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수업중에 누군가의 죽음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고난 후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다. 세세하게 그것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악의라는 게 참 깃털 같이 느껴지다가도 그 깃털 같은, 별로 관계성이랄 것도 찾을 수 조차 없는 그런 관계에서조차 그 악의성 짙은 무게감을 느낄 수조차 없는 그 깃털이 누군가의 영혼을 짓누르고 짓눌러서 그 압박감에 숨을 쉴 수도 없게 만든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싶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걸 누차 궁금해하고 궁금해했는데 이건 말 그대로 싸데팡이더라. 정신없이 2월을 보내고난 후 3월 말에는 얼추 판가름이 날듯 싶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겠지만 오늘 꽃다운 아이가 사라진 걸 알고난 후에 이 나라가 좀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징그럽긴 하더라. 물론 나와 얼추 나이가 비슷한 중년의 아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에도 그런 걸 느끼긴 했지만. 정신없이 서초에서 광화문까지 왔다갔다 녹초가 되어 귀가해보니 파스타 해먹을 기운이 없었는데 내 새끼는 배고프다 칭얼거리고 나도 온몸이 노곤하니 와인 생각이 저절로 나서 급히 파스타면을 볶았다. 완전 맛있어 엄지를 척척 내미는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추운 봄밤이 깊어져갔다. 봄이고 밤이고 합쳐져 곧 있으면 더할나위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봄날들이 이어질 터인데 스물을 갓 넘긴 소녀가 이 길이 자신이 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라 여기며 얼마나 외로워했을지, 그 봄밤이 얼마나 소녀에게 춥고 무섭게 느껴졌을지. 판단하고 비판하며 옳은 길이라 여기며 내내 혀로 채찍질을 하는 걸 즐기는 이상한 어른들이 너무나도 많고 많지 않은가. 이 이상한 나라에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 먹고 운동 가볍게 하고 유통기한 지난 우유 처리해야 해서 빅파이 오물거리면서 조금씩 읽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또 이런 식으로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게.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여섯 시간 채우고 아가들 데리고 삼겹살 먹었다. 당근 거래 끝내고 온 딸아이가 우연히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편의점에서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와서 이야기, 그 친구가 막 다 읽은 [균형 잡힌 뇌] 이야기를 했노라고. 우리 엄마도 도서관에서 오늘 그거 내내 읽었는데! 라고 반가웠노라고. 자기도 읽어보겠노라고 신나서 이야기. 책읽기에도 카르마가 적용되는 건가, 싶어 후훗 웃었다. 그 아가 괜찮네, 엄마랑 독서 취향도 겹치고. 했더니 그런데 이윤기 선생님 신화책은 안 읽어봤다고 그래서 나는 그거 추천했어, 엄마, 라고 말. 마리 루이제 크노트 30분 읽고 스피노자 만화책 조금 읽으면 오늘은 자정쯤 침대에 뻗을듯. 체조해서 그래도 아직 머리가 쌩쌩 돌아가네. 삼겹살 먹을 때 맥주 자제하여 스스로 머리 쓰다듬어줌. 







워렌은 대화 중에 기본적인 질문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남북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만일 남부의 노예 소유자와 농부가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동의를 쉽게 하도록 보상을 받았다면 미국 내부에 더 많은 평화가 있었을지에 대한 의견이었다. 몇몇 정치 평론가는 남부인이 패배를 경험하기보다 보상을 받았다면 굴욕감을 덜 느꼈을 테고, 따라서 노예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풀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반복해서 피력했다(워렌은 노예가 겪은 불의에 대한 보상이나 원상회복에 대해 어느 대목에서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의 두 번째 질문은 흑인의 자기 이해 문제로 직행했다.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흑인 미국인에게는 두 영혼, 즉 항상 백인의 시선과 기대를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인지하는 이중의식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의심스러운 경우에 흑인 미국인의 충성심은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 P34

그러나 결정적인 질문도 빠트리지 않았다. 워렌은 도발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흑인은 매일 경험했고 경험하는 온갖 불의, 억압, 굴욕 앞에서 비통해하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는가? 훨씬 적절한 반응은 복수가 아니었을까? 국가의, 경찰의, (백인의) 폭행에 맞서 고집스럽게 비폭력으로 자신을 묶어두는 것은 영혼이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 아니었을까?
워렌은 열려 있는 정신으로 대화 상대방의 열려있는 정신을 이끌어냈다. 그는 상대방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상대방은 발언권을 얻었다. 아마도 아렌트는 다음의 이유로 랠프 엘리슨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피억압자에 소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주인이며 자신의 발언권을 행사해야 하고, 또 해야 한다는 엘리슨의 소견에 감사했기 때문이었다. - P35

