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렇게 조용히 연말을 보내는 건 오랜만이라서 낯설다. 가만히 앉아서 책상 맞은편 벽을 응시하던 프랑스 시골 겨울살이와 비슷하다. 흥겹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그 흥겨움은 더 이상 방황이 아닌지라 나이먹는다는 과정이 어떤 건지 이제는 몸소 알겠다. 갱년기 증상은 잠시 잠잠했다가 요즘 다시 시작되어 새벽마다 일어나게 된다. 나이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할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나 키워주시던 할머니는 귤을 까주실 적마다 귤껍질을 모조리 까고 그 안에 든 알맹이들 껍질까지 모조리 까서 하나씩 하나씩 입에 넣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다섯살이 될 때까지 귤은 그렇게 까먹는줄 알았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잠이 없어? 나이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 하셨다. 피는 전혀 섞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할머니를 닮았다. 할머니는 웃음이 많았다. 아름답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얼굴을 돌리면 거의 24시간 내내 365일 내내 나를 보고 웃어주는 한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는 겪은 이들만 알 일이다. 엄마가 그 역할을 많이 해주는데 나는 할머니가 그랬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이 내 피를 만들고 내 근육을 만들고 내 웃음을 만들었다. 엄마는 내내 그걸 미안해했지만 카리스마 있고 나가서 큰소리 치고 그러는 걸 좋아하셨던 엄마인지라 할머니만큼 다정하게는 키워주시지 않았을듯 하다. 엄마 인생이 그래서였겠지만 항상 소리치는 엄마가 나는 좀 무서웠다. 다혈질인 것도 감당하기 힘들었고 그건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지만 마주하면 쫄보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같이 있는 순간들을 줄이려고 하는 것도 마음이 따라서 하는 일. 빅걸에서 빅토리아가 고생스러워도 아빠, 엄마랑 같이 살지 않으려고 독립하려고 하는 순간들이 모두 이해가 저절로 되는. 돌이켜보면 할머니가 엄마였다면 엄마는 아빠 역할을 했던지라_ 어쨌거나 잘 웃는 할머니가 좋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난처한 경우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웃는 버릇이 생겼다. 할머니가 그러셨다. 술에 취한 엄마가 밤 늦게 울며불며 신세 한탄을 할 때에도 할머니는 난처한 웃음을 한껏 짓고 엄마 등을 쓸어주셨다. 위로를 해줄 때는 웃는건가 갸우뚱했다. 


 할머니와 헤어지던 일곱살 겨울, 할머니와 내가 서로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본 엄마도 조용히 눈물. 할머니가 내 곁에 없으면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 않는 거 보고 신기했다. 헤어지고 1년 동안은 매일매일 전화를 걸어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어린 마음에도 다 잊어버릴까 두려웠는데 할머니와 함께 한 7년이 나를 지금의 사람으로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순간들 모두 기억난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좋아진다. 추울 이들을 생각하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싶다가도 몽글몽글 포근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것도 나이드는 현상인가 싶다.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것들만 떠오른다. 할머니는 나 프랑스 있을 때 그 겨울에 돌아가셨다.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고 죄송스러워 묵묵히 책상 맞은편 벽을 쳐다보던 기억도 그래서. 할머니 유언을 한땀한땀 내 심장에 새기던 시간. 허나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쉽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아직 살아있으니 할머니 유언을 지킬 날이 남아있다는 게 변명이 될까. 어젯밤 딸아이 피아노 레슨 끝날 때까지 동네 빵집에 앉아 라떼를 시켜놓고 책을 읽었다. 레슨이 끝난 딸아이가 너무 춥다며 청귤차를 사달라 했다. 맛이 있겠는가 했는데 맛있어서 조금 놀랐다. 나는 계속 다니엘 슈틸 언니, 딸아이는 트와일라잇. 추운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종알종알 할머니가 까주신 귤을 오물오물 씹으며 말하면 너의 겨울은 따뜻하리라, 아가, 할머니가 저 세상 가서도 그리 해줄 테니 걱정말아라 해주시던 할머니 웃음. 사랑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겠는가마는 할머니 웃음이 내게는 표본이 되었다. 모자라고 답답한 순간이 있어도 그걸 받아들여줄 수 있는가 내치는가 여기에서부터. 내 인생 하나의 마법이었던 당신의 웃음. 내 겨울을 이리 따뜻하게 만들어주시는 당신이란 마법사. 오늘 아침 유난히 추워 기억이 난다.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도 전할 수 있으려나 당신만큼은 할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하면서 등교하는 딸아이 옷 단단히 여며준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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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06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연님 서재에 트와일라잇이 웬일인가 싶어 북플에서 보고 읽으러 왔더니 따님이 읽는 책이었군요! 한때 제가 애정하던 책이었지요.

많이 추워요, 수연님. 날씨가 차갑습니다. 수연님도 청귤차 드세요.

수연 2019-12-07 14:32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려구요 다락방님! 친구가 얼마나 잼난 줄 알아?! 이래서 꼬드김에 넘어가서 읽네요. 딸아이 다 읽고 읽으려구요. 다락방님 나중에 찐하게 소주 한잔 해요. 아 소주 못 드시나;; 아니면 뜨끈한 와인이라도. 억지로 그러고 싶지 않지만 기회가 되면 다락방님 보러 갈게요. 다락방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다락방 2019-12-07 14:34   좋아요 0 | URL
저 소주 사랑합니다!!

수연 2019-12-07 14:40   좋아요 0 | URL
전 폭탄주 좋아해요, 많이 못 마시지만 ^^

레삭매냐 2019-12-06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 저에게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선물해 주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두었는 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수연 2019-12-07 14:33   좋아요 0 | URL
트와일라잇 시리즈 선물하는 친구분도 있고 부러워요 레삭매냐님, 날이 추워요. 뜨끈한 거 많이 드세요. :)

단발머리 2019-12-06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요.
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예상보다 맛있는 청귤차도, 그리고 트와일라잇 읽는 예쁜 아이도요. 사랑이 이렇게 전해지나 싶기도 해요.
수연님 글을 읽는 일이 슬프면서도 행복해요. 잘 읽고 가요.
참, 다니엘 슈틸 화이팅!!!

수연 2019-12-07 14:34   좋아요 0 | URL
청귤차 진짜 생각보다 맛있어요. 나중에 드셔보아요 단발머리님, 어제 아가는 트와일라잇 다 읽고 저는 빅걸 다 읽었어요. 이번엔 좀 생각보다 지루했는데 그래도 아직 질리지는 않아서 더 읽어보려고 해요! 감기 조심 감기 조심!!

moonnight 2019-12-06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할머니와의 추억에 뭉클해집니다ㅜㅜ

수연 2019-12-07 14:35   좋아요 1 | URL
사랑은 좋은 거 같아요. 아무리 부르짖어도 질리지 않는 거 보면 어쩔 수 없지 싶어요 문나잇님 :)

2019-12-07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7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1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1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