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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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에게. 

 

우린 결코 알 수 없지. 미리서는.

우리가 뭘 쓰는지.

서둘러 날 생각하렴. 

 

내 밤의 연인 얀에게. 

내 우러러 사모하는 이 연인의  

정인情人 마르그리트가 1994년

11월 20일 파리 생브누아 거리에서 적다.

 

 

11월 21일 오후, 생브누아 거리. 

당신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하겠어요? 
뒤라스라고. 
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겠어요? 
알 수 없다고.


 

얼마 뒤, 같은 날 오후. 

이따금 나는 아주 오래도록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내겐 신원이 없다. 
그게 날 두렵게 한다 우선은. 그러고 나서 그것은 행복의 움직임으로 스쳐지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멎는다. 
행복하다는 감정, 말하자면 얼마쯤 죽어 있는 느낌. 
내가 말하고 있는 곳에 얼마쯤 내가 없는 듯한 느낌. 

 

 

11월 23일 파리, 15시. 

한 남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요. 
많아봐야 스물다섯 살 먹은 남자에 대해서. 
그는 아주 잘생겼고, 죽음이 자신을 점찍기 전에 죽고 싶어하지요. 
당신은 그를 사랑했어요.
그 이상이었지요. 

그의 두 손의 아름다움, 
그래, 바로 그거에요. 
언덕과 함께 나아가는 그의 두 손-또렷해지고, 환해지고, 어린아이의 고운 맵시처럼 빛나게 되는. 
당신에게 입맞춤을 보냅니다. 
이 흐트러진, 부드럽지만 뜨거운 맵시를 파괴할 사람을 기다리듯 나는 당신을 기다려요. 
네게 주어진, 통째로 주어진, 내 몸 전체로 주어진, 이 맵시.

 

 

얼마 뒤, 같은 날 오후.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요. 
그게 다예요. 

 

 

생브누아 거리, 11월 27일 일요일.

 

 함께 있는다는 것 그것은 사랑이고, 죽음이고, 말이고, 잠자는 것이다.

 

 

1월 6일.

  

얀.

오후가 끝날 때쯤 널 보게 되길 바래. 

내 온 마음으로.

내 온 마음으로.

 

 

침묵 그리고 나서.

  

내가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사랑할 거에요.

너무 일찍 죽지 않도록 힘써볼게요.

내가 해야 할 건 그것뿐이에요.

 

 

성 금요일. 

네 눈물 속에, 네 웃음 속에, 네 울음 속에 날 데려가렴.  

 

4월 9일 일요일, 성지주일聖枝主日. 

우리들은 둘 다 결백해.

 

 

같은 일요일.

 

착한 신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너야. 넌 그걸 철석같이 믿어야 해, 네가.

 

 

6월 11일.

 

 당신은 당신 됨됨이 그대로예요 난 그게 기뻐요.

 

 

7월 3일, 15시, 노플-르-샤또. 

 

 

네게 또 다른 갈망들이 있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지. 

네가 슬프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지.  

그렇지만 내겐 상관 없어.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내게 상관 없어. 

내가 알게 뭐람.

 

 

7월 21일.

 

 

오렴.

 

 난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아.

  

갈 수만 있다면 네 옆으로 가고 싶어.

내 곁으로 오렴.

이게 다야.

  

난 피해 있고 싶어.

빨리 와서 날 어딘가에 놓아 주렴. 

 

 

침묵.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것, 그게 내가 아쉬워하는 그 무엇이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쓴 <C'est tout>.
고종석이 한글로 옮긴 <이게 다예요>.
이 자그마하고 새하얀 한 권의 책.

