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속의 독수리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6
윌리스 브림 지음, 유향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기독교가 제국을 좀먹고, 왕권 다툼으로 나라 안이 혼란스러운 시기, 그리고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멸망해가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책무에 충실하고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막시무스같은 인물들이다.
이 책은 5세기 초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사라져 간 로마의 마지막 군단과 그 군단을 이끈 장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로마를 그린 역사 소설들이 대부분 융성했던 제국의 전반기를 다루고 있는데 비해 '눈 속의 독수리'는 제국이 황혼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브리타니아(영국) 북쪽 지방의 사령관이었던 막시무스는 변방중의 변방이자 갈리아 전선의 최전방의 방위를 맡게 된다.
그는 계속되는 병영생활에 지쳐 짜증을 내기도 하고, 자신을 갈리아의 황제로 추대하려는 부하들을 꾸짖기도 한다.
제국의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해 탐욕스럽고 무능한 관리들과는 언성을 높이고, 국가보다 스스로를 우선시하는 기독교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타협하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눈보라 속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벌이다가도, 가끔은 길가의 폐허 위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담담하고 건조한 묘사가 오히려 리얼함을 더한다. 전투장면 뿐만 아니라 아닌 막시무스가 설전을 나누는 장면에서도 박진감이 넘칠 정도다.
당시 로마와 로마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묘사가 이 놀라운 걸작을 완성시켰다.
손가락을 자르는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하던 당시 부유층 청년들, 군인과 행정가들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 로마군단의 명령체계과 전략 전술, 수많은 이민족과의 갈등...
이 책은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당시 로마의 융성과 쇠망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뒤표지에는 이 책이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원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표현이다.
'글래디에이터'에 영감을 주었을지언정 결코 원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작품이 영화나 TV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ROME'이나 '글래디에이터'를 능가하는 대작이 되었을 것이다.
눈보라고 매섭게 몰아치는 북유럽의 혹독한 전장, 넓은 회의장에서 벌어지는 나태한 관료들과의 설전, 쓸쓸한 풍경 속에 홀로 앉아 과거를 회상하는 주인공의 우수, 물밀듯이 밀려오는 게르만 전사들, 피로의 추위에 지쳤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로마의 병사들,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적막과 시체들만 가득한 전장의 쓸쓸함...
특히 마지막 수십 페이지가 넘는 전투 장면은 그 어떤 헐리우드 영화도 재현해낼 수 없을 만큼 치열하고 비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