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직조로 탄생되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민이는 중간에 잠들었다가 거의 끝나갈 무렵 잠이 깨어 결말을 보았다. 아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 무렵 미안해 하고 속삭였다. 아빠를 이미 잃은 이들과 아빠를 곧 잃을 이들이 본다면 어떨까 싶다. 아이라인이 온통 번질 정도로 우는 이들은 모두 아줌마들이었다. 나이든 여성들. 폴 메스칼이 헐벗은 등으로 미친듯 침대 위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좀 아빠의 무게랄까, 나는 엄마로서 갖는 기쁨만 온통 느끼려고 하는 사람인지라 엄마로서 갖는 양육자의 무게감은 거의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런다. 양육자의 무게와 자신의 존재가 지닌 무게가 마치 지구 같고 우주 같아 계속 오열만 할 수밖에 없는 자의 비애감이랄까. 그게 느껴져서 흐느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살아가는 유형과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계속 벗어나려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그리고 어른이 되어 살아가고픈 나날들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나날들이 복합되었을 때 그 유형의 구분마저 무의미해질 때 있다. 민이가 이해가 도저히 되지 않았는지 씨네큐브 회전문 들어서기 전에 대체 왜 그렇게 울었어? 엄마, 하고 물어보았는데 즉각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살아가는 게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어른의 존재감이 느껴지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거다. 라고 이야기했다. 목젖에서 전류가 느껴질 정도로 울음이 나온 건 작품을 보고 정말 오랜만이었다. 영화 속 아빠로 나오는 폴 메스칼의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이제 갓 사춘기로 입성하는 딸아이가 우울감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양치질을 하며 그 이야기를 듣던 아빠는 양치질 마지막에 욕실 깨끗한 거울을 향해 자신의 입 안에 있던 치약 거품을 침과 함께 퉤 내뱉는다. 볼 때는 아 저게 뭐야 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니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더라. 세상 속에서 부유하는 이들의 불안감을 예리하게 잘 캐치해서 연기했다. 술에 취해 무작정 바닷속으로 들어갈 때, 호텔 테라스 난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마치 날아갈 것처럼 두 팔을 뻗을 때. 그가 느린 선 동작을 행하고 그가 읽는 책 제목들이 또렷하게 카메라에 잡힐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딸아이에게 네가 그 무엇을 하건 이 아빠에게 모두 다 이야기하라고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을 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아빠가 떠올랐고 늙은 나의 엄마가 떠올랐고 속절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겹쳐져서 이게 대체 뭔가 그런 넋두리가 저절로 나왔다, 오열과 함께. 우리 아가가 생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만을 바라지만 그건 오롯이 내 욕심이라는 걸 안다. 딸아이가 어른이 되어 한밤중 깨어나 우는 자신의 아기를 향해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나갈 때, 그리고 테레비 화면으로 아빠와의 지난 여름 휴가를 바라볼 때,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딸아이를 향한 캠코더를 끄고 사람들이 춤추는 암흑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성인이 되어버린 딸아이와 아빠가 동시에 서로를 부여잡고 춤을 느리게 출 때,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져 다가왔다. 집시 소울을 지닌 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한줄평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고향이 좋노라고 에든버러가 좋노라고 딸아이가 이야기할 때, 아빠는 이야기한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구나. 아빠는 결코 에든버러로 돌아가지 않을 거 같아, 라고 딸아이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유쾌하거나 가벼운 영화는 아닌지라 포스터만 보고 관람을 선택하지는 마시기를. 민이와 나 역시 아빠와 딸아이의 여름 방학 여행 이야기려니, 유쾌하려니 하고 선택했다가 민이는 켁, 나는 오열하고 말았으니. 아, 영화를 다 보고 알았다. 나는 내가 의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빠를 사랑했구나, 아빠를 그리워하는구나 알았다. 아빠를 너무 알지 못하고 아빠를 그대로 어둠 속으로 보내버렸구나 싶어서. 아빠의 빛을 잘 알지도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빛 아래 빛으로만 존재하는 인생도 없고 어둠 아래 온전하게 어둠으로만 존재하는 삶도 없다. 빛과 어둠의 직조로 존재한다. 활자와 활자 사이 여백이 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걸 알려줬다, 애프터썬은.

1년 전 오늘 남겨놓은 기록 읽고난 후,
애프터썬은 썬크림과 다른 크림이다.
썬크림은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미리 바르는 크림이고
애프터썬은 이미 햇볕에 타버린 피부를 치유하고자 바르는 크림이다.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썬크림이 되기 위해 애쓸 때 많다.
하지만 정작 부모라는 존재가 필요한 건 애프터썬 역할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아빠는 딸아이에게 자주 애프터썬을 발라준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이는 자신의 아빠를 떠올린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아픔과 상실을 겪지 않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싯다르타 아비가 싯타르타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온통 쾌락과 기쁨과 행복으로만 이루어진 장면들을 연극처럼 내보여주며
내 자식에게는 온통 좋은 것들만 보여주고 주고자 할 때
하지만 싯다르타는 궁궐 밖 장면들을 보게 되고 그 찰나들은 그에게 다른 삶을 안겨준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삶 말이다.
자신이 스스로 택한 삶.
삶의 시간을 사등분해보자면_
사분의 삼은 고통과 아픔과 상실과 불행과 무기력과 우울과 건조한 나날들이고
사분의 일은 행복과 기쁨과 쾌락과 찬탄의 나날들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그 말을 듣고난 후에 나는 그 사분의 삼의 시간과 사분의 일의 시간을 묘하게 뒤섞어놔야겠구나,
책을 읽고 길을 걷고 사랑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사유할 때 그것들을 뒤섞어놔야겠다,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뒤섞어놓으면 그 사분의 일이 조금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착각 속에서, 그런 생각.
영화를 볼 때도 그랬고 영화를 보고난 후에도 그랬고 딸아이는 아 재미없었어, 지루했어, 라고 했지만
정확한 워딩은 아 졸라 재미없었던 그 아빠랑 딸 나온 영화!
내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테고 삶의 쓴맛과 괴로움을 서서히 알게 될 때 그 비루함에 모든 걸 손에서 놓고 싶을 때
이 영화를 달리 보게 될지도 모른다.
어제 카페에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빛과 어둠을 잘 활용해서 사랑하도록 하자, 두려워하지 말고.
아빠가 많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