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시작 민음사 모던 클래식 37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박물관에 들어서면 마치 내가 과거 역사의 한 순간에 살고 있는 착각이 들고, 수많은 시간들을 견디고 그때의 모습으로 진열장 안에 놓여있는 물건들을 보는 것은 경이롭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모아놓은 인생의 이야기들은 이름표가 붙여진 박물관의 물건들을 보는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시작>은 그 경이로운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준다.

 

 

#56~57 데이비드는 박물관의 냄새가 땅에서 파내어져 수장고의 두꺼운 나무 선반에 보관된 것들의 케케묵은 향이 좋았다... 역사의 물질적 현존에 놀라워하고 고대 유물들이 거쳐 온 세월의 간극 앞에 서서 외경심을 가지는 일이, 데이비드에게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다... 먼먼 과거 사람들의 흔적이 이렇게 살아남았고, 우리가 그 앞에 서서 실컷 볼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기적처럼 느껴졌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태어나서 자라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른다. 자신의 부모가 그랬고, 자신도, 그리고 자녀 역시 그렇게 살아간다. 인생은 때론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 멈출 때도 있지만, 방향을 잃어버린 그 지점이 다시 시작의 순간이 된다. 데이비드도 자신을 길러준 부모가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방황하고, 우울증에 걸린 아내를 힘겹게 지켜봐야하고, 잠시 직장동료에게 흔들리고, 실직의 아픔을 겪지만, 데이비드의 인생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167 인생은 훨씬 작은 계기와 우연들의 만남, 엿들은 대화, 일의 추이를 끊임없이 바꾸고 재조직하는 과정과 실책들, 관찰하거나 기록하거나 조종하기에는 너무나 미세하고 무수한 순간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에 의해, 변화하고 움직여간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지만, 일요일 오후 아내와 딸과 어머니가 함께 앉아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이비드의 독백에서 ‘이런게 인생이구나’ 싶다.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는 인생이란 그 시작을 선택할 수 없고(스스로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인생도 없고, 부모없이 시작된 인생도 없다), 또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시작점에 놓이게 되지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면서 성장하고 완성되어간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332 아내와 딸과 어머니가 조용한 일요일 오후 자신의 집에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이비드는 놀랍게도, 이것이, 이 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고, 함께 먹고, 이렇게 오후 시간을 오래 함께 보내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심대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감고 소파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서, 잠든 체하고, 조잘거리는 케이트와 한 마디씩 툭 던지는 어머니의 나른한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거실에서 아내가 어머니에게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어머니도 아내에게 얘기하고, 케이트가 질문을 하느라 끼어들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하고, 배고픔 때문에 점차 삐죽삐죽해지는 가족의 대화 소리를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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