는 장면도 있다 보니.

여튼 르귄 할매는 여전히 좋은 작품 쓰고 계시네요. 그 사실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인데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참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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