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choo.com 의 홍유민 님의 글입니다.
----------------------------------------------------------------------
스포츠에 있어 지나친 내셔널리즘의 개입은 마땅히 지양해야 하겠지만 유독일본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그것이 쉽지않은것이 사실입니다. 특히나 한일 양국간의맞대결에 있어서 국민들이 쏟는 관심과 승리에 대한 열망, 선수들이 느낄 부담감과 필승의 의지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쟁을 방불케 했던 축구의 韓日전이 그랬고, 십여 년 전 하종화와 나까가이치로대표되던 배구 라이벌전이 그랬으며 심지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있는 한일 양국선수들의 성적에 대해서도 언론과 팬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데뷔 첫해에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고 연일 최고의 실력을 뽐내는 야구천재 이치로와, 초반의 부진에서 벗어나 최고명문 양키스의 중심타자 자리를 꿰찬 마쓰이의 활약에 대단하다 박수를 치면서도 가슴속 한켠에 생기는 미묘한 질투심과함께 최희섭과 서재응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이 더욱 분발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드는 건 비단 저 뿐만의 감정은 아닐겁니다.
요즘에야 한일양국의 많은 선수들의 진출해서 기량을 과시하는 메이저리그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이곳의 두터운 벽을 처음으로 허문 선수가 있으니 바로 노모히데오입니다.
폭포수같이 떨어지는 포크 볼을 앞세워 빅리그의 강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승승장구 하던 데뷔초기의 노모 히데오는 정말로 센세이셔널했습니다. ‘토네이도'라고 불리우며 전 미국을 들썩이게 했고 올스타전 선발출장에 이어 당해신인왕 타이틀까지 가져가며 박찬호에 앞서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 노모는 우리에겐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박찬호 선수의 96년 빅리그 첫 승이 9시 뉴스탑으로 나오고 10승도 불가능할거라는 비관론이 대두되었던걸 기억해보면 당시의메이저리그에 대한 우리의 체감장
벽은 굉장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승격으로 LA다저스는 순식간에 국민구단이 되었고 찬호와 노모의 어색한 동거는 시작되었죠. 많은 국내 팬들은 다저스를 응원하면서도 노모의 부진을 바라는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되곤 했습니다. 97년 나란히 14승을 올렸지만 승률에서 박찬호가 앞섰었기에 "박찬호 판정승!"이란 당황스런 기사가나오기도 했으니까요. 그만큼 당시의 노모는 같은 팀메이트임을 떠나 적어도 우리에겐 박찬호가 누르고 올라가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팬들과 언론의 두 선수간의 라이벌구도화는 예상외로 싱겁게 끝이납니다. 빠른 강속구를 앞세워 욱일승천하던 찬호에 반비례해 노모는 일본에서의 수년여간의 살인적인 혹사로 인한 후유증으로 어깨가 고장 난 것입니다. 결국 다저스에서 방출된 노모는 투수로서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며 뉴욕, 시카고,밀워키, 디트로이트를 전전하는 처량한 저니맨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주위에서는 구차하게 선수생활을 연장하느니 명예롭게 은퇴하기를 권고했고 그나마 일본 팬들과 매스컴의 관심도 이치로와 사사키의 미국진출에 발맞춰 시애틀로 온통 집중됩니다. NHK에서조차 노모의 선발등판경기를 포기하고 시애틀의 경기만을 편성했었다는 것은 당시 노모의 처지를 잘 대변해주는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전일본은 이치로에 열광했고 방송 중계진과 기자들은 온통 시애틀 원정경기를 따라다녔죠. 그렇게 노모는 잊혀져 갔습니다.
"나는 단지 마운드 위에 서길 원할 뿐..."
일본에서 자국으로 돌아와 명예롭게 은퇴하라며 거액의 돈으로 유혹할 때 노모가 남긴 말입니다.
당시의 노모는 이미 좋은 하드웨어를 잃어 버린 지 오래 였습니다. 팔꿈치 수술의 여파로 직구의 위력은 현저히 감소했고 일본시절, 9일만에 503개의 공을 던졌다는 불가사의한 어깨와 연투능력도 나이가 들며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오랜 메이저리그 경험을 통해 익힌 두뇌 피칭과 그래도 근근히 위력이 살아있던 포크 볼 정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투수로서 가장 치명적이라는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이후로도 수 차례 어깨부상에 시달렸으며 받아주는 구단이 없어서 이곳 저곳을 떠돌 수 밖에 없던 당시의 상황은 일본 최고투수로 불리우며 빅리그에서도 영광의 길을 걸어온 그로서는 분명 감당하기 힘들 시련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좌절하지 않고 선수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건 야구선수로서의 투혼과 근성, 그리고 마운드에 서있겠다는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수십만 불에 불과한 연봉을 감수하고도 디트로이트라는 리그꼴찌팀을 선택했던 건 그곳에서는 그가 마운드에 설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잊혀져갈때쯤 노모는 거짓말처럼 보스턴에서 양대리그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남기며 다시금 부활의 날개를 펼칩니다. 부상은 그에게 빠른속구와 강한 어깨를 빼앗아갔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과 투수로서의 자긍심까지 앗아가진 못했던 것입니다.
이 일본인 사무라이는 올 시즌 믿어지지 않는 성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여년 전, 압도적으로 타자를 농락하던 '토네이도'의 모습은 아니지만 선수생활이 끝날뻔한 위기에서 다시 살아돌아온 이 '오뚜기'의 연이은 호투에 요즘 다져 스타디움의팬들은 진심으로 존경어린 박수를 보내줍니다. 마치 만화속 주인공의 스토리처럼그의 영광이 시작되었던 다저스에서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것이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예전 노모를 제치고 다저스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던, 그리고 완봉승을 하고 기립박수를 받던 박찬호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인생사새옹지마라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요즘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고있는 박찬호를 지켜보며 그보다 훨씬 힘들었던 여건 가운데서도 극적인 부활에성공한 노모와 같은 드라마를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노모만큼의 야구에 대한 애정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않을 노력이라는 무기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모가 데뷔이후 계속 정상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저에게 있어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노익장에 박수를 쳐줄지언정 아마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긴 힘들었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야구선수로서 최악의 상황까지 내몰리면서도 온갖 굴욕과 낙담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 노모의 모습에 이제는 진심어린 응원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절망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 자신의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냉정함, 그리고 꿈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등은 비단 스포츠 선수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에게 역시 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1968년 생의 노모의 야구인생은 이제 황혼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먼 훗날이 지나도 노모 히데오라는 야구선수는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야구를 잘하는 선수들은 많이 등장할지언정 노모만큼 꿈과 열정을 가지고 야구를 진정으로 사랑한 선수를 찾기는 쉽지않을 것입니다..
"메이저리그는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이다.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이며 그 외에 내가 선택할 건 아무것도 없다.” - 노모 히데오(野茂英雄)
인생을 걸만한 가치 있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큰 행복입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삶, 그 자체로 이미 멋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