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문장을 읽고, 이건 일종의 타이밍과 비슷한 것도 같다 싶었다. 4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고창에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4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서울로 돌아와 다시 일주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이건 내 이야기가 되겠구나 라는 감이 오면서. 하나의 이야기, 한 사람, 삶은 하나, 인간은 쉬이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변화란 거의 미션 임파서블인 거고 그런 식으로 Une Vie. 발터 벤야민의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벤야민. 정체성이 또렷하고 좀 덜 또렷하고 이 차이로 인해서 하나인 게 하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이 차이를 헤아리는 일에 극도로 열성적이다.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구나 10키로 가까이 살이 빠져 얼굴뼈가 그대로 드러나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순간 알았다. 네가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눈물을 훔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끊이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면서 대체 얼마나 말이 고팠던 거니?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안에서 말풍선으로 움직였다. 인간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주는가, 될 수 있는가. 관계의 일회성이나 영속성과 무관하게 인간은 인간에게 찰나가 되어주거나 영원한 화석으로 박히거나 일평생 숨을 자유롭게 쉴 수 있게 만들어준다. 말 한 마디나 스치는 눈빛만으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말 한 마디와 스치는 눈빛이 운명의 연쇄고리를 만들어낸다는 건 정말 신기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대수롭지 않게 의도한 바 없이 그냥 장난처럼 던진 말 한 마디가 너와 나의 경계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저녁에 동생과 잠깐 통화를 했다. 77년생 언니가 있고 72년생 언니가 있는데 이 언니들이 갱년기가 온 거야, 그래서 갱년기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어. 한 명은 피부에 매년 수백을 쓰고 한 명은 피부과에 전혀 가지를 않는데 말야, 언니 피부과 전혀 가지 않는 언니가 훨씬 젊어보이고 예뻐보였어. 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한 명은 팔자가 편한 거고 한 명은 마음이 불편한 거고. 위태롭게 인공미를 추구하다가 나락으로 가기 직전에 멈추겠지, 라고 무심하게 대꾸하니까 인간은 이상해, 라고 동생이 말해서 웃었다. 나라카. 산스크리트어로 지옥을 의미하는 나라카라는 불교 용어를 그대로 갖다 쓰면서 나락은 지옥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십대 중반 무렵 내 닉네임은 나라카였다. 겉멋에 충실했던 때였다. 네일 정리를 하다가 김수현 광팬을 만났다. 우리 수현이가 우리 수현이가 라는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리다가 그런데 고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고 담담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동공이 흔들렸다. 강하게 반박을 해서 그럴 수 있죠, 인간이니까 인간이기에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죠, 하고 하나하나 말을 이어가니 더 심하게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만 해야겠다 싶었다. 그의 결론은 이렇게 끝났다. 그래도 우리 수현이는 이 지옥 같은 시간을 잘 이겨내고 5년 후에 가뿐하게 컴백할 거예요. 팬심이라는 건 참으로 무섭구나 깨달았다. 파스칼의 문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잣대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 마음이 보여 어제는 가만히 귀를 열고 하는 말들을 다 들었다. 집에 돌아와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아이는 약간 칭얼거렸다. 급히 샌드위치를 주스와 멕이고 약을 멕이고 샤워를 하고 오일로 다리 맛사지를 하다가 엄마가 다리 맛사지 해드릴까요? 마마 물어보니 응응 그래서 깁스를 하지 않은 다리에 오일을 떨구고 맛사지를 하니 아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입맛도 없고 성욕도 없고 그렇게 몇 달을 살았어, 10키로 빠진 이의 말을 듣고 종합검진이 끝나고 몸에 별 탈이 없다 싶으면 너무 그렇게 몸에 혹독하게 굴지 말아라 왜 자꾸 자신을 갖고 못 살게 구느냐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자고 그렇게 해,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지려고 좀 하지 마, 무슨 고행을 하면서 인생을 사느냐, 수도승도 아니면서, 헤어질 때 한 마디 했다. 좋아서 발발거리는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으며 응응 언니, 라고 하는 아이를 버스 안에 태워보내고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가는 것을 구경했다. 아이의 베프가 놀러와 아이와 즐겁게 웃음꽃을 피우면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쪼렙이라는 단어가 들려 화장을 다 하고 나가서 물어보았다. 쪼렙이 무슨 뜻이야? 하고. 아이 베프는 쪼렙 정의를 알려주고 그 반대는 만렙, 이라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게임을 일절 하지 않는 나는 게임 관련 용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 예문을 하나 들었는데 아니야, 그건 사실이! 라고 말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니 내 몸은 네가 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걸까. 아이들은 둘 다 신나서 물개박수를 쳤다. 쪼렙들 앞에서 만렙이 그만 본심을 들켰군, 앗차차, 앞으로는 더 용의주도해야겠구만, 했다. 허나 인생 단면을 어떻게 쪼개어 어떻게 바라보면? 어떤 잣대로 쪼렙과 만렙을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줄리엣 미첼의 번역본. 그는 언제나 나를 만날 적마다 진실만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스스로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야 중얼거리면서. 내 앞에만 있으면 저절로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말하고 깜짝 놀라곤 하는 사람들. 당신도 역시. 죽을 때까지 침묵하고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 거야, 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건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이미상과 이희주의 연재글을 번갈아 읽다가 발 페티시를 가진 한 유부남의 에피소드_ 자신의 아내를 사랑해서 자신의 아내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해서 그 자신을 괴물로 만든 남자의 이야기에 눈이 멎었다. 어떤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과 내가 사랑이라고 느끼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는 경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허공 안에 들어간 자신을 본래의 내 자신이라고 여기는 경우. 그것을 하나의 삶_이라고 부르지 못할 까닭은 없다. 여기 어리석은 한 남자가 있어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고 자신을 괴물로 만들었노라고, 그리고 괴물이 된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겠냐고 여신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라며 눈물을 떨구고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관계. 자, 암흑의 시작인가, 빛의 새로운 도래일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느낀 것들, 몸무게가 빠지며 호흡이 가빠지며 일상을 살아가는 규격화된 흐름조차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 생의 의지가 서서히 마모되어간다는 것, 욕망의 크기가 분절되어 쪼개져나간다는 것, 인간이 인간에게 오고간다는 것.
4월 시작이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르트르의 문장도 더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