엘리슨과 아렌트에게 자유란 인간의 행위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과거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Vita activa)]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말하고 행위하면서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속세로 들어가며, 이런 접속은 말하자면 탄생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제2의 탄생과 같다." 만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나타나는", 즉 스스로 속세의 관심사에 섞여서 이런 자신의 세계를 공동으로 형성하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와 엘리슨은 인간이 존재임을 실현해야 할 필연성이 행위를 통해 가능함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행위하지 않는데 특별한 담력과 자제력이 필요한 순간, 즉 행위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에서 벗어난다면, 행위하지 않는 것도 행위의 순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계속되는 굴욕을 더 보태주는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면, 행위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행위이다. 그리고 아렌트와 엘리슨, 두 사람은 모두 순응의 위험이나 유혹에 대해 경고했다. - P50

그들은 간단히 말해서 순응을 통제의 변주로 보았다. 소설에서 엘리슨의 주인공은 타인이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할 채비를 갖춘 성격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조상처럼 그 역시도 (너무 오랫동안) 낯선 세상의 톱니바퀴였다. 순응하려는 주인공의 열망은 너무 강렬했다. 주인공처럼 동화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특별함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도 일종의 보이지 않음이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균형 잡힌 뇌 - 인공지능 시대가 버거운 당신에게
권택영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쪽으로 치우치기가 쉬우니 편한대로 가고자 하지만 결국 그렇게 나아가다가는 인간의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자명하다. 아는 척을 적당히 한다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 살아가기는 모던해질수록 더 실용적으로 되어가는데 삶은 왜 그토록 망가지기가 쉬운가. 다른 사람들을 안다는 건 거대한 착각인데 자꾸 그 착각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도 착각. 우울하게 살아가지 않도록 우뇌를 조금 더 자주 활용해주면 좋지 않겠는가 싶은. 읽는 동안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는 몇몇 이들과 과거 내 모습도 잠깐씩 겹쳐졌다. 좌뇌에 너무 치중해서 살아가는 게 거대한 시야에서 보자면 잃는 것들이 너무 많은. 맺음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완독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는. 직접 맞닿는 게 내 뇌에 한결 좋다는 것과 따라서 좀 구체적으로 여러가지 것들을 행해야겠구나 라는 것도. 프로이트를 읽긴 읽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과 쉽게 조금 더 다가서고 싶다는 마음 생겼다. 인간이 인간을 안다는 게 이토록 어려워요. 뇌과학서 주로 읽는 독자들이 젊은 여성들이라는 건 또 뭔가를 느끼게 해주고. 읽고 싶은 책 몇 권 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무살 이래로 권택영 리딩은 정말 오랜만이다. 민이 책 사주러 아침에 들어왔다가 2권 결제하고 요거트 먹으면서 살살 읽다가 예상 외로 잼나 오늘 갖고 나가기로.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도 간만에 빌리고. 책 갖고 와라 독촉 문자가 날아온지 어언 일주일 만에 반납하러 감. 





아마 현재를 충만히 살라는 충고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충고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냥 흐르고 한번 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저 순간순간을 충만히 기쁘게 살면 과거도 미래도 충만해지지 않겠는가. 고구마처럼 한데 붙어 올라오니까.
만일 우리의 판단과 인지가 너덜너덜하다면 어떻게 나를 믿고 또세상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의식은 정확한 척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하다고 약속을 어기고 너덜너덜한 세상이라고 시험을 안 보면 안 되니까. 그래서 심리학, 정신분석, 뇌과학은 경험을 많이 쌓으라고 조언한다. 판단의 오류를 줄이는 길은 상부 피질에 저장된 경험의 오류에 있다.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라, 피할 수 없는 오류를 인정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라. 여기에 나 무의식이 있다. 이것이 깔끔해보이는 의식의 옷깃을 슬쩍 들춰 너덜너덜한 것을 보여주며 무의식이 전하는 무언의 충고다.
1초, 2초…… 째깍거리는 벽에 걸린 시계는 너와 나의 약속을 위해 존재할 뿐,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실제보다 길기도 하고 짧기도하다. 연인을 기다리는 20분은 하루같이 길고 천천히 왔으면 하는시험 날짜는 빠르게 다가온다. 그러니 과거에 했던 말을 두고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두 사람의 기억이 다른 것은 당시의경험과 환경이 다르고, 이후의 경험과 환경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 P37