요즘은 더러 연애,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아줌마가 참 할 일도 없나 보지, 생각할 못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고로 아줌마는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티가 나지 않아 티를 낼 수 없는 일들 투성이입니다, 그야말로 모래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결코 하찮지 않은 소소한 일들이 모래알갱이처럼 깔리고 깔려있습니다. 단 24시간 고개를 돌려 어여쁜 그림을 바라보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그 24시간 동안 집과 아줌마의 식구들 사이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모래알갱이들이 서걱서걱 끼여있어 일상을 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 다시 바른 길로 돌아가서) 그 못된 사람들은 무시하도록 합시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했던 기억이 살포시 나는군요. 저는 그때 고등학교 교복을 막 벗고 여행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라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하고싶은 공부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마땅히 대학을 가야지, 어르고 달래는 어리석은 말을 다행스럽게도 부모님이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마땅히 학교 같은 곳, 다시는 다니고 싶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몸이 많이 아파서 부모님은 내게 재수를 하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아빠는 미국으로 보낼까 했고 엄마는 보내고싶지 않다 매일 싸우던 때였습니다. 미국 가건 여기 있건 뭐 그게 그거. 그래서 나는 홀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오르고 내려 발길 닿는 곳, 뜨겁고 가벼운 바람이 부는 그곳에서 파는 가벼운 옷을 사서 갈아입고 물장구치는 방법을 새로 배우도록 하자. 그게 그 시절, 열아홉인 내가 스물이 될 내게 주고싶은 선물이었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자주 가던 서점에서 뒤라스의 이 책을 사자마자 달렸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뒷편 벤치에 앉아 헝겊 가방을 내려놓고 내게 맛있는 커피를 선사해주는 멋진 자판기 녀석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꺼내는 동시에 누가 들을세라 얼른 자판기에게 몸을 밀착해서 귓속말을 했습니다.
"오늘, 마르그리트 뒤라스 언니 책 샀다, 그것도, 새로, 나온, 이제 막 나온 따끈따끈한 녀석이야."
자판기는 내 말을 듣고 덩달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지 온몸을 바르르 떨며 맛있는 커피를 종이잔에 담아 내밀었습니다.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벤치로 돌아와 책을 펼쳤습니다.노을이 지기 전, 마지막 책장을 덮었습니다. 그때는 명확한 대상,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고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고 무릎과 가슴 사이에서 팔딱거리고 있는 책을 꽈악 안았습니다.

아직은 
사막에
갈 때가 아니야.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황폐화된 몸으로 왜 아픈지 까닭도 알지 못한 채 아프고 또 아파서 결석을 밥 먹듯 했을 때, 그 시절을 갓 넘겼을 때 만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 책. 얇고 너무 얇아서 그 얇고 자그마한 공간에 담겨있는 활자들은 또 얼마나 적던지. 얇고 작은 그 책을 손에 쥐고 이렇게 책값을 받아도 되는 거야? 볼멘 소리를 내뱉기도 했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목소리에 대한 환상을 품기 시작한 게 이 책을 읽고난 후부터.그리고 어느 여름날, 우연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생각했던 그대로였어요. 밥알 하나 씹어 삼키기가 힘들었던 그때, 이유도 없이 그저 힘들고 힘들어서 매일 눈물만 흘렸던 그때, 저를 살렸던 책이 이 책입니다. 책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다시 학교를 나가기 시작했고 다시 소화가 되지 않는 밥알들을 수십 번씩 씹었습니다. 
 
다시
우연히 
이 작고 얇은 녀석을 손에 쥐고보니 
저는 지금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하기만 합니다.                

그 사막 말이죠.
아직 가지 못했어요.
죽기 전에는 갈 계획입니다.
그때는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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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10-16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라스 뒤라스.. 수연님에게 큰 의미의 작가였군요. 예전 그녀의 책을 읽으며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생기(?)를 느꼈던 저를 기억나게 하는 페이퍼네요. 사막. 꼭 갈 수 있을거에요~

수연 2020-10-16 19:28   좋아요 0 | URL
같이 가자!!!!!!! 비연님 :)

2020-10-17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7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린다 2020-10-18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주는 힘이 대단한 걸 다시 한번 느끼고 갑니다. 저도 아무생각 없이 이 책을 구매하고 첫 장을 펼칠 때 적은 활자들을 보고 뭐지 싶었는데.. ㅎㅎ 수연님의 멋진 계획이 꼭 이루어지기를!

수연 2020-10-19 08:20   좋아요 0 | URL
린다님 응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