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습하다. 이러다가 모두 습지 동물로 탈바꿈하는 거 아닐까. 건조기 사고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여동생이랑 통화하면서 우리 건조기 올겨울에는 장만해야 하지 않겠니 건조기 세일 올겨울 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오랜만에 통화를 해서 그런가 장장 60분 넘게 통화했다. 부산은 어땠니 물어보아서 근사했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나는 이번에 내려가서 내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체감하고 왔다, 별로 말 많이 하지 않았는데 와 그렇게 같이 있으니까 좋아죽겠더라 그렇지, 그렇지, 인간이란 별 수 없는 게지, 서로 그러면서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 말고 조카가 에어컨 뒤 틈바구니 들어가서 그 거대한 덩치로 밀어서 박살낼뻔 하고 그 상황을 수습하고자 여동생 급히 전화를 끊었다. 여섯 살 아가가 덩치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다고 스탠드 에어컨을 부술까 싶지만 그 아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모두 아홉 살 아가인줄 안다. 물론 먹는 것도 성인 남자 1인분 양으로 먹기도. 어젯밤에는 와인 마신 것 때문에 새벽에 화장실 왔다갔다 하면서 문득 내가 이렇게까지밖에 살지 못할까 이건 아니지 않나 또 문득 깨달음이 와서 책 읽을까 하다가 시계 보니 새벽 네 시인데 그냥 더 자버리자 하고 일단 잤다. 엄마가 일하는 거 도와달라고 해서 아홉시 민이 깨워서 동네 해장국집 갔다. 일흔이 넘어서자마자 고관절 수술을 하자마자 엄마는 급속히 아침밥 하기를 싫어하신다. 아침점심저녁은 바라지도 않고 누가 아침만 차려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내 아침조차 간단하게 크래커와 커피와 사과 한쪽으로 때우려는 게으른 인간인지라 엄마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밥 아직 안 했지? 물어보고 응, 이제 해야지 라는 엄마 대답 듣고 해장국집에서 만나. 빗길을 헤치고 나가서 선지 빼고 양 잔뜩 넣은 해장국에 고춧가루 팍팍 넣고 해장국, 민이는 설렁탕, 서비스로 주던 두부 주말에는 안 주신다 해서 별 수 없이 김치전 하나 더. 아줌마처럼 또 민에게 아침부터 잔소리, 세상 어디를 가든지 뱃속이 든든해야해, 그러니까 절대 허기지게 다니지마, 위장이 뜨뜻해야 만사 모든 일부터 할 수 있는거야, 알았지? 하고 김치전 안 매우니까 팍팍 먹어 이것아, 하고 김치전 떼어주니 떡볶이보다 맵다면서도 먹었다. 볼 일 얼추 보고난 후 빵집에서 곡물식빵이랑 샌드위치 우리꺼 하나, 엄마 크림빵이랑 샌드위치 하나 사고 집에 커피 떨어져서 아메리카노 하나 사갖고 집으로 왔다. 에어컨 돌리면서 청소 다 하니 이 시간이다. 얼마 전 도서관 다녀왔을 때 시뽑기통에서 민이가 뽑아준 시는 백석이었다. 절벽에서 물놀이 하고 태양에 달궈진 뜨끈한 바위 위에서 동무들과 반벌거숭이가 되어 나란히 누워 신선놀음하던 스무살이 떠올랐다. 그때 그 풍경 하나로 이 습한 여름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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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9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8-09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건조기 사 말아 하다가 안 사고 버티고 있어요. 집이 워낙 건조해서 겨울에는 또 빨래가 열일하니까. 장마철 한 달 정도는 좀 아쉽긴 하지만 눅눅하지만 그냥 뻐팀 ㅋㅋ건조기 살 돈으로 책사야지 맥주사먹어야지ㅋㅋㅋㅋㅋㅋ

vita 2020-08-09 18:12   좋아요 1 | URL
저도 버티고 있지만 건조기에서 뽀송거리는 수건을 막 꺼낼 때 그 쾌감을 언니는 아직도 못 느끼겠구나 라고 사촌동생이 그러는데 ㅋㅋㅋㅋㅋㅋㅋ 으아아아아악 나두 뽀송거리는 수건 쓰고싶다 ㅋㅋㅋㅋ 우리 돈 마니 벌어서 건조기도 사고 책도 사고 맥주도 사먹자 유열님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8-09 18:24   좋아요 1 | URL
우리 에코하게 살아요 ㅋㅋㅋ(이러고 막 먼저 건조기 사버리면 배신 ㅋㅋㅋㅋ)

vita 2020-08-09 19:08   좋아요 1 | URL
에코페미니스트 찔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레삭매냐 2020-08-09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최고 중의 하나는
삶에서 오롯하게 남은 추억 까먹기
가 아닐까 싶습니다.

습지 시대를 부디 무사히 통과하시길.

전 책이 쌓아 놓은 책들이 흐물흐물
해지는 걸 보니 속이...

vita 2020-08-09 22:44   좋아요 0 | URL
추억 까먹기도 좋은데 현재랑 맞닿아서 그 추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게 넘 좋아요. 111세까지 살고싶은 욕망이 어쩌면 그 추억들 쌓아올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삭매냐님! 더위 조심! 습기 조심! 장마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