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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태평양 한 가운데 어린 소년이 있다. 16살 파이. 타고 있던 배는 침몰하고 작은 구명보트에 생명을 의지하고 있다. 그 배에는 파이이외에 얼룩말, 오랑우탄, 점박이 하이에나... 그리고 뱅골 호랑이가 있다. 굶주린 하이에나는 얼룩말, 오랑우탄을 차례로 집어 삼킨다. 파이는 그것을 고스란히 다 지켜봐야했다. 그리고 얼마 후, 보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호랑이는 그 하이에나를 먹어치우고 보트 위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바다 위, 소년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도 가족을 잃은 슬픔도 아닌,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그 본능은 거대한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소년 앞에 서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호랑이, 리차드 파커! 그 호랑이는 남아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집어 삼킨 후에도, 계속되는 갈증과 배고픔으로 으르렁댄다. 하지만 소년에게 이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 "호랑이보다 태평양이 더 두려웠다."(140) 파이는 더 두려운 존재와 싸우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호랑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생존의 본능은 깊이 숨겨져 있어 그 모습을 짐작만 할 뿐... 하지만 존재를 위협받은 본능의 광기는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다. 머지않아 소년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형체도 없는 희망을 기다리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눈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현실에 집중한다.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59)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212)
소년은 처음에 호랑이의 존재를 없애버리려 한다. 하지만 그 호랑이를 의지하고, 길들이고, 그리고 사랑하게 된다. 둘은 하나의 운명이 된다. 파이는 리차드 파커와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리차드 파커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205)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야 했다. 그 필요성을 깨닫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문제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나의 문제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도 비유적으로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터였다... 시간이 흐르면 동물의 끈질김은 사람의 연약함보다 오래 버티게 마련이니까."(207)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292)
"내가 동물처럼 먹어댄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아팠던 날, 내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추락했는지 분명히 알았다. 시끄럽게, 정신없이, 늑대처럼 먹어대는 내 모습은 리처드 파커가 먹는 모습과 똑같았다."(279)
나는 미친 게 아니었다. 내게 말하는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나는 호랑이와 말을 나눌 수 있다는데 흥분했다.(305-307)
"궁금하다, 사람 죽인 적 있어?
"둘"
"아니, 남자하나, 여자 하나."
"그럴 줄 았았어. 동물성은 후천적으로 발달한다고 하더라구. 그래 사람을 왜 죽였어?"
"욕구 때문에."
"그들을 안 죽였으면 내가 죽었을 거야.".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어. 그때 사정이 그랬어."
"본능이야. 그런 걸 본능이라고 하지. 하지만 대답해봐. 지금은 후회없어?"
이야기의 결론은 살아남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 침춤호 침몰의 원인을 알기위해 찾아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로 끝이 난다. 이 소설은 수수께끼같다. 답을 찾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소설이란 그런 게 아니던가. 현실을 취해서 변화시키는 것. 비틀어 그 정수를 끄집어내는 것(7)" 내겐 완벽한 소설이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맞아 떨어져"
"그러니까 대만 선원은 얼룩말이고, 자기 어머니는 오랑우탄이고, 요리사는... 하이에나... 그렇다면 이 사람이 호랑이군요.!"
"맞아.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죽였지_ 또 프랑스인 장님도. 그가 요리사를 죽인 것처럼."(387)
...
"나는 두 분께, 그사이 227일 동안 일어난 일을 두 가지로 이야기해드렸어요."(393-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