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아이는 탐스러운 딸기를 한입에 왕 넣고 우물거리며 이야기했다. 말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려니 여기면서도 네가 또 그로 인해서 잃게 될 것들이 있을까봐 나는 어미로서 살짝 저어하는 마음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건 네 삶이고 네 시간이고 네 운명이고 네 사람들이니까 이 어미가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건 어쩌면 네게 하등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도망치려는 생각뿐이었던가. 도망치고 도망치면 언젠가 내 낙원에 다다르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건가.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좋아 일순간 행복했다. 당신의 숭고한 몸_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순간을 잠깐 헤아려본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고. 일흔이 가까워오는 한 나이든 여성의 일기를 우연히 읽었다. 나를 더 이상 여자로 봐주는 시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직도 여자 같지만 세상은 더 이상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고 그 시선에 익숙해진지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때때로 서운함을 느끼는 건 나이든 여자의 노망일까. 그 일기를 읽다가 한 풍경이 떠올랐다.


 나를 어여삐 여기시는 신들이시여, 제 나아갈 길을 보여주세요, 제가 그 길을 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때가 작년 이맘때쯤. 


 불과 1년이 지났을 따름인데.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마땅하리라, 몸과의 접촉은 불확실하고 간헐적이며 자꾸 달아나면서도 여전히 끈질기게 잠존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몸에 부딪혀 끊임없이 말과 언어, 담론을 쥐어짜내야 하리라. 확신해도 좋은 사실은 여기서든 저기서든, 접촉되고 명명되고 의미의 바깥으로 기탈되어 진정 이것이 되는 몸의 노출이 발생하는 곳에서라면 어디에서든지 언어와의 몸싸움 corps à corps, 의미의 육박전이 일어나리라는 점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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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와 치카의 [계절의 모노클]에 실린 전주곡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정수윤 번역가가 번역했습니다. 봄날, 동네 친구에게 꽃을 선물받았고 저 환한 노란 빛깔이 자꾸 어른거려 두 눈을 즐겁게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간의 생이란 참 찰나에 불과하면서도 영원을 내내 말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잠깐 났습니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곳으로 정착지를 옮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언제고 어디에서고 내내 친구들이 평안하기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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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 태양이 되고 싶다고 그랬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거 같아. 김안의 입춘을 읽다 말고 아 그래, 그래서 우리가 쉰이 다 되어서도 이렇게 살고 있나 보다, 안아, 라고 소리내어 말했어. 딸아이가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왜 너희들이 시를 재미없어하는지 아냐고 물어보셨어. 아이들은 모두 황망하게 고개를 내저었고. 시는 분석하면 안 되는데 시는 해체하면 안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시를 배우지, 아이들에게 그렇게 시를 가르치지. 그러니 어디 시가 재밌겠냐고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대. 엄마는 시를 사랑하지. 유일하게 엄마가 되고 싶은 열망이었어. 하지만 이 에미는 재능이 특출나지 못해 시인이 되지 못했지. 하지만 철학자보다 더 멋진 이들이지. 언젠가 타락하고 추악하고 마치 악마처럼 묘사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인과 김안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시인들 사이에 뒤섞여 있으면 내 마음이 마치 무당이 된 것마냥 저절로 말로 흘러나와서 그게 그렇게 좋았지. 엄마가 술담배를 하던 옛날 고려 적에. 말하니 아이는 엄마는 집시잖아. 그러니까 시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나는 이상을 읽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져. 이건 엄마 피일까. 아이가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죽을 맛나게 떠먹으면서 물었다. 김안의 시집을 읽다 말고 그러고 보니 불면증에 시달려서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괴로웠던 이십대 시절이 떠올랐다. 온라인 친구였던 닉네임이 무엇인지조차 까먹었던 서대경이 곧잘 새벽에 내가 투덜거리면 이런저런 댓글로 나를 위로해주곤 했지. 그가 김안의 친구 서대경이라는 건 나중에 안이가 말해줬던 것도 같고.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새벽에 주고받으면서 다 지나갈 것들 아니겠냐고 그랬는데 시인이 해주는 위로라는 건 역시 특별하군, 새구름처럼 금세 포근하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지. 내게 와서 태양이 되고 싶다고 한 사람은 시를 읽더라구. 나도 모르게 그에게 내 마음을 말하고 말았는데 시를 읽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놀라워 그랬네. 빛살 사이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풀이름과 꽃이름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그가 마치 파랑새처럼 느껴져서 자 이제 둔갑술을 그만 부리고 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보련, 파랑새야, 말했더니 그는 파도와 똑같은 음향으로 웃었어.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반하고 말았지. 나는 언젠가 이 남자의 품에 안기겠구나. 마음과 마음이 닿는데 살과 살이 닿는 느낌이었거든. 다초점 안경은 괴롭다. 눈이 금방 피로해져, 머리도 무거워지고. 밤이 깊었어. 하늘과 바다 사이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내 태양을 그리워하다가 잘래, 일찍. 갱년기 증상 때문에 새벽에 벌떡 일어나는 때가 잦아서 요즘은 일찍 잠들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을 겪어나가는 와중에 그 가운데 자리쯤에 있다 싶을 때 그때 다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아 맞다, 안아, 친구로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네 팬으로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번 시집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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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달고 싶은 글을 읽고 그냥 댓글을 달지 않았다. 혐오 발언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여긴 열린 공간이고. 나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고. 근데 돌려 깐다고 해야 하나, 그게 좀 더 혐오를 포함하고 있어도 세련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강신주가 하는 장자 강의를 듣다가 결국 그의 장자 개론서를 샀다. 장자가 왜 좋은가 헤아려봤더니 장자는 혐오를 표현해도 좀 세련되게 한다는 걸 알았다. 그 문장들은 결국 쓰는 이의 모든 걸 드러낸다, 이걸 다시 깨달음,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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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누군가 물어봤다. 사는 건 다 똑같은데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별 느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제가 상위 3프로의 소득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기생하는 느낌입니다. 상위 3프로에게. 너무 솔직했던가,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라이프에서 상위 3프로라는 형용사가 그 무엇을 더 덧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다른 이들의 상상력에 내 상상력을 조금 보태어봤다.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노라고 한 남자 입술을 쓰다듬으면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대략 20년 전에.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아, 그냥 내가 읽을 수 있는 만큼 책을 살 테니 그 책을 다 사줘, 커피를 좋아하니까 커피를 넉넉히 준비해주고, 술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덜 마시겠지. 하지만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걸 갖고 싶은 욕망이 더 심해질 테니까.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해. 아마 아이가 생기겠지. 내가 딸아이가 갖고 싶으니까 너의 정자가 만일 내 뜻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딸아이를 갖게 될 거야. 그 아이도 책을 좋아하면 좋겠다, 너와 나만큼. 그 아이도 커피를 마시겠지, 사춘기가 다가올 무렵. 아마 성인이 되기 전에 술을 접하게 될 거야, 우리 아빠가 내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 처음 맥주를 따라주었던 것처럼. 그럼 그렇게 같이 오순도순 살면 될 거야. 난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 결혼을 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그 오순도순 꿈은 파탄이 나버렸다. 아이가 생겼으니 이혼은 지금 안 된다, 우리 엄마는 단호했다. 버석버석. 버석버석. 아침이면 영혼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때부터 쭉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내 친구들과 엄마는 나를 말리곤 했다. 유일하게 이혼을 지지해주는 이는 여동생 진이뿐이었다.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어떤 모임에서 물어보더라고. 그 이야기를 진이에게 했더니 진이가 말했다. 한번 살아보라고 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인생인지. 둘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푸후후 웃었다. 


