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의 힘을 뼈저리게 느낀다. 전기가 없는 동안. 갑자기 뜬금없지만 전기가오리님 생각도 잠깐 했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전기 같았던가 그거랑 내게 전기가 되어준 이들이 누구인지 이번에 확연히 알았다. 


대피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책을 엄청 읽을 줄 알았는데 책 별로 못읽었다. 책을 안 읽고 이래저래 스트레칭도 하고 그러니까 3키로가 빠져버렸다. 잠깐 심각하게 고민했다. 책을 읽어서는 안 되는 몸인가 혹시 이 몸은. 3키로가 빠져서 그런가 아무래도 좀 덜 먹고 책을 안 읽다보니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래서 허리도 안 아픈 것. 와 허리 안 아프고 어깨 안 아프니까 날아갈 거 같더라. 그냥 이참에 다시는 책을 안 읽을까봐 진지하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 나 혼자 그렇게 쇼 하면서 3일 동안 맥주 꾸준히 한 캔씩 마셨다. 몸이 정화되는 이 느낌이라니. 맥주 마시고 좀 덜 먹고 스트레칭 빡세게 하고 책 안 읽고 이런 게 사는 건가 이렇게 사니 참 욕망이 순식간에 비루해져서 굴 하나 파고 들어가 살아야 할까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인터넷이 된다. 집으로 돌아왔다. 일상이 소중하다는 걸 이렇게 또 알게 된다. 인터넷이 안 되는 덕분에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인터넷이 되자마자 안나 카레니나를 또다시 잃게 될까봐 두렵다. 인덕션에 라면물 올려놓고 라면 끓이다가 갑자기 전기선 파파팍 나가면서 탄 냄새 진동해서 완전 놀라서 집주인에게 전화해서 전기 안된다 무섭다 하니 재빨리 전기업자들 불러와 고쳤다 두 시간 동안. 라면은 먹었지만 퉁퉁 불었고 이런 게 트라우마인가 보다 조금만 탄 냄새 나고 탄 거 봐도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거 보니까. 


보상금이 나와서 애인에게 책 2권, 아가에게 책 3권과 신학기 용품, 내게 책 2권을 선물했다. 엄마집에서 며칠 지낼 때 잔소리 그만해! 소리질렀는데 그래도 엄마한테도 용돈 드리면서 엄마 이거 숙박비다 크크, 근데 신학기는 대체 언제 시작되는 건가요. 3월 말 한다고 하지만 아마도 4월 중순은 지나야 개학할듯 싶어. 라고 곳곳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3월이 지나가고 4월이 흐르고난 뒤 얼른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란다. 절교할뻔 하던 친구가 4년 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4년이란 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질 줄이야.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육아의 고충을 토로했다. 친구의 친구가 사주를 잘 본다고 해서 사주를 보았다. 커피 한잔 값에. 물 위의 한 송이 꽃이라서 사업을 하면 모조리 말아먹고_ 다른 사람들 말을 하도 잘 들어서 사기를 당하기 일쑤_ 공부도 끈기있게 해내지 못하며_ 공부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노는 것도 그만큼 좋아하는 게 문제인지라_  작은 꽃답게 주변 사람들 챙기면서 알콩달콩 살다가 한평생 살다 가실 거 같습니다. 물이 너무 많은 게 탈인지라 어두운 색 옷 입고 다니지 마세요. 라고도. 대피 생활 끝나고 돌아와 옷장을 보니 모두 다 까만 옷이여서 한참을 웃었다. 그런가 그러한가 아 이번 인생은 그냥 이렇게 살다 가고마는건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빨래를 널었다. 


인터넷이 된다. 산골짜기에 박혀서 몸 여기저리 늘리면서 나마스떼 하는 게 이 몸과는 어울리는듯 싶은데 인터넷이 되면서 전기가 들어오면서 비루해 비루하기만 하잖아 투덜거리던 입술이 쏘옥 들어갔다. 비루한 인생이여 다시 가자.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0-03-03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연님!
많이 놀라셨겠어요~~
인덕션의 좋은점에 그런 불편과 무서움이 있군요^^
보상금으로 책을 사시는 수연님은 책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인것 같아요**
책 읽으며 물위의 한송이 꽃처럼 사시면 더할나위 없으실 듯 해요^^

수연 2020-03-04 09:53   좋아요 1 | URL
화재가 나서 조금만 탄 냄새만 나도 무섭더라구요. 평화롭게 살다 하늘이 부르실 때 기쁘게 가면 좋겠어요. 페넬로페님도 코로나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같이 읽어요. :)

stella.K 2020-03-0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리 어깨가 아팠군요. 그맘 충분히 이해되요.
저도 아직은 어깨 아파도 책은 포기할 것 같지는 않지만
조만간 책 읽을래? 어깨 안 아플래? 하면 어깨 안 아픈 쪽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육체가 아픈데 무슨 독섭니까? 그것도 다 건강할 때하는 거지.ㅎㅎ

봄이 되서 그런지, 답답한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선지 저도 요즘 술이 땡겨요.
막걸리가 먹고 싶은데 수연님 글 읽으니 맥주가 땡기네. 마셔봤자 혼술이겠지만.
근데 어디서 보상금 줘요? 아놔, 나도 좀 받아보고 싶네. 안 되겠죠?ㅋㅋ

수연 2020-03-04 09:56   좋아요 1 | URL
출산 전에는 허리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허리로 애를 낳아서(표현이 그렇더라구요 ^^;;) 예전처럼 유연해지지 않네요. 하루 두 시간 걸어다니면 허리는 안 아픈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자주 걷지도 못하고 마스크 쓰고 걷는 게 저는 그렇게 숨막혀 죽겠더라구요;; 이래저래 게으른 걸 몸이 알아주는 거 같아요 허리 아픈 건 후후. 지지난 주에 집에 불이 크게 나서 집주인이 세입자들에게 보상금 주셨어요 ㅋㅋ 그래서 그걸로 책도 사고 외식도 하고 그랬어요. 화재 발생률이 생각보다 높더라구요 스텔라님, 자나깨나 불조심! 화재 겪고 확실히 트라우마 생겼어요. 안전한 게 짱이에요 ^^

레삭매냐 2020-03-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전기하고 물만 끊어지면
바로 암흑 세계가 도래할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수연 2020-03-04 09:56   좋아요 0 | URL
저도 집 없이 딴 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 생각 했어요 레삭매냐님, 전기랑 물 없으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카스피 2020-03-03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인덕션은 가스보다 안전하다고 하는데 누전의 위험이 있었네요.잘 고치셨다니 다행이네요☺

수연 2020-03-04 09:57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코로나 조심!! 화재조심!! 하세요. 얼른 봄을 즐길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면 좋겠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