너와 내가 한 몸이라고 착각했던 유아기에 경험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후 사회적 금기에 의해 추방되지만 여전히 몸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금지에 의해 닿을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너와 나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 에로스의 본질이다. 이층집에 살면서 아래층으로 되돌아가지 못해 애가 타는 게 사랑이다. 그래서무의식은 억압되지만 늘 의식의 아래층에 살아 있으면서 집세를 내라고 텃세를 부린다. 이것이 억압이고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한때 사랑했던 부부가 싸우면서 서로 상대방을 탓하는 것을 흔히 본다. 싸움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증거다.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남의 입장을 배려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양당의 득표수 차이가 근소할수록 갈등과 증오는 증폭된다.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대통령 후보의 지지자들은 승리한 사람들이 기뻐하는 순간마다 가슴이 쓰리고 미움이 커진다. 이럴 때 승자는 패자의 마음을 추측하면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 때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근소한 표 차이는 양심과 윤리보다 사랑과 증오를 부를 수 있다. 위층에서는 양심과 윤리를 가르치지만 아래층에서는 사랑과 증오가 작동한다. 이때 위층보다 아래층의 은밀한 힘이 더 세다. - P42

접촉장벽을 통과하는 지름길은 없다. 더듬거리며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서 완치란 없고 그럭저럭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최선이다. 우리가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꾸려가듯 마음도 미묘하고 다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길이다. 접촉장벽은 워낙 단단해서 무의식으로 내려가려면 은유와환유, 즉 말을 통해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이 환자의 신뢰를 얻어 용기와 희망을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돕는다. 서사적 기억으로 몸의 기억에 닿으려는 시도이기에 정답은 없고 다만 근접한 추측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는 하부에서 상부로 올라가며 발생하지만 치유는 상부에서 하부로 내려가며 이루어진다. 가장 중요한 점은 판단의 오차를 줄이려면 많은 경험을 해 전두엽에 자원을 저축해놓아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문학 고전들을 읽고 이해하면 인간을 좀더잘 이해할 수 있고 판단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의식이 파악한 대상이 - P58

란 어차피 이미지지만, 얼마나 실체에 근접한 이미지인가는 삶의 행복과 파국을 결정짓는다.
진화로 인해 우리는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볼 수도 아래층에 접근할 수도 없다. 풍부한 경험과 정밀한 분석으로 추측할 수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이 정답이라는 확신은 위험하다. 이런 확신은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의 전략에서 온다. 의식의 속임수다. 타인을 안다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단지 추측할 뿐이다. 프로이트는 [집단심리와 에고 분석]에서 타인과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공감‘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고 암시한다.
아래층인 몸의 이상은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하다가 깊어져서야 느끼곤 한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코르티솔이란 호르몬이 나오는데 이것이 지나치면 건강을 해친다. 이런 증상이 아래층에서 일어나지만 우리는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래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치를 제시해놓는다. 혈압을 재고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 검사를 해서 몸이 이 수치 안에 들어가는지 확인한다. 이렇듯 우리는 기술의 도움으로 층계를 내려가지만, 사실 그조차 추측일 뿐이다. 위층을 올린 대가로 아래층에 직접 내려가는 길은 막힌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래층은 여전히 위층을 지배하고 소통한다. 금지와 통합의 이원적 일원론이다.
접촉장벽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역사와 삶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추측은 언제나 여분을 남기고 그 여분이 우리를 매혹한다. 삶의 원동력이 된다. - P5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티나무 2025-02-16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움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증거다.“ 찔립니다. 그런데 내가 왜 찔려야 하지 싶기도…..ㅎㅎㅎ 눈에 확 들어와 댓글 남기고 가요~~~

수이 2025-02-16 19:46   좋아요 1 | URL
우리 모두는 스스로와 싸우거나 다른 이들과 싸우면서 살아가니까 언니만 찔리는 거 아님. 얼마만인가요?!

단발머리 2025-02-16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2쪽이 딱 눈에 꽂히네요. 너와 나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가 되려는 욕망…
국가에 공동체에 가정에 그리고 연인에게 함몰되고픈 마음이 모두 다 에로스라는 거죠? 그게 섹슈얼리티 ㅋㅋㅋㅋㅋㅋ억압은 귀환을 부르고 ㅋㅋㅋㅋ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수이 2025-02-16 19:50   좋아요 1 | URL
원래 다른 몸 안에서 나온 인간이니까, 엄마 몸이랑 나랑 한몸, 그래서 다시 한몸으로 돌아가고픈 원초적 욕망. 다시 엄마랑 한몸이 되기는 불가하니까 다른 몸과 합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신이 그렇게 만드신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 나를 살리기도 망치기도 하는 머릿속 독재자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전두엽에 문제가 있었던 거네, 하니 구남친 왈, 아니 그게 무슨 전전두엽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나, 그냥 인간이 덜 된 거라고 표현해야 옳지, 라고 말해서 한참 웃음.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식으로 결론을 맺는다고 여기니까 무슨 코미디물 찍은 느낌이긴 하다. 그래도 관심은 갖고 계속 지켜보기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