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터 데바우어 군에게,

학창 시절에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던 독일어 선생님이 계셨네. 탁월한 괴테 전문가여서 마지막 학년 독일어 시간 내내 우리랑 함께 <파우스트>만 읽으셨지. 난 그분이 세상을 뜨기 몇 해 전에 만나 뵈었네. 우리 학년 친구들은 벌써 그 전에 찾아뵌 적이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자네 부친이 쓴 독후감을 여직 보관하고 계시더군.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는 걸 내가 복사해서 고트프리트 켈러의 작품 속에 넣었다네. 그걸 동봉하니 읽어보게.

선생님은 자네 부친을 좋아하셨고, 그 독후감도 마음에 들어 하셨네. 결론 부분이 열대여섯 살의 소년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 거창하게 흘러가고 말았지만 말일세. 어쨌든 선생님은 자네 부친의 문제의식을 높이 평가했네. 짙은 색 외투를 입은 재단사 벤첼 슈트라빈스키*가 비 오는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백작에게 인계할 마차를 몰던 마부가 그를 마차에 태워 한 식당 앞에 내려주었고, 사람들은 백작의 마차에서 내린 그를 백작으로 생각했네. 그런데 자네 부친은 그런 재단사를 단순히 환경과 상황의 노리개로 보지 않고, 그속에서 행위하는 자의 권리를 부각시켰네.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지. 다만 벤첼 슈트라핀스키가 사랑을 통해 행위하는 자가 되는 부분이 빠진 걸 아쉬워하셨네.

나 역시 자네 부친의 독후감을 좋아하네.

고트홀드 랭크로부터

* 고트프리트 켈러의 소설 <옷이 날개>의 주인공. 가난한 재단사 슈트라핀스키는 골다흐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마부의 호의로 마차를 얻어 탄다. 골다흐 사람들은 호화로운 마차에 세련된 옷차림, 귀족적인 용모를 보고 그를 백작으로 생각하여 온갖 호의를 베푼다. 주인공은 이런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차츰 가짜 백작 역할에 빠져들고, 급기야 훌륭한 가문의 아가씨 네첸과 약혼까지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의심하던 한 남자에 의해 사기 행각이 탄로나고만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확인한 네첸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택하고, 그 역시 수완 좋은 포목점 사장으로 성공한다. (405-406)

읽으면 읽을수록 스스로에게 나아간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글은 읽을 적마다 사방팔방에서 나를 비추는 거울을 연상시킨다. 주말 동안 귀향을 읽었다. 이대 안,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사람들이 제일 많았던 시간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거의 없는 시간에 나왔다. 공간이 사람을 변화하게 만든다는 김정운 박사의 마이 스페이스 프로그램을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지 가만히 숨을 들이마셔도 그 드넓은 공간감에 심호흡을 내쉴 수 있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그 순환 과정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 나를 사로잡는다. 자아가 형성되면서부터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녀보는 건 어떨까 하는 꿈을 품기 시작했고 여성의 몸으로 배를 탄다는 것은 인생 끝장이라는 막말을 들은 후에는 두려움을 품기 시작했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으니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녀보고싶다는 마음은 허상에 불과하지만 귀향을 읽는 내내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고싶어한 어린 시절 꿈이 떠올랐다. 어딘가에 닿고 어딘가로 떠나고 그 유목민적 관념이 아직도 강하게 박혀있다는 사실을 이번 주말 알아차렸다. 한편 다니엘 슈틸의 주인공들은 모두 여성들이고 그들 역시 정착하기보다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어딘가로 자꾸 떠나면서 자신의 뿌리를 뻗어 자리를 확장해나가는 공통적 경향이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다니엘 슈틸 읽는 동안 몰랐는데 오늘 귀향 다 읽고 퍼뜩 알았다. 역마살을 갖고 태어났으니 자꾸 떠돌아다니고 싶어하는 거라고 그러니 자꾸 떠돌아다니는 것이 이 아이에게도 좋을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다. 스무살 재수 시절에 엄마가 하도 속을 썩히는 나를 질질 끌고 데려간 곳에서. 만일 그때 미국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다음해 인도로 날아가기 직전에 공항에서 붙잡히지만 않았더라면 인도로 갔다면 어땠을까 종종 궁금하다. 엄마는 나를 계속 품 안에 품고싶어한다. 어릴 때부터 스무살이 넘어서도 내가 외국에 있어도 마흔이 넘어서도. 엄마가 돌아가셔도 그 마음이 계속 내게 닿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딸아이를 갖게 되면서 엄마의 그 강한 모성 본능이 내게도 넘칠 정도로 있다는 걸 깨달았고. 새벽 졸면서 읽은 구절들은 다시 읽어봐야겠지만 계속 안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외부로 뻗어나가는 빛살을 피할 도리 없다. 이건 운명이야, 팔다리가 부러지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지라도 길 위에서 나아가고있다는 개념이 없다면 그건 좀비와 같은 삶이야 라고. 페터의 아버지 캐릭터는 이제까지 읽어온 소설들 속 인물 중 압도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런 인간들은 꼭 세상의 중심에 서있다 그것도 당당하게. 이야기가 삶을 형성한다. 혹은 이야기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독자의 삶 역시 영향을 받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 귀향을 읽는 내내 강하게 깨달았다. 독일어 공부에 매진하게 되면 3년 후 그때쯤 꼭 원어로 읽어보고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12-30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엄청 두껍네요.
김정운 교수의 공간 봤군요.
저도 처음엔 뭔가 싶었는데 나중엔 공감이 많이 되더군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어딘가 생각하는 중이어요.
나중에 책 한 권 쓰겠어요.ㅎㅎ
그래도 요즘 같은 추운 계절엔 이불속만큼 좋은 공간이 또 있을까 싶어요.ㅋ

올해도 정말 내일 하루 나았군요.
가는 2019년 잘 보내주구요, 2020년 잘 맞이하세요.
올해 수연님과 소통하게 된 게 젤 큰 기쁨이었어요. 진짜루!^^

수연 2019-12-30 21:13   좋아요 0 | URL
가까이에서 찍어서 두꺼워 보이는 거 같아요 스텔라님, 안 두꺼워요 ^^;; 저도 그 프로그램 보면서 좋아하는 곳이 얼마나 되나 헤아려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놀랐어요. 내년부터 좋아하는 공간에 직접 발도장 찍고 좋아하는 공간 목록 만들어나갈 생각해보았어요. 이불 속 공간은 쿠쿠 공감 백퍼입니다. 하루가 가고 또 그 하루가 가고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니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어 좋기는 한데 별반 큰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스텔라님과 이야기를 나눈 올해 제게도 정말 좋았어요. 다른 분들이 발도장 많이 찍어주시는 곳이 아니라 한적하기 그지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말씀 남겨주시고 그래서 많이 따뜻했어요. 내년에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