샌드위치 가게라도 해볼게, 그러면서 살고 싶어, 아이 키우면서 둘이서. 남자는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어디에서 감히 이혼 이야기를 꺼내냐는 반응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이혼을 하자고 할 적마다 응했어, 그러다가 번번이 끝을 맺지 못해 여기까지 온 거고. 네가 내 손을 더 이상 잡지 않겠다고 했을 때 항상 고개를 끄덕였어. 마음은 잡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맞잡고 있는 두 손은 헐거워. 그냥 서로 마지못해 잡고 있는 것처럼 걸쳐져 있어. 나는 이제 네 손을 놓을 거야. 자유롭고 싶어. 가난이 두렵지 않냐고 능력도 없으면서 전업주부가 아무 준비도 없으면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두려운 건 두려운데 그렇게 있다가는 그냥 네 돈만 보고 너한테 기생해서 계속 살아야 돼. 네가 죽거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어있을 거야. 할머니가 되어서 은발이 되어 얼굴과 몸이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너를 탓하고 나를 탓하게 될 거야. 나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 탓하겠지. 내가 나를 잃어버린 삶을 택했으니까. 근데 이제는 내가 소중해져버렸어. 나를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서 한 번뿐인 이번 인생을 살 거야. 더 이상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이어갈 수 없어. 남자는 비웃었다. 나이 오십이 되어 그 누가 여자로 봐줄 거 같냐. 예순 먹은 할배들이라면 모를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이제 여자로 살 거야.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는 네 옆에서 오래 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여자로 봐주는 남자를 만나서 뭐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내 환상일 수도 있지, 그래도 나는 이제 네 곁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그 후로 남자는 몇 번 나를 더 설득하려고 했다. 언제나 돈 돈 돈 이었다. 당신이 나를 매어둘 수 있는 게 겨우 돈뿐이구나, 그래서 가련했다. 이혼을 준비하면서 알았다. 돈과 사랑. 사랑과 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것들이라는 걸. 슬기롭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을 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한 번만 더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6년 전, 1년이 흐르고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이 이야기하셨다. 능력도 없는 별볼 일 없는 게 어디서 감히 이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녔냐, 라고 눈도 안 마주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당신 아들이 내게 이혼을 원한 거다, 난 응한 거다, 그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때 나 혼자 시댁 마당에서 울면서 그랬다. 아이가 스물이 되면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고. 좀 앞당겨졌다. 슬기롭게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블랑쇼를 읽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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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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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0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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